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재상주사랑 2008. 12. 15. 04:04

CEO를 위한 漢詩 명편 (1) 술잔을 들며
고두현

조회수 1,960 등록일 2008/08/08 16:35

술잔을 들며                백거이

달팽이 뿔 위에서 무엇을 다투는가

부싯돌 번쩍하듯 찰나에 사는 몸

풍족하나 부족하나 그대로 즐겁거늘

하하 크게 웃지 않으면 그대는 바보.

對酒(二)

蝸牛角上爭何事, 石火光中寄此身. 隨富隨貧且歡樂, 不開口笑是癡人.


통찰의 힘은 긍정에서 나온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걱정으로 마음이 졸아들 때 이 시를 읊으며 용기를 냈다고 한다. 눈앞의 작은 분쟁을 경계하고 호방하게 큰일을 도모하는 지침으로 삼기도 했다.

≪장자(莊子)≫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전국시대 위나라의 혜왕은 불가침 조약을 맺었던 제나라 위왕이 약속을 깨자 자객을 보내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의견이 분분했다. 그래서 재상인 혜자에게 의견을 물었다. 혜자는 도가의 현인인 대진인(戴晉人)을 만나보라고 권했다.

혜왕을 알현한 대진인이 '달팽이의 왼쪽 촉수에는 촉(觸)씨 나라가 있었고 오른쪽 뿔에는 만(蠻)씨 나라가 있었는데 사소한 영토분쟁으로 전쟁을 일으켜 수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는 달팽이의 우화를 들려줬다. 혜왕이 엉터리 이야기라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주는 끝이 없습니다. 끝없는 우주에서 우리 지상을 내려다보면 어떻겠습니까? 우리 위나라와 제나라의 분쟁 역시 달팽이 두 촉수의 분쟁과 다름이 없지 않겠습니까?"

당대에 위업을 이루고 간 정주영 회장의 통찰력도 여기에서 나왔다. 그는 뭐든지 가능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부하 직원들이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내면 "해 봤어?"라는 한 마디로 '부정의 싹'을 잘라버렸다.

1952년 12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부산의 유엔군 묘지를 방문하기 직전,미군 측이 "황량한 묘지를 보이고 싶지 않다"고 하자 그는 낙동강변의 보리싹을 수십 트럭 싣고 와 묘지를 순식간에 푸른빛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런 것들이 다 긍정의 뿌리에서 나온 통찰의 힘이다.

백거이 [白居易, 772~846]
요약
중국 중당 기(中唐期)의 시인. 작품 구성은 논리의 필연에 따르며, 주제는 보편적이어서 ‘유려 평이(流麗平易)’한 문학의 폭을 넓혀 당(唐) 일대(一代)를 통하여 두드러진 개성을 형성했다. 주요 저서에는《장한가(長恨歌)》,《비파행(琵琶行)》등이 있다.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
별칭 자 낙천(樂天)
국적 당(唐)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뤄양[洛陽] 부근 신정[新鄭]
주요저서 《장한가(長恨歌)》,《비파행(琵琶行)》(816)
본문

자 낙천(). 호 취음선생() ·향산거사(). 본적 산시성[西] 타이위안[]. 뤄양[] 부근의 신정[] 출생. 이백()이 죽은 지 10년, 두보()가 죽은 지 2년 후에 태어났으며, 같은 시대의 한유()와 더불어 ‘이두한백()’으로 병칭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5세 때부터 시짓는 법을 배웠으며 15세가 지나자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는 시재를 보였다. 대대로 가난한 관리 집안에 태어났으나, 800년 29세로 진사()에 급제하였고 32세에 황제의 친시()에 합격하였으며, 그 무렵에 지은 《장한가()》는 유명하다.

