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 삼년산성
▲위 치 : 충북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산1-1
▲종 목 : 사적 제235호
▲지정일 : 1973년 5월 25일
▲시 대 : 470년(삼국시대) 건립
▲개요 : 충북 보은군 보은읍 북쪽 2km 지점의 오정산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 삼년산성은 돌로 쌓은 산성으로 신라 자비왕 13년(470)에 쌓았으며, 소지왕 8년(486)에 고쳐 세웠다.『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이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오항 산성으로,『신증동국여지승람』,『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의 둘레는 약 1,800m이고 성벽은 납작한 돌을 이용해서 한 층은 가로 쌓기를 하고, 한 층은 세로 쌓기를 하여 튼튼하며,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다.
<삼년산성 입구에 세워진 표석>
삼년산성(三年山城)은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해발 325m의 오정산 정상에 있다. 보은읍에서 속리산 방향으로 가다 보면 이정표가 보인다. 삼년산성의 정문이라고 할 수 있는 서문으로 자동차가 올라 갈 수 있는데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주차를 하고 걸어서 올라가기로 한다.
서문 입구에는 삼년산성 표석이 서 있고 산성 안으로 들어가서 성곽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마음먹는다. 전체 둘레 길이는 1680m라고 하니까 1시간이면 둘러볼 수 있으리라. 그런데 왼쪽으로 돌까 오른쪽으로 돌까. 고민은 오래가지 않는다. 왼쪽의 성곽으로 오르기 시작했는데 사람의 생체 시계가 시계방향으로 적응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 높지 않은 곳이지만 정상까지는 제법 가파른 산길을 올라간다.
<서문 성곽>
성곽 길의 가장 높은 지점까지 올라서고 보니 보은읍이 내려다보인다. 뒤가 속리산이라면 앞은 보은평야로 조망이 시원스럽다.
삼년산성은 언제부터 쌓기 시작했던 것일까? 삼국사기에는 자비마립간 13년(470)에 신라가 3년에 걸쳐 산성 하나를 쌓았는데 그 뒤 소지마립간 8년(486) 일선(一善)에서 장정 3천 명을 동원해 성을 개축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공사가 3년에 걸쳐 진행되었으므로 삼년산성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리고 내용 중에 일선이라는 곳은 지금의 경상북도 선산을 일컫는다. 즉 삼년산성을 쌓기 위하여 부근의 인력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신라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쌓았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5세기는 고구려의 전성기로 서기 427년에 고구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를 하고 남진정책을 추진하자 그에 맞서 신라와 백제는 433년에 나제동맹을 맺어 고구려를 견제했는데 힘이 부쳤는지 결국 백제는 475년 웅진으로 천도를 하기에 이른다. 신라가 삼년산성을 개축한 것은 486년이니까 당시 충청북도 보은 부근은 신라의 힘이 미치지 못했으므로 선산 지방에서 자국의 인력을 동원한 것이다.
<산성길>
그런데 신라가 국경지역에 해당되는 보은 지역에 산성을 쌓은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부터 먼저 알아보아야 한다. 4세기에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도와 왜를 물리쳤는데 그 이후 고구려의 지휘관이 신라의 관리로 임명될 정도로 신라는 고구려에 복속된 상태였다. 당시 고구려는 신라 내물왕의 아들을 인질로 잡고 본격적인 내정간섭을 했는데 눌지마립간 34년(450)에 실직성 사건이 일어난다. 신라인이 고구려군의 장수를 살해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고구려와 대립관계에 서게 된 신라는 백제와 더욱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러한 군사적 협력관계는 진흥왕대까지 100여 년 동안 이어진다.
보은은 당시 삼국의 세력관계가 교차하는 지점이었다. 백제와 고구려는 이 일대에서 밀고 밀리는 싸움을 벌였다. 경주에 기반을 둔 신라도 한반도의 중심부인 한강유역까지 진출하는 데는 보은이 중요한 거점이었다. 그 전진기지로 보은에 산성을 축조한 것은 고구려의 공격에 대항하며 장차 예상되는 백제와의 대립에서 백제를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전략적 지점으로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북문일대>
보은평야를 조망하는 능선에서 시계방향으로 돌아간다. 잠시 후에 내림 길로 접어들더니 제법 높은 성곽의 형태가 드러나는 지점에 이른다. 많은 세월을 비바람에 시달렸음에도 넓은 판 모양의 돌로 촘촘하게 쌓은 산성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신라에게는 중요한 지점의 산성이었으므로 고심하여 쌓은 흔적이 곳곳에 나타난다. 삼년산성의 서문은 지금은 찻길이 뚫려 있지만 계곡 바로 위에 위치하여 예전에는 산비탈을 따라 오르는 숲속의 작은 오솔길뿐이었다고 한다. 또 성벽에 바짝 붙은 좁다란 길은 한꺼번에 많은 군사가 진입할 수 없도록 만들었으며 서문 앞의 허물어진 돌더미로 보아 그것은 옹성의 흔적인데 옹성은 적군이 성문으로 들어오기 위해 높은 성벽을 기어오르면 다시 성문이 가로막는 구조다.
