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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자(61)의 작품세계는 부단한 변화를 겪어 왔다. 시작은 페미니즘이었다. 연작소설집 《절반의 실패》(1988)에서 작가는 고부간의 갈등·가정폭력·외도와 매춘·빈곤 등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여러 고통을 조명했다. 10년 뒤 나온 《사랑과 상처》를 통해 그녀는 남녀 관계와 여성성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드러냈다. 남자 역시 가부장제의 피해자라는 이 인식은 《그 매듭은 누가 풀까》(2003)에 이르러 여성이 출세와 권력욕에 사로잡혀 모성을 외면하거나 억누르는 모순을 저지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신작 《빨래터》는 우리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 낙찰가를 기록한 〈빨래터〉의 화가 박수근(1914~1965) 화백에 대해 쓴 작품이다. 그런데 그녀가 이 소설 속에 담은 것은 박수근의 삶이라기보다 차라리 소설가 이경자의 문학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신작 《빨래터》는 우리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 낙찰가를 기록한 〈빨래터〉의 화가 박수근(1914~1965) 화백에 대해 쓴 작품이다. 그런데 그녀가 이 소설 속에 담은 것은 박수근의 삶이라기보다 차라리 소설가 이경자의 문학 전부라고 할 수 있다.
- ▲ 화가 박수근의 삶과 예술, 가족을 소설로 쓴 이경자씨는“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박수근을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 다”고 말했다.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박수근은 처자식이 굶는 것을 지켜보며 생활의 무게에 짓눌린다. 생계를 남자가 책임져야 한다는 가부장적 책임의식의 명암은 이경자 소설이 끈질기게 탐구해 온 주제였다. 박수근이 무모하리만큼 술에 빠져든 것에 대해 작가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자는 술로 죽는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예술적 지향과 생활인으로서 가장의 역할 사이의 괴리가 그를 폭음으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소설은 〈빨래터〉의 소장자인 미국인 존 릭스를 만나기 위해 미국행 비행기를 탄 박수근의 아들 박성남이 과거를 돌이켜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취재를 위해 박성남 화백을 만난 작가는 그로부터 "큰 나무 아래는 풀이 자라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고, "그 순간 소설의 얼개가 확 떠올랐다"고 말했다. 아버지와 불화했으면서도 결국은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기로 결심하기까지 아들이 겪었을 고통과 화해의 과정이 삶의 저울에 무겁게 놓여 독자를 사색으로 이끈다.
변치 않는 마음으로 아내를 대한 박수근과, 남편의 예술이 지닌 가치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지지했던 김복순의 사랑도 이 소설을 읽는 감동을 더한다. 작가는 박수근이 그 사랑을 바탕으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형성했다고 본다. '저 애들과 아내가 나의 제비똥이다. 예술적 영감은 저 삶으로부터 솟아오른 것이며 색채는 저 삶으로 스며들어가는 것이구나.'(120쪽)
장편 《천 개의 아침》(2007)에서 펼쳐보인 순애보적 사랑은 박수근 부부의 사랑에 이르러 삶의 아름다움을 완성케 하는 가치로까지 격상되고 있다. 작가는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박수근이기도 했고 김복순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타성과 몰이해로 관계의 틈을 메우며 살아가는 부부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입력 : 2009.02.27 2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