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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이름과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낯익어가는 것이다. 리는 이름과 닮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예술 사이트에서 만나 채팅으로 일 년 넘게 대화로 사귀어 온 대학 교수 준수와 처음 대면한 날이었다. 리가 계속 만남을 미루었지만 준수의 집요함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준수는 비대한 리의 몸을 비난의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준수는 240미리 신발을 신고 있었다. 작고 왜소한 사람이었다. 졸음이 쏟아졌다. 잠을 깨고 보니 준수는 가고 없었다. 기면증이 편할 때도 있구나. 약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은 것이 이때부터다. 인터넷의 이름은 서로의 상상 속에서 물렁거리지만 곧 만나는 순간 돌처럼 굳어진다. 가상의 공간이 현실화되었을 때 얼마나 많은 관계가 유연하게 흐를 수 있을까? 준수가 돌아간 후 두 번 다시 전화나 메일도 없었으며 채팅사이트에 준수라는 이름을 볼 수 없었다. 리도 본명으로는 절대 들어가지 않는다. 리의 몸이 부푼 것은 계부에게 상처를 입고 끼니마다 인스턴트식품을 먹었던 때부터이다. 아니다. 기면증이 생긴 무렵인 것 같기도 하고, 수십 개의 이름으로 사이버 공간을 부유해 다닐 때부터인 것 같기도 하다. 리는 고무판에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말을 타고 달리는 리가 몸을 뒤로 돌린 채 코끼리만한 늑대에게 활을 겨눈 그림이다. 돈 많은 계부와 결혼한 엄마가 위암으로 죽자 계부는 리의 몸을 더듬었다. 리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계부는 대가로 매끼마다 피자, 햄버거 등의 인스턴트식품을 사다 주었고 리는 폭식을 하기 시작했다. 그 때의 악몽으로 리는 판화에 더 매달렸다. 말의 긴 갈기와 리의 갈기 같은 긴 머리카락이 율동감 있게 나부끼어 화면상 늑대의 크기와 비슷하다. 케이스에서 세모 칼을 먼저 꺼낸다. 날카로운 실뱀같이 우글거리는 리의 머리카락을 파내기 시작한다. 늑대와 겨눌 수 있는 대칭 구도가 뛰어난 수렵도를. 오늘은 손님 한 명 없다. 고요가 등에 찬 기운을 끼얹는 듯하다. 언젠가부터 열쇠 복사하러 오는 사람이 줄기 시작했다. 다양한 기능의 열쇠가 나왔기 때문이다. 지문을 입력시킨 후 같은 지문이라야 문을 열어주는 지문키도 있다. 지문이 사람마다 거의 다르기 때문에 편리할 것 같지만 실제로 불편한 점도 많다. 손가락을 다치거나 땀이 났거나 이물질이 묻었을 경우 확인 거부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주키와 보조키가 하나로 된 게이트맨 회사에서 나온 멀티키 쓰리가 유행이다. 섭씨 70도 이상이면 화재 감지 센서까지 작동하고 보일러도 켜고 끌 수 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자동개폐장치이기 때문에 열쇠도 필요하지 않다. 요즘 열쇠가게는 두 가지 이상을 겸하지 않으면 생활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동은 열쇠가게만 집착하고 있다. 벽에 걸려 있는 수많은 형태의 열쇠를 본다. 안개에 항상 갇혀 있는 것 같은 불안함. 그 불안 속에서 열쇠를 열고 나갈 수는 없는 것일까? 수 없이 지나다니는 무표정의 사람들, 멸시하는 사람들. 모두 저 열쇠들로 문을 열 수는 없는 것일까? 동은 뻣뻣하고 긴 머리카락을 묶고 있던 끈을 푼다. 언제부턴가 얼굴을 가리고 싶어 머리를 길렀다. 아니, 사람들이 보고 싶지 않아 기른 머리다. 동은 상가의 옥상에 오른다. 문이 잠겨있다. 호주머니 속에서 열쇠 하나를 꺼낸다. 열쇠구멍이 있는 것이면 모두 딸 수 있는 열쇠다. 동이 직접 끌로 만든 것이다. 옥상 문을 연다. 도시의 회색 공기는 동의 머리카락을 어둔 마음처럼 헝클어 놓는다. 아래를 내려다본다. 회색의 나무가 보도블록 위에 우울하게 엎드려 있다. 신호등의 불빛을 본다. 붉은 불도 녹색불도 그 어떤 의미 있는 신호도 보내지 않는다.