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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 속 여성] 티에폴로 - 이피게네이아의 희생

눌재상주사랑 2008. 11. 28. 16:09
[명화 속 여성] 티에폴로 - 이피게네이아의 희생
이기적인 父情으로 위기에 빠진 이피게네이아
  • “부르짖는 그녀의 절규에도 그녀의 순결한 청춘에도 호전적인 지휘관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는 자기 딸이 졸도하거든, 그녀의 겉옷으로 사정없이 휘감아 가문에 대하여 저주의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그녀의 아름다운 입을 틀어막으라고 명령했다네, 폭력과 소리 없는 노끈의 힘으로….”

    그리스의 극작가인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듣기만 해도 무언가 꺼림칙한 상황이란 것을 짐작하게 한다. 세상의 어떤 아버지가 딸을 제물로 바친단 말인가. 그것도 부하들에게 그녀를 동여맬 것을 지시하면서 말이다.

    이야기 속 ‘아버지’는 그리스군의 총사령관이었던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이다. 그리스와 트로이 간의 전쟁을 앞두고 아가멤논은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봉헌된 사슴을 사냥하면서 여신의 진노를 산다. 때문에 바다에 강풍이 불어 그리스연합군은 트로이원정을 떠나지 못하고 항구에 발이 묶이고 만다. 답답해진 아가멤논은 예언자를 찾고, 죄를 지은 자의 딸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예언을 듣는다. 그리고 호전적이고 잔인한 성정을 지녔던 아가멤논은 딸을 산 제물로 바치는 길을 선택한다. 딸과 가족에게는 영웅 아킬레우스와 결혼시키겠다는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을 남긴 채.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네이아는 국가와 아버지를 위해, 그리고 국가와 아버지에 의해 제단에 오른다. 하지만, 사제가 그녀의 목에 칼을 들이댄 순간, 모든 것을 지켜보던 아르테미스여신이 기지를 발휘해 그녀를 빼돌리고 사슴 한 마리를 가져다 놓는다. 이탈리아의 화가 티에폴로는 아르테미스가 이피게네이아와 사슴을 맞바꾸기 직전 위기의 순간을 화면에 담았다.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딸을 아버지는 애써 외면하고 있다.

    필자는 오래전 의대생 시절, 아가멤논과 이피게네이아와는 반대의 사례를 경험한 적 있다. 당시 존경하던 내과교수님께 먼 친척아저씨의 진료를 의뢰한 적이 있었는데, 만성 신부전으로 오랜 세월 고생하시다 당시 주목받기 시작했던 신장이식수술을 받아보고자 한 것이었다. 마침 고교에 다니던 환자의 딸이 기증의사를 밝혀와 수술날짜만 잡으면 되겠다고 안도하던 터였다. 그러나 교수님께서는 단호하게 이식을 반대하셨다. 여생이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가장에게 앞길이 구만리 같은 건강한 처녀의 신장을 이식하기엔 가족의 부담이 앞으로 더 클 것이라는 의견이셨다. 이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수술을 포기한 환자는 곧 세상을 하직하였다. 남은 가족은 환자 몫까지 열심히 살았고, 따님은 결혼해 아이를 낳고 복스럽게 살고 있다.

    ‘희생’이란 윤리적으로 부당한 손해를 입는 것이나 다름없다. 필자의 친척아저씨는 역할이 바뀌었을 뿐, 모종의 희생을 최소화시켜 결국 남은 이들에게 도움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강풍을 가라앉히기 위해,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자신의 명예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딸을 사지로 내모는 아가멤논의 이기적인 부정(不精)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심형보 바람성형외과 원장

    트로이전쟁 후 고향으로 돌아온 아가멤논을 반겼던 것은, 환영과 승리의 축하연이 아닌, 딸의 죽음과 남편의 이기심으로 인한 증오를 삭이지 못했던 부인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복수의 칼날이었다. 여성은 전통적으로 약자였지만, 약자의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엄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가멤논이 알았더라면, 이피게네이아는 상처 없이 행복하게 살았던 여인으로 기록됐을지도 모른다.

    심형보 바람성형외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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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08.11.28 (금) 09:32, 최종수정 2008.11.28 (금) 0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