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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의 길 위에서 만난 쉼표] 스위스 루체른<세계일보>알프스 산맥·거대한
눌재상주사랑
2010. 6. 19. 02:40
[정영의 길 위에서 만난 쉼표] 스위스 루체른<세계일보>
알프스 산맥·거대한 호수 어우러진 중세도시
관련이슈 : 정영의 길 위에서 만난 쉼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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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한가운데로 흐르는 로이스 강가에 앉아 일기를 쓴다. 살아있음에 가장 감사하게 될 땐,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 속에 머물고 있을 때일 것이라고. 그래서 슬며시 고개 들어 루체른을 둘러싼 눈 쌓인 알프스를 바라보면 누구라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 지구상에서 내 피로한 몸을 가벼이 누일 수 있고 쥐었던 주먹이 나도 모르게 스르르 펴지는 도시, 루체른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하고. 그러니 문득 얼마나 아름답게 여겨지는지…. 그 풍경 속에서 일기를 쓰고 있는 내 모습 자체가 말이다. 루체른은 지친 영혼을 보듬어주는 도시임에 분명하다.
◇루체른의 로이스 강에 있는 카펠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적인 목조다리인데 현재는 연인들과 예술가들의 사랑과 낭만이 숨 쉰다.
스위스 중부의 자그마한 중세 도시 루체른. 그러나 이 도시에 대해 말하자면 아름답고 거대한 호수와 산에 깃든 온화한 도시라고 하는 게 더 좋겠다. 호수라고 하기엔 너무도 넓어 바다처럼 보이는 루체른 호수(공식 이름은 피어발트슈테터 호수)와 새하얀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알프스 필라투스, 리기, 티틀리스가 이 도시를 감싸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유람선이나 요트를 타고 호수로 나가 호수와 어우러지는 알프스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 도시를 찾아온 것 자체가 고마워진다. 탁해졌던 눈이 깨끗이 닦이면서 온몸과 마음조차 깨끗해지니까.
루체른에 들어서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로이스 강의 남북을 잇는 카펠교. 1333년에 지어진 이 다리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다리로 길이가 200m에 이른다. 화재로 인해 손실된 부분이 재건축되긴 했지만 역사를 그대로 품고 있다. 지붕의 들보에는 도시의 역사와 수호성인을 그려 넣은 112점의 판화가 있고 다리 중간에는 과거에 루체른을 지키는 요새이자 보물과 물품보관소였던 팔각형의 급수탑인 바서투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이 카펠교는 사랑과 낭만의 다리가 되었다. 지붕이 있어서인지 난간에 기대어 키스를 나누는 연인들이 유난히 자주 보이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이들이나 퍼포먼스를 하는 예술가들이 자주 보이기 때문이다.
◇로이스 강변에 앉아 누리는 오후는 호젓하고 여유롭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 좋은 오후가 이곳에 있다.
강을 따라 거슬러 오르면 슈프로이어 다리가 보인다. 카펠교에 비해 작지만 이 다리 또한 지붕이 있는 목조다리로 지붕의 들보엔 죽음의 신을 상징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유한한 생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지만 조금쯤 섬뜩하기도 하다.
강 오른쪽에 있는 구시가지로 들어선다. 17세기에 지어진 르네상스 양식의 옛 시청 청사,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호프 교회의 고즈넉한 정원을 지나며 중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골목을 느릿느릿 누빈다. 자그마한 도시라 시간에 쫓길 일도 누군가 재촉하는 일도 없으니, 호젓한 뒷골목을 걸으며 중세로 들어선 듯한 상상을 하다 보면 정말 중세의 루체른으로 여행을 떠나온 것만 같아진다. 영화 속에서나 봤던 멀고 먼 시간과 아무도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도시에 혼자 뚝 떨어진 것만 같다. 그러니 이 도시의 뒷골목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걸음을 이어 무제크 성벽으로 간다. 방어를 위해 지어진 성벽이라는데 현재는 900m의 성벽과 9개의 탑만 남아 있어 그다지 볼 게 없다며 사람들이 찾지 않아서인지 그야말로 고즈넉하다. 성벽을 따라 루체른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산책을 하다 보면 알 것 같아진다. 왜 스위스가 지방자치와 직접민주주의에서 세계 1위인지를 말이다.
필라투스의 바람이 주는 선물
누군가는 스위스를 지구와 천국의 중간쯤이라고 했던가. 유람선을 타고 호수로 나가보면 그 말이 진짜라는 생각이 들고 알프스에 올라서 보면 그 말이 사실이라고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게 된다.
◇필라투스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루체른의 모습은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닦아놓는다.
정상에 올라서 주변부를 다 둘러볼 수 있는 로프웨이를 따라 트레킹 하다 보면 주변의 모든 풍경을 내려다 볼 수 있는데 이곳에선 할 말을 잊는다. 더는 아름답다고도 환상적이라고도 못 하겠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오래도록 말없이 풍경만 바라본다. 그저 그럴 수밖에 없고 그래서 좋다.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바람을 만난 것만 같아 그 바람 속에서 나는 오래도록 마음과 정신의 풍욕을 한다. 이대로 맑게 남은 나날들을 살아야지 한다.
저녁 무렵, 로이스 강가의 카페에 앉아 일기장에 적는다. 마음이 조급해지거나 걸음이 빨라지거나 머리와 가슴이 더럽혀져 미칠 것 같은 날엔 눈을 감고 루체른의 바람과 그 바람이 주었던 마법과도 같은 순간을 가만가만 더듬어 볼 것이라고.
날이 저물고 카펠교에 불빛이 하나 둘 밝혀지고 그 불빛이 물 위에 비치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때 슬쩍 뒷덜미로 바람이 지나간다. 채 풀리지 않았던 마음 한 줌이 스르르 문을 열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 좋은 루체른으로 깊숙이 빠져든다. 루체른은 그런 곳이다. 동공이 열리고 머리가 열리고 온몸이 열리고 결국 온 마음이 열리는 곳. 그러다 바람이 슬쩍 치고 지나가면 나 자신이 필라투스의 바람처럼 맑고 가벼워지는 이상 현상을 경험하게 되는 곳.
시인·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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