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쫓기듯이, 무엇을 쫓고 있는 듯이 바삐 움직이고 있다. 침을 뱉고 싶다. 입안의 침을 모은다. 오른쪽 입술의 중간쯤이 일그러져 치켜 올라간 흉터가 있는 째보. 째보라고 놀리던 어릴 적 친구들이 떠오른다. 사람들의 경계하는 시선이 입술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볼 때면 소름이 돋는다. 동은 아래로 침을 뱉는다. 하얗게 엉킨 채 낙하하던 침은 바닥에 모래알 같이 작디작은 흰 점을 찍는다. 동은 자신의 처지가 보도블록 위에 끈적거리며 쓸모없이 붙어 있는 버려진 침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리는 요즘 잠자는 횟수가 늘었다. 동은 리가 궁금해진다. 갑자기 깊은 잠에 빠져드는 기면증 환자임을 눈치 챈 후 더 자주 관찰한다. 엷은 안개와 함께 가을비가 내린다. 리의 가게가 촉촉이 젖는다. 가는 빗줄기 사이로 리의 모습을 본다. 잘 보이지 않는다. 흘러내리는 긴 머리가 보기 좋았는데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 버렸군, 무슨 일이 있나? 며칠간 리는 고개를 거의 들지 않고 작업에 몰두했다. 궁금해 견딜 수가 없다. 비가 더 많이 내리기 시작한다. 리를 보고 있으면 동의 마음속에 모닥불이 지펴지는 것 같다. 오늘은 꼭 찾아가 보리라 몇 번 다짐하지만 쉽게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는다. 비 때문에 리의 윤곽이 흐트러진다. 유리에 흘러내리는 빗방울이 리를 더욱 불분명하게 한다. 또 잠이 들었다. 잠든 지 18분이 지났는데 일어나지 않는다. 동은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엄마처럼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것 같은 불안에 동은 급히 뛰쳐나간다. 우산도 쓰지 않고 뛰쳐나왔지만 리의 가게 앞에 오자 멈칫한다. 가게는 아담한 산장 같다. 벽은 하얗게 칠해져 있고 벽면에 붙은 담쟁이가 발갛게 물든 채 창문의 삼분의 일가량을 커튼처럼 드리우고 있다. 비바람에 가늘게 흔들리는 모습이 감미롭다. 빗속에서 머뭇거리던 동은 용기를 내어 리의 가게 유리문을 연다. 작은 풍경이 꿈결인 듯 우주에서 밀려오는 소리처럼 가슴 깊숙이 울려 퍼진다. 안으로 들어서자 잉크냄새와 숲 속의 바람이 깃든 나무냄새 등이 한데 어우러져 동을 휘감는 듯하다. 핸디코트로 흰색이 칠해진 실내 벽은 붓의 자연스러운 터치를 그대로 살려놓았다. 목판화를 하다가 엎드린 채 잠들었나 보다. 나무를 깎은 조각들이 책상 위에 흩어져 있다. 그 옆에는 autumn rain이 필기체로 쓰여 있고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담쟁이와 빗방울 속에 있는 동의 열쇠가게 건물이 스케치되어 있는 노트가 있다. 비 내리는 창가를 보면서 스케치한 그림 같다. 동은 리를 흔들어 깨운다. 깜짝 놀란 리는 걱정스러움과 흥분으로 뒤얽힌 동의 얼굴과 마주하고 누구세요? 라고 묻는다. 동은 그때야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리가 자신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뒤로 물러선다. 그믐밤을 연상하게 하는 숏 컷의 유난히 검은머리 아래로 하얗고 넓은 이마가 반듯하게 보인다. 눈썹은 칼로 정교하게 다듬어 날카롭게 보이나 약간의 오만한 기품이 느껴진다. 망원경으로 수십 번 훔쳐 볼 때는 막연하나마 친근감이 느껴졌는데 실제로 가까이서 보니 오히려 낯설고 어색하기만 하다. 그래도 리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온기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어 좋다. 밝은 갈색의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간절하게 젖어 있다. 눈동자가 너무 밝아 그 밝은 창을 통해 과연 동을 보고 있는 것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어딘지 알 수 없는 먼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마치 신기루라도 보고 있는 것 같은 안개처럼 신비한 시선 때문에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코의 실루엣은 부드러우나 무엇인가 결심하고 곧 실행에 옮길 사람처럼 입술을 꼭 다물고 있어 의지가 강하게 보인다. 