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각 옆 회화나무, 그날 약탈의 참상 알리려고 파르르
“이곳은 산도 푸르고 옷 색깔이 너무 다양해서 마치 커다란 꽃바구니를 보는 것 같다. 게다가 그들이 강화 왕립도서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책은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지만 예술품에 가깝지 아니한가?” - 한 프랑스 군인의 회고록에서
“황제(나폴레옹 3세) 만세”를 외치며 강화도 해안에 오른 프랑스 군인들은 무기고를 점령하고 외규장각 서고에 소장된 조선 고문서들을 약탈했다. 그렇게 먼 나라에 건너간 외규장각 의궤들은 1975년에야 재불학자 박병선 박사에 의해 그 존재가 알려졌다. 이후 계속된 우리나라의 반환 요구로 올해 5월 드디어 297권 모든 의궤가 고국으로 돌아왔다. 병인양요(1866년) 이후 145년 만이다.
대부분 왕이 보던 유일본
외규장각 의궤 특별전(20일까지, 이후 전국 순회)이 열리고 있는 강화 역사박물관을 찾았다. 특별전시실 유리 너머 펼쳐진 의궤들을 보며 프랑스 군인들에 의해 불에 탄 외규장각을 생각해 봤다. 145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의궤들의 사연과 함께.
의궤(儀軌)란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다. 왕실과 국가 의식·행사의 준비와 실행, 마무리까지 전 과정을 보고서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조선 건국 때부터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임진왜란 이후 것만 남아 있다.
의궤에는 왕이 보도록 한 부만 제작하는 어람용(御覽用)과 여러 권을 만들어 관련 부서 및 지방 각 사고에 나눠 보관하는 분상용(分上用)이 있다. 강화 외규장각에 있던 의궤는 대부분 어람용 유일본이 많아 더욱 중요성이 컸다. 어람용과 분상용을 함께 놓고 비교해 보면 제본에서부터 종이, 안료의 차이가 마치 진품과 복사본을 보는 듯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림쟁이가 본 어람용 의궤에는 말 그대로 손을 대면 묻어날 듯 고운 빛깔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어디 조용한 곳에 앉아 천천히 그 두꺼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넘겨보고 싶은 욕심이 불현듯 생겨났다.
내친김에 외규장각이 있던 고려궁터로 향했다. 고려궁터에는 최근 유물 발굴과 고증을 통해 새로 만든 외규장각이 살아남은 조선시대 전각 몇 채와 함께 덩그러니 서 있었다. 400년 묵은 회화나무만이 그곳이 평범한 장소가 아니란 것을 말해주는 듯했다. 우리나라에선 전란으로 터만 남은 유적지를 곧잘 접하게 된다. 이런 곳으로의 답사는 볼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여백이 전해주는 공허함 때문에 아쉬운 느낌이 들곤 한다.
고려궁터는 고려 조정이 몽골의 침략으로 도읍을 송도에서 강화로 옮겨 39년간 항쟁할 때 궁궐이 있던 곳이다. 결국 항복을 한 후 개성으로 환도하게 되는데, 몽골의 요구로 궁궐을 모두 파괴해야 했다. 조선 인조 때도 후금의 침략(병자호란)으로 왕이 강화로 피란했다.
이후 전화로부터 귀한 서적들을 보호하기 위한 대비책이 논의되기에 이른다. 이에 강화도가 최적의 보장지처(保障之處)로 거론되면서 1782년(정조 6년) 창덕궁의 규장각 외에 추가로 강화에 왕립 도서관(외규장각)이 세워졌다. 하지만 짓궂은 미래를 누가 예측할 수 있었을까. 100년도 못 되어 외규장각은 서양 군인들에 의해 불태워졌다.
이맘때 물러갔을 프랑스군
병인양요에 참전했던 프랑스 해군 병사들은 고국으로 돌아가 회고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중 해군 소위 후보생이었던 젊은 스케치화가 앙리 쥐베르는 조선을 무척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특히 그는 허름한 초가에까지 책이 있다는 사실에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프랑스의 한 주간지에 “이곳에서 감탄하면서 볼 수밖에 없고,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어디든지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썼다.
오래된 회화나무와 텅 빈 외규장각을 스케치북에 담으며 그때의 가을을 상상해 봤다. 프랑스 군인들이 퇴각하던 때도 11월 중순이었다. 당시의 뜨거운 불길을 기억하고 있을 회화나무도 지금 같은 노란빛이었겠지? 회화나무로 날아들던 고서의 재들은 낙엽과 함께 바람 속으로 흩어졌으리라. 나의 아쉬움일까. 혹은 회화나무의 아쉬움일까. 바싹 마른 낙엽들이 텅 빈 경내를 이리저리 뒹굴며 고려궁터를 한껏 어루만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