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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의 길 위에서 만난 쉼표] 독일 뤼베크길목마다 고풍스러운 중세 고딕

눌재 2010. 4. 16. 15:35
[정영의 길 위에서 만난 쉼표] 독일 뤼베크
길목마다 고풍스러운 중세 고딕 첨탑
  • 봄볕이 목덜미를 휘감기 시작하는 무렵, 뤼베크는 금세 연둣빛을 뒤집어쓰고 겨우내 와인 저장고에 숨겨두었던 와인 한 병을 꺼내든다. 그러고는 내 눈가에 햇살 한 줌을, 입술에 와인 한 방울을, 심장엔 낯선 사랑을 떨어뜨린다. 트라베 강에 배를 띄우고 누워 배가 어디로 흘러가는 줄도 모르고 달콤한 사랑의 말들을 속삭이는데, 눈을 뜨니 마르크트 광장. 노천카페에 앉아 일광욕을 즐기다가 스르르 낮잠에 빠져들었던 것. 이토록 달콤한 낮잠이라면 이대로 영원히 잠들어도 좋겠다 싶고, 이런 낮잠을 불러오는 도시라면 이곳에서 불같은 사랑을 만나도 좋겠다 싶고, 마르크트 광장에 오래도록 앉아 그런 사랑을 기다리고 싶어진다. 이 봄이 다 가고 청춘이 다 간데도….

    ◇뤼베크의 옛 시가지에서 가장 붐비는 시청사 거리. 시장과 가게와 식당들이 모여 있다.
    함부르크에서 키엘 쪽으로 가다보면 나오는 독일 북부의 항구 도시, 한자동맹의 중심지였던 뤼베크. 구시가지 자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그곳에 가면 중세의 건물을 많이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중앙역사에서 나와 작은 다리를 하나 건너자 구시가지로 들어서는 홀슈텐 문이 보인다. 도시를 드나들던 네 개의 성문 중 하나인 이 홀슈텐 문은 50마르크 지폐의 도안이기도 하다. 이 문은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데다가 크고 높게 솟은 원뿔 모양의 지붕은 매끈한 검정 타일로 덮여 있어 마치 동화 속으로 들어가는 듯하다. 문에는 ‘안으로는 화합, 밖으로는 평화’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어 정말 그 안으로 들어가면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만 같다. 장크트(성) 페트리 대성당 옆 골목에 있는 인형 박물관의 인형들이 살아갈 것만 같은 곳이다.

    뤼베크를 둥글게 감싸고 있는 것은 발트해로 흘러가는 트라베강. 강변에는 대저택이 늘어서 있고 나무들은 초록을 있는 힘껏 내뿜고 사람들은 강변에서 일광욕을 즐긴다. 광장의 시장에서 장을 보고 노천카페에 앉아 와인이나 차를 마시며 오후를 보낸다. 그리고 그들의 배경엔 늘 높게 솟은 교회의 첨탑이 있다. 작은 도시 안에 오래된 교회를 비롯해 한자동맹 시절의 유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어느 길에서든 그 흔적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장크트 페트리 대성당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대성당, 오르간으로 유명한 야코프 성당, 고딕 양식의 최고는 마리엔 교회. 그리고 배가 흘러 다니는 트라베 강의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그중 마리엔 교회에선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인해 바닥에 떨어져 부서진 채 남아 있는 큰 종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교회 마당에 잠시 쉬어 가려고 앉았을 때 만난 것은 머리엔 뿔이 달리고 꼬리가 있고 한쪽 발이 발굽이지만 귀여운 청동으로 만들어진 악마가 돌 위에 앉아 햇살을 받고 있었는데, 이 악마에겐 사연이 있다.

    ◇뤼베크의 옛 시가로 들어가는 문인 홀슈텐 문은 50마르크 지폐에도 등장한다.
    마리엔 교회를 짓기 위해 일꾼들이 돌을 쌓고 있는데 악마가 나타나 와인 바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일을 도왔다. 악마의 도움 때문인지 교회는 높이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악마는 이 건물이 와인 바가 아니라 교회라는 것을 알게 되어 화가 나서 부숴버리려고 했다. 그때 한 일꾼이 악마에게 말했다. 벌써 이렇게나 많이 지었으니 부수지 말라고, 그 대신 너를 위해 근처에 와인 바를 만들어주겠다고. 그러자 악마는 부수려던 마음을 접었고 일꾼들은 마리엔 교회 맞은편에 와인 저장고를 만들어줬다.