검은 바지에 검은 블라우스만 입는 비대한 몸에 비해, 얼굴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작았고 예리하면서도 지적으로 보이며 신비한 아름다움이 번져나오는 것 같다. 벽에 길게 걸쳐진 줄에는 고구려 벽화와 전통 문양의 판화가 가지런하게 널려 있다. 크고 작은 전각도 보인다. 날개를 위로 세워들고 입을 벌린 채 무어라고 외치는 듯한 세발 까마귀의 배경은 붉은 해와 붉은 별자리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어울려 춤을 추는 것 같은 전각도 있다. 사냥과 춤과 일상생활 등 고구려의 조각들을 옮겨다 놓은 것 같다. 저기, 시간을 새기고 싶은데요. 동은 머리카락으로 반쯤 가린 얼굴을 약간 옆으로 하고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을 어떻게 새기지요? 그리고 보니 시간 속에 기억이 새겨져 있듯, 제가 하는 작업은 작은 공간이지만 시간을 새긴다고 할 수 있겠네요. 각인된 시간을 언제든지 선명하게 찍어 볼 수도 있으니까요. 어떤 시간을 새기고 싶은데요? 리는 물에 젖는 느낌으로 말을 한다. 기다림의 시간 또는 만남의 시간……. 특별히 새기고 싶은 그림 있으세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언제나 피하는 리였지만 머리카락으로 가린 동의 모습이 궁금해진다. 동은 십여 개가 나란히 붙어 있는 수렵도의 말을 보며 달리고 싶다는 생각을 문득한다. 모르겠어요. 동은 무의식중에 말한다. 달리는 말을 새기면 어떨까요? 시간 속을 자유롭게 질주할 수 있는……. 악몽 같은 시간 속으로는 달려가지 못하게 할 수도 있나요? 좋은 기억만을 명중시키는 활도 새겨 드릴게요. 좋지요. 고마워요. 동은 밤새 비를맞고 들어와 따뜻한 아랫목에 앉은 것처럼 마음이 누그러짐을 느낀다. 기억의 시간을 새길 수 있는 기회를 주시니 제가 감사해야지요. 동은 전각을 파고 있는 리를 바라본다. 가로 세로 20㎝ 대리석에다 파기 시작한다. 리는 말을 완성하고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든다. 동은 리가 편히 잘 수 있도록 소파에 눕혀 준다. 동은 잠자는 모습을 지켜본다. 잠이 든 지 정확히 14분5초 만이다. 머릿속으로부터 두려움의 비명이 소용돌이친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귓속에서 뒤엉킨다. 전쟁터나 지옥에 온 것 같다. 그 소리는 점점 커다란 몸뚱이가 되어 리의 영혼까지 삼켜버릴 것 같다. 소리를 지르려고 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몸을 움직이려고 해도 꼼짝할 수가 없다. 가위에 눌릴 때마다 리는 누군가가 좀 깨워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신음하면서 간절한 의식으로 몸을 비틀려고 하는 리를 동이 깨운다. 많이 피곤하신가 봐요. 나중에 파세요. 이만 갈게요. 두려움에 발버둥질하던 자신을 깨워 준 동이 리는 싫지 않다. 리는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조금만 하면 끝나는 걸요. 말 타면서 활 쏘는 모습은 저의 전공이죠. 리는 전각을 완성한다. 먹을 묻혀 화선지에 찍은 후 동에게 보여 준다. 이 시간 안에서 살고 싶군요. 동은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 온기가 느껴지는 시간의 단편이 각인됨을 느낀다. 동은 길 건너 맞은편에 있는 열쇠가게에서 왔다고 말한다. 아, 예. 비상열쇠를 모두 잃어 버렸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세 개나 되던 비상열쇠를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하나 남은 열쇠마저 잃어버릴까 항상 불안해요. 리는 달빛처럼 희뿌연 목소리로 말한다. 열쇠 복사는 얼마든지 간단하게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열쇠 잃어버릴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 있지요. 