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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曲線美感 .2부] 안동 하회탈 (1)

눌재상주사랑 2009. 2. 8. 19:09

[曲線美感 .2부] 안동 하회탈 (1)
칼끝으로 파인 비대칭의 얼굴 곡선
그 곡선 따라 사람들의 삶과 애환
시름과, 울분과, 웃음과, 익살이 뭉실뭉실 혹은 데굴데굴 묻어난다
곡선을 따라 가다 보면 어떤 리듬이 느껴진다. 살아가는 리듬이랄까. 직선은 그러나 느낄 사이도 없이 어떤 일이나 사물의 끝에 다다르기 일쑤다. 직선을 두고는 결코 부드럽다고 하질 않는다. 곡선은 웬만하면 부드럽다. 그래서 곡선은 느긋하다. 부대끼고 힘든 오늘의 세태에 곡선은 작은 위안이 될까. 한 달여를 쉰 '곡선미감' 그 2부를 시작한다.


탈도 많다. 큰 탈. 작은 탈. 가릴 여유도 없다. 세상이 마치 온통 탈 난 집구석 같다. 오죽하면 '탈 없이' '별 탈 없이'라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서 떠나질 않을까. 그런 탈. 살아 가다보면 흔히 나는 그런 탈이 아니다. 요즘 나는 그 탈들은 일부러 만들어 지는 것 같다. 일부러 탈나기를 기다린 끝에 만난 탈.


우리 주위에 어디 탈나지 않은 곳 있으면 손들라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어느 곳 하나 탈이 나지 않은 곳 없을 정도다. 입에 풀칠은 해야 되겠고. 그래서 단연 탈이 많이 난 곳은 경제다. 삶은 각박해져 가고, 돈은 더 귀해져 대접 받는다. 돈 떨어지자 입맛 나는 사람들도 훨씬 많아졌다. 돈이 말을 하면 진실이 침묵한다지만 요즘 돈은 더 말이 많아졌다.


한서(漢書)에 이미 '유전자생 무전자사(有錢子生 無錢子死)'라는 말로 돈이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는 힘을 가졌음을 일렀지만 설마 했던 사람들은 지금 시련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런 돈. 공방형(孔方兄). 엽전에 뚫린 네모진 구멍이 공방이라면 그에 형(兄)자를 붙였으니. 가히 대접받는 돈.


널리 알려진 무명씨의 시조 한 수. '떳떳 상(常) 평할 평(平) 통할 통(通) 보배 보(寶)자/ 구멍은 네모지고 사면이 둥글어서 땍대굴 굴러서 간 곳 마다 반기는 구나/ 어떻다 조그만 쇳조각을 두 창이 다투거니 나는 아니 좋왜라'. 기업이 무너지고 은행마저 휘청거리는 시대에 이렇듯 돈에 초연할 사람 몇 명이나 될까. 셀 수 없을 정도라면 세상의 탈들은 훨씬 줄어들 테지만 그럴 리 없으니 그게 탈이다.


노포(魯褒)는 '전신론(錢神論)'에서 돈은 "날개 없이 날고, 발 없이 달린다"고 했는데 그 표현을 현실에 대입해 보니 매우 자극적이다. 가난은 더 깊어지고, 부자는 더 잘 살게 된다는 공식적인 언급 같다. 세계의 부자들이 하루만에 얼마를 날려 그 순위가 바뀌었다는 실감나지 않는 이야기는 이야기라고 치자. 부자는 바뀌어도 그 순위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질 않은가. 그 순위에 들지 않는 우리들은 그럼 뭔가. 정치로 화살을 돌려 보지만 별수 없다. 치고 박고 빠지는 그 수법에 넌더리가 나지만 넉살로 답하는 정치꾼들의 야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 뿐. 한 해를 새로 시작한지 겨우 한 달을 넘긴 지금. 우리들에게는 그런 게 탈. 솔직히 큰 탈 아닌가.


