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진의 차맥] (12) 차문화축제, 한국 차 법도에 한걸음 다가가<세계일보>
- 입력 2011.05.16 (월)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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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위계적인 차문화 극복… “나눔과 평등의 평상음료”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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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하동, 사천 등 남녘 전라도와 경상도의 차밭들이 심각하게 동해(凍害)를 입은 가운데 벌어진 차 축제는 도리어 한 단계 품격이 높아져 위기 속의 기회를 실감케 하고 있다. 올해 우리나라 양대 차생산 지방자치단체인 보성과 하동의 축제는 차인과 차농,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차애호 인구들의 합작으로 커다란 성과와 진전을 이루었다. 지금까지 차 문화축제는 전시 위주로 진행돼 왔으며, 차인들도 생활인의 자세라기보다는 차표연(茶表演) 위주로, 혹은 신분과시용으로 들떠서 축제에 임해온 것이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위기를 실감한 탓인지, 아니면 차 문화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려는 것인지 심기일전으로 ‘차를 대중에 가깝게’라는 개념으로 축제에 참가한 흔적이 여러 곳에서 두드러졌다.
경남 하동군 악양에서 열린 다원음악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와 동네 할머니들에게 꽃과 차를 올리고 있는 아동들.
특히 보성제 소리의 고장답게 보성축제는 ‘보성소리 한 대목 배우기’와 ‘차 만들기’ ‘차 예절 체험’ ‘문학을 담은 다향 백일장’을 여는 한편 ‘녹차야 놀자’라는 주제로 녹차 묘목 심어가기, 녹차인절미·녹차다식 만들기 등 30여 가지의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운영됐다.
보성읍 신흥동산에서는 5∼6일 퓨전국악과 8인조 성악팀을 초청, 환상의 상설공연을 마련해 관광객과 주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했으며 다문화가정 6쌍이 행사장에서 합동전통혼례를 올려 큰 축하를 받기도 했다.
보성군과 하동군이 경쟁이라도 하듯 같은 기간에 열린 ‘제16회 하동 야생차 문화축제’는 쌍계사가 있는 하동 화개면과 악양면에서 나누어 열렸다. ‘왕의 녹차, 녹색풍류’를 슬로건으로 차의 시배지답게 전통을 강조하면서 진행됐다. 문화관광부 선정 3년 연속 최우수 축제로 꼽힌 바 있는 하동 차축제는 전국의 차인들과 관광객들이 참가한 가운데 성황을 이루었다.
보성 다향제에서 참가한 관람객들이 차를 시음하고 있다.
행사기간 5일 동안 섬진강 달빛차회, 대한민국 차인한마당 등 대표 프로그램 2개를 비롯해 녹차요리 콘테스트, 차학술 심포지엄 등 28개의 프로그램, 그리고 헌다례·축하공연 등 공식행사 3개, 화개장터 프린지공연 등 확장 프로그램 18개 등 모두 41개 프로그램으로 치러졌다.
특히 녹차가 세계음료로 부상하는 것과 함께 악양면이 국제슬로시티로 지정되면서 축제 홍보대사로 위촉된 ‘미수다’ 출연자 7명을 포함해 미국·호주·러시아·중국·베트남·몽골 등 외국인 관광객 4700여명이 참여해 세계 속의 명품 축제임을 실감케 했다.
인기 가수 이은미가 출연한 축하공연과 불교방송이 참여한 산사음악회, 세계적인 팝페라 테너 임형주가 출연한 열린음악회 등 3대 드림 콘서트가 마련돼 축제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하동행사 가운데서도 압권은 드림콘서트에 비해 저렴한 예산으로 알찬 내용을 꾸민 ‘달빛차회’ 작설지몽(雀舌之夢). 달빛차회는 섬진강의 드넓은 평사리 모래밭에서 펼쳐졌다. 달빛차회에 앞서 매암차박물관 야외잔디밭에서 펼쳐진 다원음악회와 티브랜딩쇼와 청향회(한국 꽃꽂이 협회)가 주최하는 ‘한국의 화도(花道)’ 전시행사는 차행사의 종래 관념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성신여대 문화산업대학원 이현숙 겸임교수와 매암차박물관 관장 강동오 박사(인류학)의 합동으로 기획된 프로그램들은 빛을 더했다. ‘왕의 녹차’에 이어 새로운 하동 차 브랜드 창출을 위한 ‘홍차 론칭 쇼’는 차를 통해 꿈을 실현하려는 지역민들의 열기를 느끼게 했다.
특히 7일 낮 어버이날을 하루 앞두고 열린 ‘동무야, 차소풍 가자’를 주제로 내건 다원음악회(연출 장효은)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초청하고 동네 고령 노인들에게 베풀어진 아동들의 진다(進茶)와 장미꽃(여성인권을 상징) 달아주기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옛 고통과 어둠을 일시에 씻어버리게 하는 한편 차의 축제가 전통 충효사상에도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날 행사를 위해 멀리 김해에서 온 유치원 아동, 여수와 악양의 초등학생들은 새로운 경험에 시종 열띤 분위기였다.
‘한국의 화도’는 우리 역사상에서 훌륭한 사표가 된 여인 논개를 비롯하여 숙선옹주(정조의 딸, ‘동다송’을 쓰게 한 홍현주와 결혼함), 혜경궁 홍씨(사도세자빈), 제주도의 김만덕, 바리공주, 정의공주(세종의 둘째딸), 유관순 등의 인물에 대한 일생 스토리를 주제로 한 설치미술 행사였다.
