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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37> 권태

눌재 2011. 8. 12. 17:00

 

[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37> 권태<세계일보>
  • 입력 2011.08.09 (화) 21:22, 수정 2011.08.10 (수) 01:10
권태는 싫증이 아닌 각성… 자아에 대한 성찰의 시작점
  • 권태, 자신을 향해 눈뜨는 순간

    어떤 일이나 상태에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을 ‘권태(倦怠)’라고 한다. 이 말은 배고픔이나 슬픔과 같이, 굳이 설명을 붙일 필요도 없는 감정의 어느 끝 지점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어떤 일이나 관계에 대하여 권태를 느끼는 일을 두려워하거나 벗어나려는 경향이 있다. 권태를 피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권태를 자각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시인 이상(李箱)은 1937년 조선일보에 발표한 수필 ‘권태’에서 권태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읽어 내려가다 보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 정도로 졸리고 권태로워지는 글이다. 이상은 평안남도 성천에 잠시 머물면서 도시의 빠른 속도에서 벗어나 농촌의 느리고 균일한 색과 속도에서 처절하게 권태를 느낀다.

    도시 속 현대인의 지루한 일상과 권태를 그린 알랭 들롱, 모니카 비티 주연의 ‘태양은 외로워’(1962).
    처음엔 사랑하였으나 닷새가 지나지 않아 싫증난 신선한 초록색 벌판을 바라보며 그는 ‘오늘이라는 것이 내 앞에 펼쳐져 있으면서 무슨 기사라도 좋으니 강요한다. 나는 무엇이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에 시달리지만 결국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그는 그렇게 “끝없는 권태가 사람을 엄습하였을 때, 그의 동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리라. 그리하여 망쇄할 때보다도 몇 배나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고 쓰고 있다.

    그렇게 권태는 자신을 보는 눈을 뜨게 해 준다. 알베르 카뮈 역시 ‘시지프의 신화’에서 권태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며, 자신의 생각 밑바탕에 깔린 실존적인 성찰의 계기로 풀고 있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권태는 기계적인 생활의 여러 행동이 끝날 때 느껴지는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의식이 활동을 개시한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권태란 어떤 상황이나 사물이나 관계에 대한 싫증일 뿐 아니라, 세상과 관계와 나아가서 자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수반한다는 깊은 의미가 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권태라는 말이 알레만 지방의 독일어에서 ‘향수를 지님’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에 주목하였다. 권태 속에서 사람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며 향수를 지닌다. 여기서 고향은 곧 존재다. 향수라는 것은 오늘날 인간에게 존재가 망각되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저서 ‘형이상학의 근본개념’에서 권태는 ‘표면적 권태’와 ‘깊은 권태’가 있다고 했다. ‘깊은 권태’란 본래적 권태이며 이것은 아무리 비본래적인 일상생활에 몰입해보아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천형과 같은 것이며, 오로지 ‘실존’ 즉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야만 해결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자신의 고유한 존재 가능성에 스스로를 돌이키는 그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 하이데거는 이 ‘순간’을 현존재의 본래적 시간이라고 말한다.

    즉 권태란 그냥 익숙함에서 오는 기계적인 싫증뿐 아니라 실존을 잃었을 때 찾아오는, 하나의 철학적인 결핍의 상태이다. 깊은 권태는 인간 현존재의 시간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권태에 빠진 모든 인간이 철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깊은 권태는 우울증처럼 인간존재를 사로잡고 절대적인 고독으로 이끌어간다. 

    영화 ‘태양은 외로워’의 한 장면. 권태는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과, 관계와, 자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불러일으킨다.
    영화에 눈뜨게 한, 내 인생의 영화


    ‘태양은 외로워’(The Eclipse, 1962)의 DVD를 지난주에 마침내 샀다. 달랑 한 장의 DVD가 들어 있고 가타부타 설명도 없고 심지어 그 흔한 예고편 하나 없는 야박한 이 DVD를 사면서 상당히 감격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우연히 TV에서 보고 ‘저 영화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막연한 생각에 감동을 받은, 말하자면 ‘내 인생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요령이 없어서 구하려고 해도 구해지지 않더니, 우연히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태양은 외로워’를 쳤다가 발견하여 드디어 사게 된 것이다.

    중학교 1학년 때 남들은 우표도 모으고 곤충도 모으고 오만 취미가 다 있는데, 나도 그런 취미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 끝에 집에 오는 신문에 나오는 만화를 모으자, 그런 결심을 했다. 시사만화를 보다보니 자연히 정치기사로 연결되고 정치기사를 읽다보니 신문 2면 귀퉁이에 나오는 가십을 열심히 탐독하게 되었다. 정치의 이면사에 관심을 가지다보니 좀 더 상세한 기사가 궁금했고 그래서 당시 심층취재와 정치가십 기사가 많았던 ‘주간조선’을 구독하자까지 가게 되었다.

    ‘주간조선’에는 그런 기사들 외에도 한 구석에 주말의 명화에 대한 정영일 칼럼이 있었다. 그는 1970년대에 한국 영화평론의 새 장을 연 평론가이다. 영화가 지금처럼 다양하게 개봉되는 것도 아니고 정보라는 것도 아무리 뒤져도 나오는 것이 없던 시절이다 보니, 그에게서 짤막짤막 나오는 영화에 대한 촌평들은 복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당시 텔레비전에서 해주던 ‘명화극장’의 안내도 맡고 있었다. 약간 촌스러운 성우들의 더빙에 옛날 분위기의 고색창연한 색상에 딱 졸기 좋은 그 영화들을 정영일은 냉정하게 평가하고 “봐라”, “보지 마라” 하고 분명하게 갈라주었다.

