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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 월리엄 블레이크와 그의 예술적 유산'展

눌재상주사랑 2008. 12. 17. 11:34

[즐감 컬처 라이프] '윌리엄 블레이크와 그의 예술적 유산'展
 예술을 통한 구원과 자유롭고 창조적인 에너지의 만남
 신비한 상징과 은유로 가득한 詩와 회화의 통합
 대량복제 시대에 무한한 상상력의 가치 일깨워
윌리엄 블레이크 작 '태고의 날들'
윌리엄 블레이크 작 '태고의 날들'
한 알의 모래알에서 세계를

그리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기 위하여

너의 손바닥에 무한을

그리고 한 시간에 영원을 간직하라.

(순수의 전조, 윌리엄 블레이크)


기자가 고등학생 시절까지만 해도 학생들 사이에는 예쁘게 장정이 된 시집을 선물로 주고받는 일이 흔했다. 아직 간간이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로 시작되는 푸슈킨의 시구(詩句)를 볼 수 있던 시절인데 그때 '오! 장미 너 병들었구나'로 시작해 '진홍빛 환희'니 '은밀하고 어둔 사랑' 등등 금기시되던 시어가 주는 묘한 느낌으로 은근히 눈길을 끌던 시인이 바로 윌리엄 블레이크였다. 그 윌리엄 블레이크가 화가, 그냥 평범한 화가가 아니라 시작(詩作)만큼이나 놀랍고 신비적인 상징으로 가득한 그림을 그린 화가라는 것을 안 것은 한참 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통해서였다.

# 반체제적 행동주의자 그리고 신비한 예언가

영국의 위대한 낭만주의 시인의 한 사람이면서 화가이자 판화가였던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이 우리나라를 찾았다. 서울대미술관이 영국 맨체스터대학과의 교류전으로 개최하는 이번 전시에는 블레이크와 함께 생전에 그와 교류했던 화가들, 그리고 그의 정신을 이어받은 현대 화가들의 작품이 같이 선을 보인다.

살아 생전 그는 때로 미치광이, 기인으로 취급받았다. 오직 극소수가 그를 지지하고 인정했고 그가 굶어죽는 걸 면하게 해주었으며, 자기 시에,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시에 일러스트를 넣기 위한 에칭작업이 그의 생계수단이었다고 곰브리치는 말하고 있다.

신비주의적이고 복잡한 상징으로 가득한 그림, 원근법은 무시되고 뭔가 서투른 듯한 그의 그림은 전통적인 회화의 규범에 익숙했던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블레이크는 1757년 11월 런던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그림에 흥미를 보여 가족들은 열살 때 그를 파스 드로잉 학교에 보냈고 나중에 로얄 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졸업 후에 그는 판화가로 활동하면서 자신이 고안한 채색인쇄를 이용해 삽화를 넣은 시집을 출판했다. 그는 자신의 시집 외에 밀턴, 그레이 등의 시집과 구약성서 '욥기'를 위한 삽화를 통해 자신의 천재성을 발휘했다. 말년에 그는 단테의 '신곡'에 심취해 미완성의 수채화를 남겼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신비한 상징으로 가득한 형태와 언뜻 보아 조악해 보이는 소박하고 거친 필선이다. 좌우대칭의 구도와 정면성, '사각형 속의 원형' 또한 그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 구성이다. 이것은 그가 미술이 고전적 소양을 갖춘 소수 엘리트만이 아니라 텍스트와 상관없이 보는 이 누구나 즉각적으로 감동을 받고 예술을 통해 구원을 이루는 길을 발견하기를 희망한 결과이다. 그는 단축적이거나 상징적인 아이콘을 통해 아카데믹한 원근법이 아니라 무한한 상상력을 표현하고자 했다.

# 미술의 상상력과 열린 가능성을 추구한 작품세계

이번 전시의 대표작인 '태고의 날들 The Days of Ancient'(1794)을 살펴보자. 수염과 백발을 옆으로 휘날리고 있는 노인이 검은 구름 사이로 드라마틱하게 퍼져나오는 태양빛 앞에서 어두컴컴한 아래쪽을 향해 몸을 숙여 컴퍼스로 우주의 심연을 재고 있다.

블레이크가 그린 것은 심연 앞에서 컴퍼스를 세우고 있는 하느님의 환상이다. 이 장엄한 모습의 노인 몸에서 드러나는 완벽한 근육묘사와 모델링은 미켈란젤로의 '천지 창조'에 나오는 하느님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중요한 인간적 가치가 상실되어 가고 있는 시대에 쇄신과 충격을 가하려는 절박한 꿈을 꾸었던 블레이크는 그 누구보다 신앙심이 깊었다. 그가 가장 존경한 것은 바로 성서와 시인 밀턴이었다.

