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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윤의 아시아 문화 기행]중국 뤄양

눌재상주사랑 2009. 3. 2. 15:12
[전명윤의 아시아 문화 기행] 중국 뤄양
漢 왕조 500년 흔적은 없었다
  • ◇민중의 신, 관우를 찾는 참배객들로 북적이는 관림.
    낙양성십리허에….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몇몇인가?

    철 지난 유행가 가사를 읊어대는 취미 따위는 결코 없지만, 창밖으로 뤄양(洛陽) 30㎞라는 입간판을 보자마자 저절로 이 구절이 입 밖을 맴돌고 있다. 뭔가 이곳은 뤄양이라는 중국식 발음이 어색하다.

    ◇한 멸망 후 북위 시절의 유물인 룽먼석굴의 부처.
    낙양. 그래 이곳만큼은 뤄양이 아닌 낙양이라 부르고 싶다. 우리네 옛 시조와 철 지난 유행가 가사에도 등장할 만큼 낙양은 얼마나 익숙하고, 또 고색창연한가. 지금은 빛바랜 유행가에 불과하지만, 아직까지 애송되는 것은 한때라도 그 노래가 세상을 휘어잡았다는 뜻일 게다. 낙양으로 들어가는 초입부터 도시는 누렇게 빛이 바래 있었다. 한때 천하를 호령했던 제국의 옛 수도는 이제 그저 그런 중급 규모의 공업도시로 전락해 간간이 찾아오는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너무 많은 기대를 한 걸까. 낙양의 첫인상은 그랬다. 너무 평범해서 언급할 말을 찾기 위해 깊이 생각해야 할 정도로. 중국인들이 말하는 그네 민족의 최전성기인 한당성세(漢唐盛世) 중 한나라 때 낙양은 제국의 수도였다. 이 시기 한 무제의 침입으로 고조선이 멸망했다. 또 서역이 개척돼 실크로드가 뚫렸으며, 그 길을 따라 불교가 들어왔다.

    영광은 그 빛이 화려한 만큼 동전의 양면과 같이 비극적 몰락을 수반한다. 화려했던 제국의 수도는 제국이 막바지로 치닫던 189년 전란에 휩싸이며, 제국이 쌓아온 모든 부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한 제국의 멸망 이후에도 크고 작은 왕조가 낙양을 꽤나 좋아했는지, 낙양은 왕조의 수도로서의 명맥을 이어간다. 하지만 한 제국 시절만큼의 화려했던 영화는 돌아오지 않았다. 낙양을 여행하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부분 중 하나가 바로 낙양을 가장 빛나게 했던 한나라 시기의 유물이 드물었다는 점이다.

    중국 삼대석굴의 하나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빛나는 룽먼석굴이 낙양의 유적을 대표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는 엄연히 한나라 멸망 후인 북위 시절의 유물이다. 장한가(長恨歌)로 유명한 백거이의 옛집 또한 당나라 이후의 유적들이다.

    ◇중국 최초로 불교가 전해진 백마사.
    중국 3대 고대 소설 중 초한지와 삼국지연의 각각 한나라 성립과 멸망을 소재로 하고 있을 정도로, 한나라는 중국 그 자체로 손꼽히는 왕조 중 하나였다. 또한 중국의 주류 민족 이름을 한족이라 칭하고 있기까지 하다. 하지만 막상 제국의 수도에서 한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여행을 하면서 고도에서 어떤 비장감이나 비애를 느끼곤 한다. 모든 고도는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개중에는 폼페이처럼 극적인 곳이 있는가 하면, 인도의 파테푸르 시크리처럼 버려진 곳도 있다. 어떤 형식의 최후건, 그 존재들은 오늘날 하다못해 폐허라는 이름으로라도 남아 있다. 낙양은 한 왕조 500년의 시간을 꿀꺽 삼키기라도 한 듯 어떤 흔적도 보여주지 않았다.