비밀번호로 여는 열쇠가 있으니까요. 리를 바라보며 말한다. 동은 풍성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리 안에서 태아처럼 몸을 반쯤 말고 한잠 푹 자고 싶다. 리는 동의 모습을 수렵도의 모델로 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다. 한 번 갈게요. 리는 웃는다. 잠결에 가위에 눌린 리는 스포츠 모자를 쓴 청년이 와서 가게 앞에 포스터 붙이는 것을 본다. '아, 고구려'(해방 후 중국에 머물게 된 고구려 전문 역사학자들이 오랜 기간 연구한 내용을 바탕으로 예술전문가들과 합작하여 고구려의 벽화와 문화를 백두산 아래에 있는 고래실에 복원하였다. 남북통일을 앞두고 고래실의 벽화를 서울 코엑스에서 전시함.)이란 제목의 고구려 벽화 전시회다. 장소는 코엑스로 되어 있다. 리는 고구려 수렵도를 보러가기로 한다. 인스턴트식품으로 한참 폭식을 하고 있던 중학교 일학년 때였다. 미술책 첫 페이지에 나오는 무용총 수렵도에 끌려 고무 판화 시간에 수렵도를 했다. 고분 벽화인 그 그림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운동성과 고구려인의 기백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 고무판을 파기 시작하면서는 엄마에 대한 원망과 계부에 대한 증오와 세상에 대한 울분으로 마구잡이로 칼집을 내며 팠다. 미술 선생님은 수렵도를 망쳐놓았다고 타박했다. 리는 미술부도 아니면서 매일 미술실로 갔다. 미술실에는 대회를 준비하는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리는 한 쪽 구석에 앉아 고무판을 파기 시작했다. 선생님과 아이들은 무엇하러 왔느냐고 물었지만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포기한 듯 말을 걸지 않았고 선생님은 리에게 다른 작품도 해보라고 하였다. 리는 수렵도만 고집했다. 졸업할 무렵 선생님은 생명력이 가득한 작품이라고 칭찬을 하며 처음으로 롤러를 손에 들려주었다. 그 후로 두 번 다시 미술실에는 가지 않았다. 하지만 항상 모든 것에 부족한 미숙아라는 생각이 들어 사람들을 피했다. 계부가 스무 살이나 어린 계모와 재혼을 하고 유럽의 어느 나라로 이민을 간 것과 그나마 재산의 일부를 리에게 상속시켜 준 것은 잘 된 일이었다. 다시 판화를 시작하였다. 리는 항상 세상이 판화를 하기 위한 고무판으로 보였다. 둥근 칼로 양각을 만들고 싶은 일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창칼로 찔러보기도 하였으며, 어떤 것은 끌칼로 아예 긁어내야 한다고 생각을 하기도 했다. 판화를 찍었을 때는 방향이 바뀌었다. 리는 완성한 판화를 꼭 찍어 보고 완전한 구도는 방향이 바뀌어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동물과 사람의 대칭 구도가 잘 되어진 수렵도를 생각하며 세상도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리는 수렵도의 활시위 장면은 누구를 향한 겨냥이 아니라 동물의 자연스러운 역동성과 어우러지는 픽션적 모티프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지탱할 활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리는 검은 잉크를 롤러에 묻히고 종이에 찍었을 때 그 흑백의 대비를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했다. 리는 자신을 세상다운 세상으로 만드는 예술가라고 생각했다. 진실이라고 리가 믿는 것은 수렵도의 역동성과 균형미였다. 리를 보려고 망원경을 보던 동도 '아, 고구려' 포스터를 본다. 동은 경직된다. 포스터에 있는 용과 삼족오가 이글거리는 불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망원경으로 자세히 보니 그림 아래에 '해뚫음무늬금동장식품'이라고 써져 있다. 하늘 위로 날아가는 불새 같은 용과 삼족오가 동을 보는 것 같다. 테두리의 둥근 선이 삼족오와 불꽃을 자궁처럼 부드럽게 감싸고 있으며 이미 한 마리는 승천한 듯 자리가 비어 있다. 코엑스 전시장 앞. 