807년 36세로 한림학사가 되었고, 이듬해에 좌습유()가 되어 유교적 이상주의의 입장에서 정치 ·사회의 결함을 비판하는 일군의 작품을 계속 써냈다. 《신악부() 50수》(805)는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811년 40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이듬해에 어린 딸마저 잃자 인생에 있어 죽음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불교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814년 태자 좌찬선태부()에 임용되었으나, 이듬해에 일찍이 사회를 비판하는 그의 시가의 대상이 되었던 고급관료들의 반감을 사서 주장[]의 사마()로 좌천되었다. 그 곳에서 인생에 대한 회의와 문학에 대한 반성을 거쳐 명시 《비파행()》(816)을 지었다. 818년 중저우자사[]가 되었으며, 임기를 마치고 장안()에 돌아오자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를 피하기 위하여 822년 자진해서 항저우자사[]가 되었다. 항저우의 아름다운 풍광()에 촉발되어 시작()은 계속되었고, 문학적 지기()로서 트고 지내던 원진()과 만나게 되어 그것을 계기로 《백씨장경집()》(50권, 824)을 편집하였다. 825년 쑤저우자사[]로 전임하였으나 827년에는 중앙으로 불리어 비서감()에 임명되었다.

829년 58세가 되던 해 뤄양에 영주하기로 결심, 허난부[]의 장관이 되었던 때도 있었으나 대개 태자보도관()이라는 명목만의 직책에 자족하면서 시와 술과 거문고를 삼우()로 삼아 ‘취음선생’이란 호를 쓰며 유유자적하는 나날을 보냈다. 831년 원진 등 옛친구들이 세상을 떠나자 인생의 황혼을 의식하고 뤄양 교외의 룽먼[]의 여러 절을 자주 찾았고 그 곳 향산사()를 보수 복원하여 ‘향산거사’라는 호를 쓰며 불교로 기울어졌다. 이에, 문학에 대한 충동도 번뇌로 보여서 참회하는 입장에서 ‘광언기어()’의 문집인 《유백창화집()》 5권, 《백씨문집()》 60권을, 다시 65권, 67권을 834∼839년에 걸쳐 마음의 증표로서 연고 있는 사찰에 봉납하였다. 842년 71세 때 형부상서()의 대우로 퇴직하였는데, 《백씨문집》은 70권에 이르렀다. 그 뒤로도 ‘광영()’은 계속되었고 정부의 불교탄압정책을 풍자하는 작품을 통해서 자기 시대의 종말을 예감하고 인생의 마무리로서 75권의 전집을 편정(), 그것이 완성된 이듬해 그 생애를 마쳤다. 이 밖에 시문()을 짓는 편의를 위해서 고사성어를 모은 《백씨육첩사류집()》 30권도 있다.

그 긴 생애 동안에 그의 문학은 자주 변모하였다. 즉, 젊은 날의 낭만주의적인 경향은 지적인 빛을 띠며 이상주의적 입장으로 옮겨갔고, 문학의 존재의의를 주장하며 정치와 사회를 비판하다가 이윽고 정치나 사회 가운데서 개인을 발견하여 자기의 내면을 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다시 개인에 비추어 널리 인간의 생활 자세를 추구하여 인생의 지혜를 표상하는 문학을 지향하기도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정형()의 한계적 조건하에서 언어의 온갖 기능을 다 구사하는 ‘창화()’라는 새로운 형태의 창조에 힘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항상 그 속에 일관하고 있던 것은, 문학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며 생활의식이나 생활감정이 뒷밤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각이었다. 따라서 제재는 경험적이고 언어는 일상성을 띠며, 발상은 심리의 자연에 따르고, 구성은 논리의 필연에 따르며, 주제는 보편적이어서 ‘유려평이()’한 문학의 폭을 넓혀 당() 일대()를 통하여 두드러진 개성을 형성하였다.

그의 생존시에 이미 그의 시는 민중 속에 파고들어, 소치는 아이나 말몰이꾼들의 입에까지 오르내리고, 배나 절의 기둥이나 벽에 써붙여지기도 하였으며, 멀리 외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시는 한국에도 일찍부터 전해져 널리 애송되었다. 현재 전하는 것은 《백씨장경집》 75권 가운데 71권이 있고, 《백향산시집》 40권도 있다. 현존하는 작품수는 3,800여 수이고, 그 중에서 《비파행》 《장한가》 《유오진사시()》는 불멸의 걸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