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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치며 물 흐르듯 무대를 정연히 나다니는 하얀 곡선
그런 흥을 우리 문학작품에서는 어떻게 비춰질까. 잠시 들여다보자. 김억(金億). 그의 '바람에 날리는 군소리'에 "봄은 아름답다, 기쁨이다, 황홀 그 자신이다. …나물 캐는 아이들의 흥어리 소리, 내 고향의 황포를 에도는 뱃소리, 나무꾼의 머슴노래, 거름 싣는 거름 노래…." 봄이 흥얼거리며 성큼 다가선 느낌이다. 현진건(玄鎭健)의 장편 '무영탑'에서는 "흥이란 한없이 곱고 한없이 사납고 철석같이 미쁘다가 바람같이 변한다. 너르자면 온 누리에 차고 잘자면 겨자알도 오히려 크다. 활달할 적엔 양양한 바다에 봄바람이 넘놀고 까다롭자면 시기하는 지어미도 물러앉을 지경이다…." 무용가 백년욱의 춤도 흥이라면 빠질 수 없다. '흥춤'. 특히 그는 대구에서 줄곧 활동하면서 스승 정소산 선생이 물려준 이 '흥춤'을 지키며 갈고 닦기에 30여년을 고스란히 바쳤다. 평생을 바친 거나 다름없다. 대구에 이런 춤이 있었다니 우선 놀랍고, 여태 이 춤이 마치 숨겨진 보물처럼 다뤄지고 있다니 그 또한 우스운 일이다. 뻔히 알면서 모른 척 일부러 외면해 온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너무도 다행이다. 왜냐면 모른 척 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지칠 대로 모른 척 해봤자 결국은 드러나는 것이 우리들의 역사니까. 백년욱은 그 '흥춤'을 위해 '대구흥춤보존회'를 꾸려 그 대표를 맡고 있다. 벌써 여러 차례 공연도 했다. 그러나 스승 정소산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깜깜하다. 지방이라는 핸디캡에다 기녀 출신이라는 인식 탓도 한 몫 한다. 그보다는 예술계의 그 허잡스러운 '남 알아주지 않기'에다 심하면 헐뜯기까지 당해 더 괴롭다. 백년욱은 그런 현실을 송곳니가 방석니가 되도록 마음으로 분노했지만 겉으로는 좀체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춤판에서는 그 분노가 흥겹게 폭발한다. 무흥(舞興)이랄까. 유베날리스는 "분노는 시흥을 불러일으킨다"고 했는데 백년욱은 무흥을 불러일으킨 셈이다. 도대체 어떤 춤일까. 백년욱은 "희로애락의 인생사를 담고 있다"고 한마디로 함축했다. 너새니얼 호손이 "인생은 대리석과 진흙으로 이뤄졌다"는 말과 흡사하다. 엄청 딱딱한 돌과 진흙의 묽음이 적당히 섞인 그런 인생살이에 춤, 흥춤을 춘다는 것은 즐거움 그 자체다. 공자의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는(飯疏食飮水) 즐거움 혹은 벗이 멀리서 찾아오는(有朋自遠方來) 즐거움과 무엇이 다르랴. 그저 혼자서 즐기는 것(獨樂樂)보다는 남과 더불어 즐기며(與人樂樂), 몇몇이서 즐기는 것(少樂樂)보다는 여럿이서 즐기는 것(與衆樂樂)이 문제라면 문젤까. 실상 흥춤은 비단 대구뿐 아니라 여러 지방에서 춰왔다. 즉흥무를 줄여, 제법 우리 것으로 모양을 낸 단어다. 그러나 대구의 흥춤은 좀 다르다. 정소산 선생 시절부터 함께 연희해 온 중요무형문화제 제45호 대금산조 예능보유자 이생강은 대구흥춤을 "영남의 호방하고 경상도 특유의 덜렁제 덧뵈기 장단과 굿거리 춤을 혼합한 희로애락의 즉흥무"라며 그 춤사위가 섬세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고 했다. 경기도의 도살풀이나 호남의 살풀이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중량감도 있다. 그러다가 곱기도 하고, 사납기도 하고, 미쁘기도 한 대구흥춤. 백년욱의 '흥춤'. 백년욱은 그런 '흥춤'을 스승이 일궈내 습득한 그대로 춘다. 약 12분. 굿거리서 덧뵈기, 은모리, 자진모리, 굿거리로 이어지는 그 동안 흥들이 어우러져 한바탕 회오리 치는 인생살이를 변화무상하게 연희한다. 결코 반복동작이 없다. 그의 춤 인생이 결코 반복이 없듯이. 춤에 빠져, 춤에 매진할 뿐이다. "인생의 목적은 끊임없는 전진이다. 풍파는 언제나 전진하는 자의 벗이다. 고난이 심할수록 내 가슴은 뛴다"고 니체가 말했지. 춤꾼, 백년욱도 항상 가슴이 뛴다고 했다. 그러나 그 가슴을 세상에 드러내 보인적은 별로 없다고 했다. 흰 수건. 세마치장단이 자지러진다. 가볍고 흥겹다. 노들강변인가 싶더니 이내 밀양아리랑이 이어진다. 그 수건이 휙 손에서 뿌려진다. 그러면 아름답게 휘어져 감긴다. 그러다 어깨에 걸쳐지고, 잠시 사이 둥글게 말아서는 화려하게 하늘로 부상하면 그것이 그리는 하얀 곡선은 환상적이다. 어떤 춤에 이런 곡선의 환상이 이뤄질 것인가. 굽이치며 물 흐르듯 무대를 정연히 나다니는 하얗고 긴 수건. 장단이 점점 격렬해지면 수건은 붓으로 변한다. 일필휘지(一筆揮之)다. 양사언이 금강산 만폭동에 썼다는 글씨 은구철삭(銀鉤鐵索)이랄까. 그리고는 감히 그 호방함에 말문을 닫기 일쑤다. 자유분방한 그 곡선들. 휘감아 돌기도 하고, 엎드려 물결 타는 듯 세상을 탄다. 어느 듯 춤사위는 물 흐르듯 무대를 흐르고, 부드럽게 관객을 사로잡으면 기껏 720초. 그러나 매 초마다 큼직한 세상 하나씩은 넉넉히 담겨 있을 춤사위다. 곡선의 그 춤사위들. 그리고는 무대 위나 아래 모두 감격뿐이다. 벅찬 감격. 그럴 때 마다 백년욱은 스승이 한 "거미처럼 춤을 춰라"는 말을 되새기며 다시 힘을 얻는다. '대구흥춤'이 정말 흥! 하며 마음껏 내지를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그는 그런 '흥춤'을 춘다. 곡선가락과 함께. |
/글=김채한 객원기자 namukch@hanmail.net /사진=우태욱기자 wtw@yeongnam.com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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