동은 불꽃같은 구름무늬에 매료되어 대형 포스터를 보고 있다. 불꽃 속에는 세발 까마귀가 있다. 불이란 태우기 위해서 있는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 앞으로 리가 지나간다. 리의 몸에 불이 붙은 것 같다. 동을 보지 못한 리가 지나가고 동은 뒤를 따른다. 전시회 입구의 벽에는 고구려의 역사와 연대표가 걸려있다. 고구려 유물들이 전시된 입구로 들어서면 고구려의 옷을 입은 남자와 여자가 서 있다. 리는 유리 안에 전시된 고구려 여자 앞에 섰다. 유리에 비친 리의 모습과 고구려 여자가 겹쳐진다. 리는 벽화가 전시된 곳으로 간다. 동도 유리에 비친 자신이 고구려 남자와 겹쳐지는 것을 본다. 그리고 리를 따른다. 안악3호 무덤을 비롯한 몇 개의 무덤은 실제와 똑같이 만들어져 있었다. 미로같이 만들어놓은 여러 개의 무덤들을 지나가다가 리가 멈춘 곳은 무용총 수렵도 앞이다. 수렵도를 감격스럽게 볼 무렵 잠이 쏟아진다. 수렵도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잠을 잔지 12분 만에 가위에 눌리기 시작하고 동은 바로 깨웠다. 리는 동의 어깨에 기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놀란다. 시간이 되시면 차 한 잔하고 가세요. 함께 동의 가게로 간다. 리는 동의 불꽃 그림을 본다. 삶의 구비마다에서 이글거릴 듯한 불꽃은 예술적인 눈을 가진 리를 사로잡는다. 리는 그 불꽃을 전각으로 해보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불꽃 그림만 그리세요? 네, 태워 버리고 싶은 시간이 있어서요. 동은 불꽃 그림을 선물로 준다. 저 사람도 잊어버리고 싶은 시간을 가졌구나. 열쇠에 대한 것은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왔음을 집에 도착하고 난 후 리는 깨닫는다. 아침부터 함박눈이 내린다. 리가 동을 초대한다. 동은 선물을 안고 빨간 장미 한 다발을 산다.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오랜만에 하늘을 본다는 생각을 한다. 가슴에 따뜻한 모닥불이 타오른다. 머리를 묶고 신호등 앞에 선다. 두 개가 아래위로 붙어있는 회색빛 신호등을 동은 바라보고 있다. 빨간불인지 초록불인지 몰라도 상관없다. 위에 불이 오면 멈추고 아래에 불이 오면 건넌다는 것을 동은 이미 알고 있다. 색상변환기술로 티브이, 컴퓨터, 휴대폰 등을 통해 색맹인도 정상인이 볼 수 있는 색의 이미지와 거의 동일하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최근의 보도도 한줄기 빛으로 동에게 다가온다. 리의 작업실에 들어선다. 마음속에 쌓여있던 어둠이 낳은 시간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낀다. 동이 마주보고 있는 것은 리의 웃는 얼굴과 말을 탄 채 불꽃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는 동의 우람한 모습이다. 전각하기엔 큰 치수다. 불은 태우기 위해 있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타닥타닥 별똥별 같은 조그만 불씨들로 가슴에 모닥불을 피우고 살아갈 수도 있다는 걸 요즘에 와서 많이 느껴요. 동은 태우고 싶었던 기억의 시간을 명중시킨다. 그리고 리에게 열쇠를 선물한다. 동은 문에 열쇠를 설치해 준다. 비밀번호만 입력하면 돼요. 화재감지기도 함께 설치되어 있어요. 이제 열쇠가 정말 필요 없게 되었네요. 동을 향해 웃으며 말한다. 리는 리라는 모습으로 동은 동이라는 모습으로 마주 본다. 봄이 올 무렵 리는 커다란 열쇠를 물고 초원을 달리는 말에 동과 리가 함께 탄 전각을 새겼다. 그 말은 시간 속 어디든지 달릴 수 있는 듯 자유롭고, 이글거리는 정열과 따뜻함으로 가득하다. 벚꽃 날리는 봄밤이다. 동에게서 전화가 온다. 리에게 창밖을 보라고 한다. 리가 창밖을 본다. 어디쯤에서부터 왔을까. 전대미문의 별들이 폭죽을 터트리고 있다. 창가에서 찰랑거리는 식물줄기마저 황금빛으로 찬란하다. | |||||
2008-12-31 16:14:35 입력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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