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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영의 파리에서 만난 사람] 아르스날-소나무회 전 회장 정재규

눌재상주사랑 2009. 1. 28. 10:30

[박미영의 파리에서 만난 사람] 아르스날-소나무회 전 회장 정재규
 
 
 
▲ 이씨-레- 물리노의 작업실에서 자신의 예술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정재규 작가.
 
▲ 도시철도 교각 아래에 설치된 아틀리에.
12호선 지하철을 타고 몽마르트르에 왔다. 아베스 역 출구를 벗어나 첫 대면한 몽마르트르의 하늘은 파랬다. 구절양장(九折羊腸), 사방으로 트인 몽마르트르의 구불구불한 길엔 오래된 돌들이 자잘하게 깔려 있었다. 노상 카페 옆 나지막한 나무에 기대 거리의 악사가 바이올린 연주를 하고 있었고, 그의 발밑에 놓인 동전 몇 닢이 든 모자의 깃을 펄럭이며 바람이 불어왔다. 낙엽이 이리저리 뒹구는 몽마르트르의 눈부시게 화사한 가을날이었다.

좁은 길을 건너 네 개의 대리석 원기둥이 고대 로마시대의 신전 유적이라는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생 피에르 교회로 들어가자, 집시 소녀일까. 눈이 새까만 소녀가 다가와 내게 구걸했다. 1유로를 손에 쥐어주자 소녀는 르느와르의 ‘서커스 소녀’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 곁을 스쳐 떠나갔다. 르느와르의 언덕길에 불던 바람의 현현(顯現)을 내가 소녀로 착각한 듯 몽롱했다. 사실 나는 몽마르트르에 르느와르와 드가, 세잔 그리고 피카소의 아틀리에가 있었다는 ‘세탁선’을 찾아 온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날 나는 몽롱하게 길을 헤매다 링 반데룽에 빠진 듯 그곳에 찾아가질 못했다.

내가 결국 그 곳을 찾아내지 못한 것처럼 ‘세탁선’ 이후 파리의 화가들은 더 이상 그룹을 지어 활동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기적인 카페에서의 만남도, 경쟁하듯이 압생트를 마시는 광경도 그 이후 완전히 끝장이 난 것이었다. 완강한 개인주의자가 된 그들은 이제 평론가들과 화상(畵商)들 또는 예술 옹호자들 정도만 접촉하는 은자(隱者)로 활동했다. 'isme'로 끝나는 말들, 이를테면 인상파, 야수파, 입체파, 미래파, 초현실주의파 등등은 이제 완전히 현실성이 없는 말이었다. 선언들을 발표하고, 공개토론과 어떤 기치를 위해 결집하고 행동하는 일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했다.

다음날 나는 교외선을 타고 대구 근교의 달성군에 비유될 수 있는 이씨-레- 물리노 시로 갔다. 파리 화가들 사이에서 그 유명한 아르스날(Artsenal)-소나무회의 전 회장 정재규(60)씨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는 경북고등학교,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뒤 1978년 파리로 건너와 현재까지 30년을 체류하고 있다. 이씨-레- 물리노 도시철도의 동그란 교각 아래 있는 열평(33.058m²)남짓한 그의 아틀리에 안엔 종이를 잘라 사진 위에 빈틈을 보이게 붙인 작품들로 가득했다. 마오쩌둥이나 불상 또는 경복궁의 사진 위에 인화한 사진이나 종이 자른 것을 잇대어 붙인 그 정교한 작품들은 묘한 리얼리즘을 풍기며 작가의 열정을 대변하는 듯 했다. 어떻게 이런 작업장을 찾을 수 있었으며, 아르스날 소나무회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물었다.

“1991년 8월 파리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권순철, 이영배씨가 먼저 소나무회를 만들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곽수영씨와 내가 곧 합류를 하고 그 외 한국과 외국작가들을 포함한 총 13명의 회원으로 프랑스 정부에 협회 설립 인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작업공간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그때 이씨-레- 물리노 시의 넓은 탱크정비공장이 비어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해 9월 늘어난 한국작가 25명과 미국과 프랑스, 중국, 이태리, 루마니아, 벨기에 등 각국의 화가 21명이 국가 군수위원회(국방부)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탱크와 장갑차를 만든 군수공장을 우리가 공동 아틀리에로 임차한 것이지요.”