그가 밀턴의 송시인 '그리스도 탄생일
윌리엄 블레이크 작 '아폴로 사원'2
윌리엄 블레이크 작 '아폴로 사원'
아침에 on the Morning of Christ's Nativity'(1809)를 위해 제작한 삽화 6점은 매우 평화로운 분위기를 띠고 있다. '평화의 강림 The Descent of Peace'은 성가족이 있는 고딕 양식의 마구간 위에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러 온 평화의 사자가 너무나 드라마틱하게 등을 젖힌 자세로 날개를 펼치고 있고, 아래에는 자연의 알레고리인 여인이 누워있다. 평화의 밤에서는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잠재우고 있는 모습을 요셉이 바라보고 가운데 두 명의 수호천사가 그 양옆을 따뜻하게 지키고 있다.

이런 평화로운 이미지와는 달리 '아폴로사원 The Shrine of Apollo'(1809), '성난 몰록 Sullen moloch'(1809)에서는 혼돈과 고통, 슬픔에 휩싸인 이교신과 괴물들의 이미지가 등장하고 있는데, 블레이크는 이런 평화와 혼란의 이미지를 한데 흡수, 융합하여 아름다운 조화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고도의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다. 조야한 형태와 거침없는 블레이크의 선묘는 성서에 직접 의지해 상상력으로 신성을 이해하고자 한 시도라 할 수 있다. 그에 있어 시와 그림은 억압 너머에 있는 진리를 향해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무한을 지각하고 영원을 여는 종교적인 의식이었던 것이다.

# 영원의 시각을 창조한 혁신적인 선구자

그가 영국 미술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그의 사후 40여년이 지난 19세기 후반이었다. 그에 관한 서적이 출판되고 전시회가 열리면서 가장 먼저 매료된 이들은 라파엘전파 화가들이었다. 고전의 답습과 관학적 미술에 반발해 일어난 이 화파의 작가들은 블레이크의 화면 구성법과 은유로 가득한 고딕적 세계에 매료되었다.

또 라파엘 전파와 더불어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주요 미학 운동이라 할 미술공예운동에서도 블레이크를 새롭게 평가하기 시작했다. 릴리프 에칭이라는 특수한 방법으로 텍스트와 그림을 모두 새긴 활자판을 고안하여 자신이 직접 디자인하고 문양을 만들어내고, 또 한 번에 한 쪽씩 단색을 찍어내는 방법으로 온갖 노력을 기울여 시집을 만들어낸 블레이크의 장인정신이 기계 공정으로 대량생산되는 조악한 생산품을 비판했던 바로 이들의 모토와 통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미술사의 전면에 떠오르게 된 것은 1960년대 이후이다. 그는 서구문화의 격동기였던 1960년대에 들어 반체제적 행동주의자의 표본이자 신비한 예언자로 추앙을 받기 시작했다. 또 그의 독특한 신비주의적, 초월주의적, 고딕적 경향들이 포스트모더니즘과 만나면서 더욱 두드러졌다.

2000∼2001년 테이트 브리튼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면서 그는 유럽 대륙과는 차별되는 영국 미술의 흐름을 예고했던 작가로 재평가되었다. 살았을 때 그는 세상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한 채 가난하고 쓸쓸하게 여생을 마쳤다. 그러나 이제 그는 시와 회화를 통합한 예술을 실현함으로써 근대사회가 발전이라 여겼던 분업적 전문성과 산업화에 대항하려는 노력을 진작시킨 선구자로서, 독창적인 비전과 상상력을 아로새긴 영국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번 전시에는 그가 교류했던 헨리 퓨슬리와 존 플렉스먼, 그리고 현대 작가 아니시 카푸어, 세실 콜린스 등의 작품이 나란히 걸려 오늘날까지 흐르고 있는 블레이크의 거대한 그림자를 느낄 수 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회화나 삽화, 판화가로서의 면모가 거의 소개되지 않은 한국에서 이번 전시는 미술애호가들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예술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길을 찾기를 원했고, 누구나 자유롭고 창조적인 에너지를 발휘하는 적극적인 시민이 되고 노동자가 되기를 원했던 시인이자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과 대면해 그의 무한한 열정과 인간을 인간답게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인 상상력의 극대화를 체험해 보자.

2008-12-17 07:56:27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