    ◇얼마 전 조성된 석조기둥. 용이 새겨진 기둥 위에 권력의 상징인 정이 올라가 있다.
    철저한 단절. 다시 한 번 흘러간 유행가의 가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노래를 지은 사람은 오늘날의 낙양을 와보기라도 한 것일까. 책으로 접하던 낙양을 둘러싼 수많은 무용담들이 머릿속을 스쳐갔지만, 막상 이곳에서는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정말 동탁이 모든 걸 다 태워버렸기 때문일까.

    그때였다. 룽먼석굴에서 낙양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고 오던 길. 관림(關林)이라는 지명이 눈에 들어왔다. 수풀 림(林). 숲을 뜻하는 이 글자는 중국에서 숲 이외에 성인의 무덤을 높여 부르는 말, 더 정확히는 무덤을 뜻하는 말 중 최상급에만 쓰는 말이다. 관림은 바로 관우의 무덤이었던 것이다. 기억이 재빠르게 머릿속을 재정렬하기 시작했다. 형주 성을 지키던 관우가 육손의 계략에 말려 손권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목만 조조에게 보내진다. 조조는 나무로 관우의 몸을 만들어 성대히 제사지내준다. 그 무덤이 바로 이곳에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로 정리됐다.

    참고로 무덤에 수풀 림(林)을 사용하는 곳은 중국에도 두 곳뿐. 바로 공자의 무덤인 공림(孔林)과 낙양의 관림뿐이다. 두 림의 차이점을 굳이 따진다면, 역대 황실의 절대적인 비호를 받으며 어용화된 곳이 공림이라면, 관림은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로 수풀 림 글자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관우는 죽고 나서 신이 되었다. 민중은 그의 의기와 충절에 열광했다.

    고대 중국의 기본 덕목 중 하나인 의기와 충절에 민중은 열광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그때도 지금처럼 의리니 충절이니 하는 말이 입에서만 맴도는 단어였을 뿐이었다는 뜻이다. 민중은 언제나 위정자가 말하는 덕목에 부합하는 인물이 나타나길 기다렸는지 모른다. 얼마나 폭정에 지쳤으면 그랬을까.

    관우를 말한 것은 저잣거리의 장삼이사, 온갖 잡놈, 심지어 협객 흉내를 내는 도적들이었다. 현학적이지 않은 관우는 어쩌면, 민중의 공자였을지도 모른다. 민중은 의리와 충절의 화신이 돈도 주길 바랐던지, 어느새 관우는 재복(財福)의 신으로도 둔갑해 있었다. 붉은 얼굴에 긴 수염을 자랑하는 관우는 자신의 무덤 앞에 청룡도를 들고 화난 얼굴로 앉아 있었고, 사람들은 연신 그들의 복을 기원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무리 따져 봐도 관우와 돈이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개 무장인 그를 공자의 반열까지 올려놓은 민중의 극성맞음이 만들어놓은 직책(?)이니, 중국 밖에서 온 내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울창한 숲 사이를 거닐다 보니, 결국 이곳이 내가 찾아 헤매던 한나라의 끝자락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머릿속에 낙양이라는 도시가 다시 그려지고 있었다.

    여행작가



    >> 여행정보

    대한항공이 허난(河南)성의 성도인 정저우(鄭州)까지 매주 4회 운항한다. 정저우에서 뤄양까지는 버스가 연결된다. 1시간30분가량 소요되는데 운행편수가 많아 이용하는 데 무리가 없다. 또한 뤄양의 시내버스는 관광지와 잘 연계되어 있어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 낙양 최고의 먹을거리로 손꼽히는 것 중 첫 번째는 수이시(水度)인데, 일종의 낙양식 연회석으로 당나라 황실요리에 기초한다. 매콤한 맛의 탕이 주요리이기 때문에, 우리 입맛에 잘 맞는 편이다. 어지간한 대형 식당은 모두 수이시를 취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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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09.02.12 (목)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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