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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一思 석용진) 갈대밭 열리는 그곳, 굽이진 수로 그림이다, 더없이 맑고 푸른 저 곡선 어떤 미인이 저렇게 마음 지워 두고 누웠으랴
그림이다. 수채화일까 아님 파스텔화? 뭍과 갈대밭. 그 곁에는 일곱 번 색깔이 변한다는 염생식물 칠면초와 질퍽한 갯벌. 그런 다음 모래밭을 지나면 마침내 바다. 이런 수순으로 천혜의 질서가 잡혀 있는 순천만. 여기에 흰 구름 실은 더없이 맑고 푸른 하늘이 보태져 조화롭다. 그래. 세상 어디 이만한 그림 있으랴. 뭍에서 바다 쪽을 들여다볼수록 갈대밭은 갈대밭대로, 칠면초는 그들끼리, 갯벌은 또 갯벌끼리, 모래밭은 그들대로. 그러다 한꺼번에 혹은 칠면초와 갯벌이, 이번에는 갈대밭과 모래밭이, 한참후에는 갯벌과 모래밭이 함께 노래를 한다. 자잘자잘. 서로를 다독이며, 보채며, 의식하며 시를 읊는다. 어떤 시일까. 호라티우스는 "그림은 말 없는 시다. 그리고 시는 말하는 재능을 가진 그림"이라고 했다는데 순천만을 두고 한 말은 아닐까. 그뿐이랴. 연안의 질서는 계속된다. 농게, 철게, 짱뚱어가 개펄의 넓이를 재며 갯개미취, 비쑥, 갯질경이, 나문재, 해룡나물, 퉁퉁마디를 이부자리 삼아 기고 뛴다. 그러다 진객인 흑두루미가 찾아들면 순천만은 또 한 번 윤회의 바퀴에 온 전신을 맡기며 화폭에서 붓을 놓는다. 붓을 놓는다고 그림이 어디 완성일까. 아니다. 그것은 미완의 완성. 이것이 순천만이다. 순천만의 맛이다. 블라맹크는 "경이로운 그림은 맛있는 요리. 맛 볼 수는 있지만 설명할 수는 없다"고 했다.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순천만의 맛. 테너 박종열이 부른 '순천만의 꿈'에 그 맛들이 은근슬쩍 배어 있다. 장윤호가 작시하고 테너 조성호가 작곡한 노래. 그 1절. "순천만 포구에 가면 마음문을 활짝 열어서 갈대숲 소곤거리는 이야기를 듣지요/ 귀대고 가만 들으면 숲 사이로 바람 지나고 사람들 내려놓는 한 숨을 거르네/ 밤마다 가슴엔 그리움이 가득하고 우리가 버린 생각에 빈자리를 채우며 갈대밭 바람소리 사각사각 그려요". 노랫말이 바닷바람에 실려 잔잔히 만으로 퍼질때. 꼬막, 피조개, 바지락도 노래 듣고 움틀거리며 갯벌을 헤집는다. 물결은 그 소리에 또다시 그림을 그리듯 화답하며 시를 읊는다. 이윽고 적금도, 둔병도, 남도, 조발도, 백일도, 소백일도, 원주도, 저도, 해하도, 진지도, 장도, 지주도. 해도, 대여자도, 소여자도, 대운둔도, 소운둔도. 정감 가는 이름들이 즐비하다. 좀 멀고 가까운 작고 큰 섬들. 그들이 하나씩 둘씩 어느새 노래에 동참한다. 노래는 일몰보다야 낙조 때가 제격이다. 낙조(落照). 이태극이 절묘하게 표현한 그런 낙조. 그의 '낙조'라는 시다. "어허 저거, 물이 끓는다. 구름이 마구 탄다./ 둥둥 원구(圓球)가 검붉은 불덩이다./ 수평선 한 지점 위로 머문 듯이 접어든다.// 큰 바퀴 피로 물들며 반 남아 잠기었다./ 먼 뒷섬들이 다시 환히 얼리더니,/ 아차차, 채운(彩雲)만 남고 정녕 없어졌구나.// 구름빛도 가라앉고 섬들도 그림진다./ 끓던 물도 검푸르게 숨더니만/ 어디서 살진 반달이 함(艦)을 따라 웃는고." 외로운 섬 혼자 부르기도 하고 섬들끼리 합창도 한다. "순천만 포구에 가면…" 그렇다. 가면 무슨 좋은 일이 있을랑가? 그 기대. 그게 뭘까? 노랫말처럼 우리들 버린 생각에 빈자리를 채우는 갈대밭 소리겠지. 갈대밭. 이미 히끗히끗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며 허튼 미련을 불어 버리는 갈대. 순천만으로 향한 갈대밭이 열리는 그 곳에는 아름다운 S라인 수로가 빼어난 곡선미를 자랑한다. 어떤 미인이 저렇게 마음 비워 두고 누웠으랴. 저 곡선. 이 시월의 마지막 주말을 풍요롭게 적시며 흥건히 흐르는 저 물줄기와 함께 누운 미인. 그 곁에는 아무도 없다. 시월처럼 아무도 없다.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 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해죽, 해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은 걸어가면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거리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돌다//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 같다/ 아,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문태준의 '시월에' 전문). 당연하지. 오늘은 다들 집에 있을 리 없지. 순천만에 있으니까. 야트막한 오름길. 계단이 잘 닦인 오름길. 30여분이면 이르는 용산전망대. 그곳서 바라본 순천만은 진실로 벅차다. 감격. 순전히 자연에 대한 감흥이다. 만리장성을 여기에 견줄 수 있으랴. 피라미드인들 이를 감당하랴. 미켈란젤로인들 이에 가당치 않으리. 그런 순천만은 물질적 역량으로 자연에 대항하고 정복하려는 아무런 낌새도 없다. 늘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자연에의 종속을 추구하고, 복종하며 일치하는 것이 이미 버릇일테지. 그 굽이진 곡선 물길을 감싸 안는 순천만은 오늘도 늘 그렇듯이 눈 깜짝 할 사이에 가버리고 마는 세속의 온갖 못된 과제나 공적들을 턱없이 괴거나 하는 일 없이 무심히 스스로를 자연에 던지고 있다. 저 붉은 낙조와 함께. 저 어질게도 굽이진 곡선의 물길과 함께. 사진=순천시청 제공 뭍과 갈대밭/그 곁에는 일곱 번 색깔이 변한다는 염생식물 칠면조와 질퍽한 갯벌/그런 다음 모래밭을 지나면 마침내 바다/이런 수순으로 천혜의 질서가 잡혀 있는 순천만/여기에 흰 구름 실은 더없이 맑고 푸른 하늘이 보태져 조화롭다/그래, 세상 어디 이만한 그림 있으랴 협찬 : 대구예술대학교 |
/글=김채한객원기자 namukch@hanmail.net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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