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문화 기행] (4) 루브르 박물관의 재발견‥루브르를 폐허로
[해외문화 기행] (4) 루브르 박물관의 재발견‥루브르를 폐허로 만든 남자 로베르… 그의 기묘한 상상력이 피라미드에까지…
판니니의 기발한 착상은 동시대 사람들을 열광하게 했다. '카프리치오(Capriccio · 기발한 상상화)'로 불리는 새로운 장르는 이렇게 탄생했다. 이 시기에 카프리치오가 유행한 것은 당대에 이뤄진 폼페이와 헤라클레눔 같은 고대 도시의 발굴,여행을 통한 그리스 문명의 재발견 덕분이다. 카프리치오는 기벽을 추구하는 로베르의 기질에 딱 맞는 것이었다. 로베르는 귀국 후 파리와 남프랑스의 풍경에 그리스 로마의 폐허를 결합한 기발한 이미지 제작에 몰두하는데,이것이 엘리트 귀족들의 열렬한 반응을 얻게 된다. 그리스 · 로마 문화에 대한 동경심을 충족시키는 데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었던 것이다. 이후 그는 왕실 미술품 관리의 책임을 떠맡게 되는 등 출세 가도를 달리지만 프랑스 대혁명 후 왕당파로 몰려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그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혁명정권에 의해 사형을 언도받았는데 정작 단두대에 오른 것은 같은 이름의 다른 사람이었다. 형리들의 실수로 목숨을 건진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수립된 혁명정부는 1793년 왕실이 보유한 미술품을 모두 수용하고 이를 바탕으로 루브르궁의 그랜드 갤러리에 대중 박물관을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 루브르 박물관의 효시다. 로베스피에르 실각 후 로베르는 루브르 박물관의 운영을 책임질 5인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됨과 함께 루브르 최초의 큐레이터가 된다. 이렇게 해서 로베르는 지금은 이탈리아 회화가 전시돼 있는 그랜드 갤러리의 리노베이션을 맡게 되고,그 디자인 구상 과정에서 기발한 상상을 동원한 작품을 탄생시킨다. '폐허의 루브르 대회랑,그 상상적 풍경'은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면 정교한 선 투시법으로 묘사된 루브르의 대회랑이 눈길을 끈다. 회랑에 늘어선 열주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1000년도 안 된 루브르궁의 공간이 마치 2000년 이상 된 그리스의 고전기 신전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회랑 앞 오른쪽에는 왼팔을 뒤로 젖힌 누드의 조각상이 서 있고,왼쪽에는 그 유명한 '벨베데레의 아폴로 상'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회랑의 한가운데서는 마침 한 화가가 아폴로상을 스케치하고 있다. 한때 그리스인의 숭배 대상으로 그들의 삶을 지배했던 아폴로 신은 이제 예술품으로 전락해 한낱 화가의 심미안을 충족시킬 따름이다. 아폴로의 우아한 제스처는 과거의 영화를 보여주지만 한편으론 인간 문명의 한시성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로베르가 루브르 박물관의 폐허 이미지를 상상한 데는 고대의 지혜를 당대 현실에 접목하려는 또 다른 의도가 내포돼 있었다. 리노베이션을 담당했던 건축가들은 로베르의 충고를 따라 자연 채광을 중시한 고대 건축의 원리를 적용했다. 그랜드 갤러리 천장에 장방형의 유리창을 만들어 자연광이 전시 공간에 쏟아지게끔 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루브르의 그랜드 갤러리에서 산뜻한 자연광의 애무를 받으며 마치 야외를 산책하는 듯한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다. 더욱이 로베르의 기발한 상상력과 고대 문화의 현대적 계승정신은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아이 엠 페이가 설계한 유리 피라미드를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방문객들은 루브르궁 안마당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이집트 문화의 유산을 통해 박물관에 들어서면서 기묘한 상상의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 '폐허의 사나이' 로베르가 우리에게 안겨준 유쾌한 선물인 것이다. 정석범 <미술사학 박사>
입력: 2010-06-04 17:30 / 수정: 2010-06-05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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