하회 탈. 국보 121호. 오리나무로 만들었다. 안동 하회마을에서 연희된 그 탈의 남은 진본들은 지금 안동이 아닌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탈을 만든 허도령의 애틋한 전설이 더욱 걸작으로 태어나게 했음일까. 잃어버린 총각, 떡다리, 별채 탈을 빼더라도 소장하게 남은 양반, 선비, 중, 백정, 초랭이, 할미, 이메, 부네 각시 탈 등. 모두 엄청난 곡선으로 조각됐다. 칼끝으로 파인 비대칭의 얼굴 곡선을 따라가면 당시 사람들의 삶의 애환이, 시름이, 울분이, 웃음이, 익살이 뭉실뭉실 혹은 데굴데굴 묻어난다.


어느 탈이며 가면이 이렇게 보는 이의 마음을 헤집고 들 수 있을까. 최순우 선생은 탈의 그 웃음에 대해 "기껏해야 타령이나 굿거리 같은 속곡(俗曲)가락에 맞추어서 짚신 신고 껑청댄 놀이였던 만큼 한국 탈의 웃음에는 당초부터 권위니 아첨이니 하는 따위의 거추장스런 신경보다는 막걸리 냄새 풍기는 선량한 너털거림과 소박한 풍자만이 넘쳐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니 낙동강이 굽이돌아 흐르는 곡선의 그 하회마을에서 연희되었을 탈춤은 또 얼마나 춤사위에 넋이 빠진 돌쇠들이 막걸리 사발들을 숨차게 들이켰을까.


하회탈에서 양반탈이 짓는 웃음. 절묘한 웃음은 야릇하기까지 하다. 부드럽고 선량하다. 여유롭기도 하고 좀 허풍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경박하고 치기어리며 기괴한 모양새가 대종을 이루는 그 흔한 탈이나 가면과는 격이 다르다. 세상이 빡빡할수록 더욱 괴기스러워지는 갖가지 모양들. 하회탈들에는 전혀 그런 느낌이 없다. 능숙한 조각 솜씨며 빼어난 감각은 일류다. 세계일류. 잔신경이 전혀 가지 않는다. 이를 '가면의 순수'라면 어떨까. 가면이 순수하다니. 가면을 쓰지 않고 가면의 얼굴을 하고 있는 열불 나는 허다한 얼굴보다야 얼마나 순수한가.


칸트도 "사람은 모두 문명이 진보하면 할수록 점점 더 배우가 되어 간다. 남에 대한 존경과 호의, 정숙함과 공평무사의 가면을 쓴다"고 '인간학'에서 밝히고 있다. 우리는 과연 우리의 문명이 어디쯤 와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가. 선진국, 후진국 혹은 개발도상국. 문명에도 개발도상국이라니. 어쭙잖은 개발의 이미지가 도상국들의 심기를 괜히 건드린다. 선진국에 들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후진국에 머무르는 것도 좋으련만. 개발도상국이라는 역사의 가면적 과정에 머물라니. 허긴 선진국이나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이나 그들이 쓰는 가면의 그 '가면'이 무에 다르랴. 어느 얼굴엔들 가면을 쓰지 않은 얼굴 찾기가 쉬우랴. 모두들 사는 게 한 판 굿거리인 것을. 그렇다면 어느 얼굴엔들 탈바가지나 가면이 없으랴.


통도사 극락암에 오랫동안 주석하셨던 경봉(鏡峰)스님이 쓴 책에도 '사바세계를 무대로 멋지게 살아라'라는 제목이 보인다. 멋진 배우가 되어 보란 뜻일 게다. 멋진 탈바가지를 써보란 의미일 게다. 그래서 인생은 한 판 신나는 연극무대, 마당놀이다. 이 엄청난 무대에 그대인들 탈 없이 설 수 있을까. 없을 걸?


