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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녀리게 꺾인…칼날같은 날카로움
음력 2월 초면 십수 년 전만해도 농사일을 앞둔 일꾼들에게는 엄청 큰 명절이었다. 한 해 농사일을 마감하기까지의 그 노고를 생각해 시골 인심들은 넉넉했다. 영등할미가 초하룻날 내려와 스무날 께 올라 갈 때까지 심술을 부려 일기가 고르지 못하긴 해도. 그게 끝내는 봄바람인가. 소매 끝이 간혹 시럽다. 그래도 봄은 어쩔 수가 없는 것. 우선 봄이면 널리 읽히는 칠언절구 '탐춘(探春)'이 제격. 겨우내 얼었던 마음도 녹일 겸 . 진일심춘불견춘(盡日尋春不見春)(하루 종일 봄을 찾아도 만나지 못하고) 망혜답편롱두운(芒蹊踏遍頭雲)(짚신 신고 다니다 언덕 끝 구름도 밟았네) 귀래적과매화하(歸來適過梅花下)(돌아오다 우연히 매화나무 가지를 보니) 춘재지두이십분(春在枝頭已十分)(봄은 벌써 가지 끝에 완연히 무르익었네)(임종욱의 '고사성어대사전'서 인용) 재익(戴益)의 작품이라고도 하고 송나라 어느 스님의 오도송이라고도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만한 봄나들이는 결코 쉽지 않는 일. 등잔 밑이 어둡다고 웬만해서는 아득히 먼 곳에다 시선을 주기 십상이지 바로 옆에 봄이 오고 있는 줄이야 어찌 깨닫기나 할까. 이런 봄 날. 저녁. 상큼하게 뜬 초사흘 달을 함께 볼 수 있다면 그건 더 없는 행운이다. '초사흘 달은 잰 며느리가 본다'고는 하지만 며느리만 보기에는 너무 아름답다. 싱싱하다. 무엇이 저렇게 다듬어 두었을까. 그 신선함. 상희구는 그 달을 이렇게 노래했다. "푸른 하늘에/ 정박한/ 하얀 생선뼈/ 뉘 하마(河馬)가 예인(曳引)해 왔나?(초승달 전문)". 시큼하면서도 시리도록 아려오는 그 의미. 사는 맛을 해학적으로 풀이한 솜씨며 몇 줄로 뜨끔하게 사는 맛까지 전해주는 것이 좋다. 그런 초사흘 달이 봄 가을이 느낌이 다르다니. 얄궂다. 봄에는 그 달이 옆으로 누운 것처럼 기울어 보이지만 가을에는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 이런 것도 초사흘달이 주는 매력. 아마 그것은 가녀리게 꺾이며 어떨 때는 칼 날 같은 날카로움이 보는 이의 가슴을 더 헤집는지도 모른다. 그 가슴에 무엇이 담겨있든. 신윤복의 그림 '월하정인도(月下情人圖)'에도 초승달은 한 쌍의 정분 있는 남녀를 비추고 있다. 은근히 그러면서 다감하게. 달빛은 교교하지도 않고 드러나지도 않는다. 그저 아쉬운 시간을 되레 돌려주려는 듯 슬기롭고 담담하다. 초승달이 저렇게 담담하리. 달과 사람의 마음이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저렇게 교감하리. 화제는 또 어떻고. '월침침야삼경 양인심사양심지(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心知)(달도 기운 밤 삼경에 두 사람 속은 두 사람만 알지)'. 그래. 두 사람만 안다. 초승달은 모를까? 이 그림을 두고 만남이냐 헤어짐이냐를 놓고 열전이 벌어진 적이 있다. 그런 것이 뭐 그리 대수일까마는 요즘은 그런 것에도 무척 관심들을 끈다. 시대적인 사고라고나 할까. 결국 초승달이 해답을 준다. 헤어짐이 맞는 것 같다고. 당사자들이 아니고서야 무 자르듯 할 수는 없는 일. 만남이면 어떻고 헤어짐이면 어떠랴. 초사흘 언저리의 그 초승달이 짓는 희한한 곡선의 그 아름다움에는 정인의 마음들이 가득하지 않을까. 초사흘 달의 그 선은 차갑기는 하다. 결코 채울 것도 이지러질 것도 없을 것 같은 달. 누가 쉽게 근접이라고 하랴. 저 아름다운 곡선. 이효능은 그런 초승달을 두고 이렇게 노래했다. "시린 벨벳/ 이승길 한 굽이 깔아 놓고 나서/ 눈감고 숨었다가/ 가진 것 다 비워 주고/ 삭정이 부풀리며/ 그믐의 어깨위에서 지새웠다// 한 사흘/ 여울 길 휘돌아/ 저문 자락에 매달려/ 실눈을 뜨는 만월의 씨앗/ 내 가슴에 빛이 조금씩 열린다./ 그렇다. 만월의 씨앗이련만 초승달은 전혀 움틀 기색도 없으련만 날이 지나면 훤하다. 박덩이 같은 만월의 아름다움에 또 곡선은 더 없는 다른 곡선을 만든다. 진정한 곡선의 미학. 서정주도 초사흘 달을 남다른 미감으로 노래했다. 그의 '늙은 사내의 시'다. 내 나이 80을 넘었으니/ 시를 못 쓰는 날은/ 늙은 내 할망구의 손톱이나 깍어 주자/ 발톱도 이뿌게 깍어주자/ 훈장 여편네로 고생살이 하기에/ 거칠대로 거칠어진 아내 손발의/ 손톱 발톱이나 이뿌게 깍어주자/ 내 시에 나오는 초승달 같은/ 아래손톱 밑에 아직도 떠오르는/ 초사흘달 바래보며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 이슬람. 그들에게도 초승달은 무척 큰 의미를 지녔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 지중해 해안 동쪽 해안에서 페르시아만까지. 그 안에는 낫 모양의 회랑지대. 인류문명의 발상지로 불리는 유프라테스강을 비롯해 이집트, 레바논, 이란, 이라크 등을 포함하는 약 3천㎞. 여기서는 1만년 전의 구석기 유목민들이 정착해 도시와 문명을 일군 곳이다. 당시 수메르인들이 쐐기 모양의 설형문자는 세계 최초의 문자로 인정받고 있다. 초승달에 이런 위대함이 있을 줄이야. 지금도 위대한 문명의 흔적들은 발굴되고 있다질 않는가. 초사흘달은 아미월(蛾眉月)로도 불린다. 눈썹 같은 아름다운 달. 나도향은 그런 초승달을 "세상을 후려 삼키려는 독부가 아니면 철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라고 소설 '그믐달'에서 표현했지만 세상의 온갖 풍상을 다 겪은 애절한 맛이 있는 그믐달과 비교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병기의 시조 '별'에 나오는 초사흘 달을 느껴야 비로소 초승달의 그 맛이 진실로 아로새겨질 것 아닐까.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 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게오/ 잠자코 호올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오늘부터 닷새 후면 보름. 달은 차서 원만해 질 것이나 다시 보름날을 지나고 초사흘이 되면 어김없이 아름다운 그 초승달. 소식(蘇軾)의 유명한 '춘야' 첫 귀에 "봄 날 밤의 한 순간은 천금에 값하느니(春宵一刻値千金)"라고 했으니 이런 봄 날 밤. 천금 같은 초승달에 한 번 빠져보면 어떨까. 그 빼어난 곡선의 아름다움과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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