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독서] 훈민정음의 비밀
서용순 도서출판 이지북 대표
20081226003090
까막눈 백성을 위해 왕이 글자를 창제했다는 사실은 작가들에게 특히 영감의 원천이 되는 모양이다. 소설가이자 추계예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인 김다은씨의 ‘훈민정음의 비밀―세자빈 봉씨 살인사건’(생각의나무)은 기존 훈민정음 관련 소설들과 몇 가지 구별되는 점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우선 역사 팩션에 대한 여성 작가의 도전이다. 구효서·이인화·이정명 등 남성 작가들의 영역에서 김다은씨는 새로운 창작문법을 보여주고 있다. 남성 중심의 역사 이야기에 여성이라는 또 다른 축을 세워놓은 것이다. 소설의 부제가 암시하듯이, 당시 동성애로 인해 폐출된 세자빈 봉씨와 자선당을 중심으로 일어난 궁녀들의 은밀한 동성애 집단이 전면에 드러나 있다. 하지만 이들은 단순한 성적 욕망 배출 집단이 아니라 훈민정음으로 자신들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고 소설 속 플롯을 엮어가는 적극적인 인물들이다.
이 소설의 다른 재미는 훈민정음체에 대한 문학적 상상력의 접근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국새 ‘대한민국’에 사용되고 있는 글자체는 훈민정음체이다. 훈민정음체는 고딕보다 더 거칠고 모난 각체이다.
세종대왕이 이 거친 각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있었다. “매일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 백성들이 언제 여가가 생겨 한가하게 글을 배울 수 있겠는가. 훈민정음체는 양반들이 쓰는 모필체가 아니라 지게꾼이 지게를 지고 가다가 쉬면서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로 땅에 그을 수 있는 글자체이고, 음식을 나르던 아낙이 사금파리로 땅에 쓸 수 있는 글자체이고, 밭을 매던 소녀가 호미로도 쓸 수 있는 글자체이다. 막대기체라 해도 되고 호미체라 해도 되고 사금파리체라 해도 된다. 아예 손가락으로 허공에 그어도 되니 손가락체라고 불러도 좋다. 이것이 바로 백성의 삶과 생명을 이어주는 훈민정음체이다.” 세종대왕은 이 훈민정음체를 이용해 연쇄살인범을 찾는 묘책을 내보이기까지 한다.
계속되는 살인의 순서가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자음 순서를 따른다는 사실에도 눈길이 간다. 원래의 훈민정음은 현재 사용하고 있는 ‘ㄱ ㄴ ㄷ ㄹ ㅁ ㅂ’의 순서가 아니었다. 작가는 “훈민정음 제자해에 따르면, 애초의 한글 자음은 발성기관을 본떠서 만든 다섯 가지 기본음 ‘ㄱ, ㄴ, ㅁ, ㅅ, ㅇ’에 소리가 거세질수록 한 획씩을 더하는 순서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ㄱ→ㅋ, ㄴ→ㄷ→ㅌ, ㅁ→ㅂ→ㅍ, ㅅ→ㅈ→ㅊ, ㅇ→ㆆ→ㅎ’에다 ‘ㆁ, ㄹ, ㅿ’이 이어지는 이 최초의 순서는 1527년 최세진의 ‘훈몽자회’에서 처음 왜곡된 데 이어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서 지금의 순서로 굳어졌다.
작가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자모를 되찾는 일이 매우 시급하다”며 “한글이 세계적으로 가장 과학적인 언어체계라는 사실을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진정 우리가 한글 체계를 과학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 소설은 특이하게도 편지들로만 이어져 있다. 편지를 쓰는 사람의 감정이나 문체 그리고 색깔이 그대로 드러난 덕분에 소설은 매우 빠르게 읽히며 한번 잡으면 끝까지 읽게 하는 흡입력이 있다. 서간체 문학이 허약한 풍토에서 작가의 노력이 만들어낸 서간체 장편소설의 모범이라 할 것이다. 김씨는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서간체 소설로 독일문학을 세계문학으로 만들었다”며 서간체 문학에 대한 애정과 꿈을 드러냈다.
- 기사입력 2008.12.26 (금) 20:16, 최종수정 2008.12.26 (금)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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