추로지향의 안동에서 하회탈이 나왔다는 것은 이미 관용구로 굳어 버린 '안동양반'역시 연극무대를 떠날 수 없음을 은근히 내비친 것은 아닐까. 어느 시인은 그런 안동을 "어제의 햇볕으로 오늘이 익고, 과거로부터 현재를 대접하는 곳"으로 노래했다. 공자가문의 종손 공덕성씨를 비롯해 문화인류학자 레비스르로스, 엘리자베스여왕 등 숱한 세기적 인물들이 안동 땅을 밟고 또 밟았지만 안동하회별신굿 탈놀이는 여전히 그 탈들을 쓰고 여전히 처연하게 연희되고 있다. 해학적인 조형미를 발하며, 얼굴을 탈로 가려도 실감나게 사는 이야기를 한 판 굿판으로 얼얼하게 전해주고 있다.


신동집은 그의 시 '얼굴'에서 "어제 만난 얼굴은 다시 볼 수 없습니다/ 오늘 만난 얼굴은 어제의 얼굴이 아니올시다/ 좀 더 찢어지고 부서지고 이즈러진/ 얼굴의 복수(復數)"라고 했지만 하회탈은 어제도 만났고 오늘도 만나고 내일 또 그 모습으로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얼굴들인가.


어디 매부리코의 양반 탈 뿐이랴. 항상 불만이 가득한 선비 탈. 그 불만 덩어리 속에서 용케도 현실에 융합하는 사회비판적 지식인의 한계가 예나 지금이나 전혀 다름없음이 놀랍다. 요즘 지식인들의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되레 지식이란 무얼까 하는 의뭉스러운 물음이 돋는다. 지식. 그게 탈 일 때도 많으니 말이다.


경망스럽다지만 가장 민중적이라는 초랭이. 그를 오늘의 국회에 보내버리면 싫다고 책상을 냅다 엎지를까. 화난다고 청계천으로 냅다 달릴까. 실눈의 백정 탈은 또 그 심술이 극치를 이룬다. 육우니 국산이니 한우니 하는 구분도 없는 시절의 실눈이지만 실다운 그 실눈이 오히려 심술에 앞서 그립다. 적어도 젖소만은 젖소라 우기지 않을 그 실눈. 표정이 늘 일그러졌으나 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이메. 강요된 침묵에 부자연스러운 수줍음이 오히려 부담을 주는 각시 탈. 그러나 부네는 어쩜 그리 갸름한 얼굴에 반달 같은 눈썹으로 능청이 구단인 중이며 산전수전 다 겪은 할미 탈과 어울려 춤을 추는가. 그게 바로 연극마당이요 인생의 굿마당이기 때문이리라.


인생. 루스벨트는 어느 날 파리대학 연설에서 "인생을 대하는 가장 졸렬한 태도는 인생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라고 했지만 여전히 우습게 여기는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 그 현실에서 우리가 또 인생을 우습지 않게 여기려면 또 얼마나 많은 굿판을 벌여야 할까. 그래서 산타야나는 "인생은 구경거리이거나 향연이 아니다. 역경이다"고 고집했던 것일까.


탈. 배탈이 나도 '탈'이라든 우리 가슴 속의 온갖 탈들. 그래서 탈도 많은가. 청천 하늘에 잔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수심도 많다고 했다. 실은 그 수심이 탈이 아닌가. 서슬 퍼렇던 시절에도 탈바가지 하나에 의존해 냉철한 사회비판의 눈초리를 가차 없이 휘둘렀던 그들의 이지러진 웃음과 눈물위에 오늘이 당당히 서 있다. 어저께 입춘도 지났다. 남은 것은 대길뿐인데도 왜들 저렇게 허허로울까. 이럴 때는 머잖은 정월 대보름날 밤. 탈바가지의 휘저으며 미끄러질 듯 질주하는 아름다운 탈 곡선의 그 웃음과 눈물에 맡기면 어떨까. 솔직히 그 웃음과 눈물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또 어떤 탈을 쓰고 실감나게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가. 보나마나 히죽이 힘없이 웃을 수밖에. 그 곡선으로.



/글=김채한 객원기자 namukch@hanmail.net /사진=이지용 기자 sajahu@yeongnam.com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