    어쨌든 간에 악마는 교회를 짓는 데 도움을 준 것이 되었고 그 덕에 와인 바를 갖게 되었으니 사람들도 악마도 행복해진 것이다. 그러니 이 천진한 표정의 악마는 달콤한 악마이리라.

    뤼베크에서 꼭 먹어봐야 할 음식이 있다면 아몬드 가루와 설탕을 버무려 만든 다디단 마치판. 과자나 초콜릿 속에 넣기도 하고 음료에도 넣고 마치판으로만 모양을 낸 과자를 만들기도 한다. 뤼베크엔 그 마치판을 파는 유명한 가게가 있어 사람들로 늘 북적인다. 그 가게에서 파티시에로 일하는 바바라를 만났다. 그녀는 줄을 선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마치판으로 동물 모양의 과자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나눠 주고 있었다. 아이들은 생쥐모양과 물고기 모양과 오리 모양의 과자를 받아들고는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렇게 흥분하고 좋아하는 것은 아이들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에게서 마치판 과자를 선물 받고 싶은 것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장크트 페트리 성당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뤼베크의 한가로운 봄 풍경.
    그녀는 어려서부터 파티시에가 꿈이었다고 했다. 그 이유는, 우울한 사람도 달콤한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사람들은 대부분 예쁘고 달콤한 디저트 앞에서 흥분하며 행복해하기 때문이란다. 어릴 때, 사람들이 남녀노소 상관없이 디저트 앞에서 흥분하는 걸 보고나서부터는 파티시에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꿈을 이룬 것이다. 아직은 이십대라서 앞으로 올라가야 할 계단이 더 많지만 그녀의 과자는 지금도 충분히 사람들을 흥분하게 만드니까 말이다. 세상에 이렇게 한 마디 말도 요구도 없이 사람들의 입을 저절로 벌어지게 만드는 게 또 있을까. 나는 그녀에게 괜한 걸 물었다.

    “이 직업이 좋아요?”

    그러자 그녀는 단숨에 대답했다.

    “이보다 더 달콤한 직업이 있나요?”

    그녀의 대답에 나는 영혼까지 달달해지는 것만 같았다. 씁쓸했던 하루가 그녀의 말 한마디로 달콤해지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늘 일에 부대끼며 짜증을 내고 있던 내가 미련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오래도록 잊고 있던 사실을 일깨워준 것이다. 나는 마치판을 입안 가득 넣고 뤼베크의 거리를 걸으며 생각했다.

    ‘내 직업만큼 나를 달콤하게 만드는 게 또 있을까.’

    그러니 올봄엔 연인에게 초콜릿이나 사탕 대신, 달콤한 말 한마디 한다면 어떨까.

    ‘너 만큼 나를 달콤하게 만드는 게 또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뤼베크의 거리를 걷는 동안 나는 마치 방금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시인·여행작가

    >> 가 볼만한 곳

    ■마치판 가게 ‘니더에거’

    초콜릿을 비롯한 ‘니더에거’ 제품은 독일의 작은 마트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곳의 과자와 초콜릿을 사기 위해 여행자들이 뤼베크에 들러 가기도 할 정도. 시청길에 있는 큰 건물 전체가 ‘니더에거’라서 찾기도 쉽다.

    ■귄터 그라스 하우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귄터 그라스 생애를 다 들여다볼 수 있는 곳. 소설 ‘양철북’, ‘넙치’ 등으로 유명한 그는 뤼베크 인근 도시인 벨렌도르프에 살면서 많은 화제작을 써왔다. 이곳은 귄터 그라스의 책을 읽으며 오후를 찬찬히 보내기에 좋다.

기사입력 2010.03.04 (목) 17:08, 최종수정 2010.03.05 (금)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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