자국민도 아니고 외국인들이 주도해 정부기관을 상대로 예술작업공간을 확보해낸 프랑스 초유의 그 일을 주도한 네 사람은 모두 대구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탱크정비공장은 넓어 작업공간으로 더할 나위 없었어요. 우리는 2개월 동안 40t의 강철판을 절단하고 용접해 목재 패널과 문을 조립, 46개의 아틀리에를 만들었어요.”

20세기 초 에펠이 설계한 군수공장은 영화감독 뤽 베송이 ‘니키타’ 촬영을 하러 올만큼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거기에 50명의 예술가가 영감을 발휘해 각각의 아틀리에를 꾸민 것이다. 모든 제반경비는 회원들이 갹출하여 충당했고, 한국의 가나화랑과 파리의 골드라인 여행사가 화재 등 사고 발생 시 각각 20만프랑씩 배상하기로 하는 보험약정서에 서명을 해주었다. 군수위원회에선 연 900유로의 임대료 이외엔 어떠한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바로 그곳에서 나의 사진 언어와 이미지에 대한 인식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그곳은 커다란 암실이며 거대한 극장이었다고도 할 수 있어요.” 대화 중간에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는 마사지다’라는 말에 빗대어 뒤샹과 앤디 워홀의 팝 아트, 그리고 니체의 리얼리즘으로 넘나들며 그가 말을 이어갔다. “탱크정비공장 작업실은 너무 큰 건물이어서 난방은 생각할 수도 없었어요. 그러나 각자의 영감이 깃든 수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2년마다 군수위원회와 재계약을 수없이 했습니다. 그것이 2002년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10년 동안 시민들과의 교류를 위해 매년 전시회는 물론이고, 콘서트, 무용공연, 패션쇼, 모든 장르를 망라한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기획하고 공연했다. 전시회의 부대행사로 바비큐 파티를 하고 밤에 방문하는 시민들을 위해 손전등과 카세트를 증여했다. 회원들의 작품을 내놓은 벼룩시장과 학술회는 매번 큰 인기를 끄는 이벤트였다. 프랑스 전역의 매스컴에선 비중 있게 아르스날-소나무회 작가들의 작업을 다루었다.

“한 사람씩 그 곳을 떠날 때마다 새로운 회원들을 선출하여 자리를 채웠습니다. 25명의 한국인들과 그 외 각기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는 외국인 회원들은 모두 100여명쯤 됩니다. 우리 모두 게토처럼 한국인만 모여 있는 것은 결코 건설적이지 못하다는 걸 공감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던 중 2002년 도로확장으로 그 공간이 헐리게 되고 작가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그때 소나무 회원 중 나를 포함한 20명만이 이씨-레- 물리노시 중심부의 도시철도 교각 아래에 새로 건축된 아틀리에로 옮겨 왔습니다. 전의 그 곳에 비하면 턱없이 좁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예산 배려나 지원도 없이 자신의 협소한 아파트에서 작업을 하는 회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끊임없이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프랑스 사진계의 새로운 조류로 평가되는 그룹 노방브레를 결성하고 여전히 작업과 더불어 이론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그는 더없이 진지했으며 열정적이었다.

“나는 세상의 광휘를 찾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바람이 휘어진 교각을 훑고 지나가자 파리 교외 이씨-레- 물리노가 가을빛에 발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약력

1949년 대구 출생

1974년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1978년 도불, 현재 프랑스 거주

◆개인전

1977년 제10회 파리 비엔날레 출품

1990년 프랑스의 제35회 살롱 드 몽루즈 참가

1996~2003년 아틀리에 소나무-아르스날에서 '바닥, 벽, 시간' 전시기획 및 그룹전 운영

2004년 제4회 포토 페스티벌(서울 가나아트),

2005년 재외작가초대전(뉴욕)

2007년 아시아현대미술제(뉴욕) 북경전(갤러리 맥향)

2008년 '아트 타이베이'(타이완), '아트 베이징 2008'(북경) 등 출품 및 초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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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01월 24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