또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바구니처럼 생긴 고로봉에 쌓은 것을 가장 우수한 성으로 평가하는데 삼년산성이 바로 그러하다. 가운데가 오목한 바구니 모양의 지형에다 봉우리들이 죽 둘러 있고 그 능선을 따라 성벽이 축조되어 있다. 산의 능선을 타고 축조되었기 때문에 성 밖의 자연적인 경사면을 이용해 훨씬 높은 성벽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성벽의 돌들은 일일이 손으로 다듬은 판석형 석재다. 이런 돌이 대략 1천만 개 이상 소요되었는데 이것은 8톤 트럭 2만 5천 대분의 분량에 해당한다. 대 역사에 소요된 이 많은 돌들을 어디서 가져왔을까. 성이 위치한 산의 기반암이 바로 이런 돌들이다. 이 돌을 그냥 차곡차곡 쌓아올린 것이 아니라 우물 정(井)자 형태로 가로 세로 엇물려 쌓았다. 성벽이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산성의 축조 방식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특징은 외벽과 내벽 사이를 흙이 아닌 돌로 채웠다는 점이다. 그래서 성벽 전체가 거대한 하나의 그물처럼 얽혀 있다. 이처럼 당대 최고의 기술을 동원하여 견고하게 지은 산성이었다.
<산성내의 사찰>
<산성길을 따라>
산성 길을 따라 걷다가 서문으로 내려간다. 산성 안은 터가 제법 넓다. 산성의 내부에는 논밭은 물론 연못의 흔적까지 남아 있다. 연못가 바위벽에는 신라 최고의 서예가 김생의 글씨로 전하는 ‘아미지(蛾眉池)’가 새겨져 있는데 이 연못의 이름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성 안에 마르지 않는 5~6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전한다. 논밭과 연못, 우물까지 있었다는 것은 식량과 물의 자급체계가 갖춰졌음을 의미한다.
삼년산성을 축조하고 100년이 지난 후 삼국은 치열한 대립에 들어서게 된다. 신라는 진흥왕대에 백제의 영토였던 한강 동북지방을 공격하여 신주를 설치하고 김유신의 할아버지였던 김무력을 군주로 삼자 백제와 신라의 동맹은 끝이 나고 만다. 그리하여 진흥왕 15년(554)에 동맹을 깨뜨린 신라에 분노한 백제의 성왕은 3만 대군을 보내 관산성(지금의 옥천)을 공격한다. 이 때 신라에서는 삼년산성 출신의 장수 도도가 투입되어 백제와 대항하는데 백제 성왕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관산성 부근에서 백제군을 기습하여 성왕을 죽이는 전과를 올림으로써 전세는 역전되고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은 본격화되었다.
<연못>
<삼년산성 내의 넓은 터>
삼년산성이 축조하고 200년이 지나자 신라는 이제 한강 이북까지 그 영토를 확장하며 통일을 향한 마지막 전투를 준비한다.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라는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아 백제 사비성을 향해 진군하여 계백이 이끄는 백제의 최후 결사대와 만나 황산벌에서 처절했던 전투를 승리함으로써 백제를 멸망시킨다.
나라를 세운 지 300년이 넘도록 경주의 영남 지역권을 벗어나지 못하던 신라는 삼년산성이 축조된 470년경에는 고구려나 백제보다 군사력, 경제력 등 사회 전반에 걸쳐 100년 이상 뒤져 있었다고 평가되었다. 그렇게 미약하던 신라가 모든 국력을 동원하여 쌓은 것이 바로 삼년산성이다. 한반도의 중심부인 한강으로 가는 길목에 배후기지를 마련하고 백제와의 접경지역에 든든한 요새를 구축하여 전진기지로 활용한다는 전략으로 통일전쟁의 교두보를 확보했던 것이다.
<서문으로 돌아 나온다>
삼년산성을 왼쪽으로 올라가서 시계방향으로 돌다가 반 바퀴를 돌고 서문으로 내려오고 말았다. 나머지 반 바퀴는 혹시 다음에 답사를 하게 되면 둘러보려고 남게 놓은 것은 아닌데 아무리 역사의 현장이라고 해도 지금은 침묵의 소리만 들려올 뿐이므로 마음속에 적극적으로 와 닿는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KBS의 역사스페셜에 ‘삼년산성’이 방영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보게 되었다. 2000년 8월 19일에 방영이 되었던 것을 다시보기를 통하여 천천히 음미하며 보게 되었는데 삼년산성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을 자세한 내용으로 보고 나니 삼년산성의 중요성이 답사한 경험과 함께 와 닿는 것이다. 모름지기 역사는 깊이 있게 공부를 해야 의미가 온몸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2009.1.15>
이글은 파란 블로거 "산이 좋아 산으로 간다"에서 옮겨온 글임을 밝힘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