이날 저녁 달이 뜰 무렵 평사리(平沙里) 모래밭에서 펼쳐진 달빛차회는 절정을 이루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참가자들에게 ‘행복장수밥상’을 주는 것으로 시작된 달빛축제는 녹색풍류라는 말에 어울리게 때마침 구름을 뚫고 나온 달빛 아래에서 샌드애니메이션, 시낭송, 가곡과 25현금 이중주, 전통무용 및 사물놀이 등 동서양 예술의 진수를 보여주어 칭송을 받았다.
‘작설지몽’을 주제로 한 달빛차회는 특히 전국에서 모여든 부모와 어린이 1000여명으로 붐볐다. 서예가 김기상씨는 즉석에서 서예 퍼포먼스로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샌드 아티스트 주홍씨(한국임상치유예술학회 부설 연구소 부소장)는 공연 내내 샌드애니메이션을 펼쳐 아동들의 환호와 탄성을 자아냈다.
사상 초유의 샌드애니메이션으로 차 그릇과 찻잎 그리고 공연주제에 따른 각양각색의 형상을 펼쳐보이자 어린이들과 참가자들은 신기한 듯 숨을 죽였다. 전통과 미래가 현재에서 동시에 살아 움직인 달빛차회였다.
최명진 공연감독과 김현옥 음악감독이 진행한 달빛 오디세이는 격조 높은 음악과 춤, 시낭송 등으로 시골무대에서는 보기 드문 문화공간을 연출해 앞으로 차축제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 모범을 보였다.
작은 북소리와 함께 국악인 박종순씨가 편곡하여 부르는 정가 ‘채엽가’를 시작으로 막이 오른 ‘달빛 오디세이’는 현대무용가 이정숙의 ‘지전무’에 이어 박화산 시인의 ‘달빛에 젖어’ 시낭송, 유형민(테너)의 ‘또 아리랑, 사랑아’, 김대수(바리톤)의 ‘명태, 고향초’ 강지민과 송정랑의 ‘25현금 이중주’ ‘허튼춤’ ‘사물놀이’(미르), 악양 주민들 32명이 참가한 ‘봄날은 간다’ ‘화개장터’ 합창으로 끝을 맺었다.
행사를 기획한 강동오 박사는 “차는 나눔과 평등으로 함께하는 평상의 음료다. 우리의 전통차회는 자연 곁으로 다가가는 차회이고 자연과 더불어 하나가 되는 차회였다고 생각한다. 내년에는 ‘한국차 그 희망의 대장정’과 한국 차산업과 차문화의 세계무대 진출을 위해 ‘세계차인대회’를 기획하고 있다”고 말한다.
달빛차회는 그동안 전시효과 위주, 트로트가수 등 대중가요 가수 초청 일변도의 차회를 뛰어넘은 프로그램으로 관람객의 갈채를 받았다. 앞으로 차 축제는 지방자치단체마다 서로 다른 프로그램으로, 지역성을 살리고, 생활과 밀착되어 생활차를 이끌어가는 방향에서, 일반 참가자 위주로 진행되는 것이 효과적이고 생산적임을 보여준 축제들이었다.
이번 축제를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차가 한 걸음 더 대중화에 다가섰다는 점이다. 차문화는 결국 보다 많은 대중이 차를 즐기고, 어디서나 격의 없는 찻자리를 통해서 인간과 자연이 함께 소통하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다. 관 주도의 행사, 이벤트 업체에 맡기는 행사, 잘못 하면 마치 부자나 특권층들만 차를 먹는 것이고, 차를 먹는 데에 으레 차의 도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차를 계급적으로 박제한 것에 대한 반성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일본 다도를 극복할 가능성이 점쳐졌다는 점에서 올해 축제는 ‘차 법도의 뿌리찾기 행진’이라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일본 다도의 결정적이고 태생적 약점은 바로 부유한 상인과 사무라이 집단의 정치차회를 통해 다도가 정립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위계적인 차문화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한국 차법을 형성하는 데에 경계대상이었다.
물론 전문 차인들이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차를 먹는 대중이다. 차 표연의 경우, 표연을 위한 표연은 이제 지양해야 한다. ‘차의 평등’도 슬로건이 아니라 ‘결과적 평등’을 실현하는 차축제가 되어야 한다. 차는 우선 많이 먹는 것이 차의 도이다. 먹지도 않는데 도(道)만 운운한다면, 차 축제는 각종 차 단체에 소속된 차인들의 ‘그들만의 잔치’가 될 위험이 있다.
일본 다도의 흉내를 내는, 그래서 마치 다도를 하면 무슨 대단한 사회적 지위의 상승이라도 이룬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도리어 차문화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였다. 일본 다도를 우리의 다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동안 전문 차인들의 무식을 폭로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한국인의 차의 법도는 우리 생활과 몸속에 DNA처럼 내장되어 있다. 우선 형식보다는 즐겨 먹다 보면 저절로 드러나고 형성된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이번 행사에 고대의 천지인 사상을 찻자리에 실현하려고 한 ‘조선의 찻자리’ 같은 것은 땅(모래밭, 차밭)과 하늘과 사람(차인)들이 하나가 되는 자리였다. 이것은 매우 고무적인 행사였다.
그러나 앞으로 축제의 문화예술 공연에서도 지역민들이 공연기획은 물론 ‘차 이야기’의 스토리텔링에도 적극 참여함으로써 차 문화가 공중에 뜬 전시행사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농민들이 단지 차를 생산하여 공급하는 농투성이가 아니라 차문화를 이끌어가는 주역이 되어야 토착화되고 생활화된 차문화 발전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 풍속사와 지역 민속, 지방사 등 지방문화의 특성과 연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결과적으로 차 산업과 차 문화가 혼연일체가 되어 서로 생산적으로 자리매김하여야 하는 과제를 남겨두고 있다.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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