    ‘태양은 외로워’는 지루한 일상 그 자체인 영화다.
    아마 별 몇 개 하는 평점을 주는 것도 그때가 시초였던 것으로 아는데, 그가 영화들을 모두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늘 무 자르듯이 단호하게 별을 매기고 대부분 야박하게 ‘까이고’ 있었다. 별 다섯 개를 받는 영화는 아주 가끔 나오고 대부분은 세 개 정도였다. 심지어 어떤 영화는 노골적으로 보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가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는 영화가 있었는데 ‘태양은 외로워’가 바로 그런 영화였다. 별을 다섯 개 주고는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 영화라고 했다. 어쩌겠는가 봐야지…. 1974년 어느 주말 밤에 나는 뉴스가 끝나고 연속극이 끝나고 식구들이 모두 자러 들어갔는데도 홀로 남아 명화극장이 시작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요란한 음악과 함께 영화가 시작되었다. 이 영화는 이탈리아의 명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1962년에 만든 영화이다. 원제는 ‘일식(The Eclipse)’이지만 당시 알랭 들롱 주연의 ‘태양은 가득히’(Purple Noon, 1960)가 크게 히트하면서 비슷한 제목을 가져다 붙였다. 시끄럽고 복잡한 증권거래소에서 일하는 피에로라는 남자와 빅토리아라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이 영화에서는 젊은 시절, 정말 꽃 같이 잘 생겼던 시절의 알랭 들롱을 볼 수 있고, 차갑고 이지적이며 육감적인 모니카 비티라는 여배우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사건이나 줄거리는 볼 수 없고, 대신 엄청난 양의 졸음과 권태를 만날 수 있다.

    일상에 대한 큰 집착이나 사람에 대한 애정이나 관심이 별로 없어 보이는, 매사에 심드렁한 빅토리아는 어머니를 만나러 증권거래소에 찾아간다. 그리고 사람들에 쓸려 다니다가 그 안에서 잠시도 머물지 않고 활발히 움직이는 피에로를 보게 된다. 마치 카프카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둘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이내 만나는 사이가 된다. 만나고 헤어지고…. 서로에 대한 별다른 감정도 없이 그냥 다른 궤도를 달리는 두 개의 열차처럼 겉돌면서 지낸다. 그러다가 둘이 만나기로 한 어느 날 두 사람은 모두 그 장소에 나타나지 않고 도시에는 일식이 온다. 낮에 해가 가려져 어두워지고 가로등이 켜진다. 마지막 10여 분 동안 끝내 주인공은 나타나지 않고 영화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계속 비쳐진다.

    영화 속에는 통속적이고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아주 평범한 형식이 들어 있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면 아무것도 없는 커다란 공백이 있다.

    건축가 김헌의 서울 홍대 앞 ‘청원제일주유소’는 일상의 풍경 속에서 익숙한 것에 대한 각성을 상징한다.
    권태, 익숙한 것에 대한 각성


    처음 보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엄청나게 졸았다. 마치 수면제를 먹은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지루한 일상 그 자체인 영화…. 첫 장면부터 영화는 권태의 끝을 보여준다. 삶의 권태에 젖은 주인공들의 저 표정과 침묵, 그리고 흐린 흑백 화면, 중성자탄을 맞은 것처럼 살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는 거리…. 도저히 졸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영화이다.

    도무지 영화 내내 사건이라곤 없다. 빅토리아가 첫 장면에 어떤 관계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오래 사귀었던 사이로만 추정되는 남자와 헤어지는 것, 피에로의 자동차를 어떤 술 취한 사람이 몰고 도망가는 것, 어머니가 증권거래를 하다가 돈을 모두 날리는 것…. 일상적인 영화라면 그 사건만으로도 엄청나게 극적인 장면을 짜냈을 텐데, 도통 그런 것 없이 영화는 그런 사건의 빌미들을 그냥 흘려보낸다.

    영화는 아주 무심하기 그지없는 자세로 마치 “인생에서 그런 건 아무 의미 없는 일이야, 중요한 것은 삶이야!” 하는 것처럼 그냥 시간을 흘려보낸다. 우리는 무언가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기다리고 기다리며 꾸벅꾸벅 졸다가, 결국은 가물거리는 우리의 의식을 만나게 된다.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그 권태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권태를 만나는 순간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이 열리고 새로운 국면이 시작된다. 권태는 익숙한 것에 대한 싫증이 아니라 익숙한 것에 대한 각성이다. 익숙함이라는 껍질 안에서 내용들은 서서히 굳어지고 증발되어 결국 속이 텅 빈 쭉정이가 되어버리는 것이고, 권태는 그런 형식만 남은 ‘익숙함’에 대한 각성을 부른다.

    지루할 정도로 반복적이고, 그렇기에 무심할 수밖에 없는 도시라는 일상의 풍경 속에서 건축을 각성시키는 태도로 임하는 건축가가 있다. 건축가 김헌은 “건축은 시간을 견디는 사건”이고 그것은 인식을 견디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매번 새로운 사건, 새로운 매력을 경험하게 하고, 매번 새로울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주는 게 건축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청평 호숫가의 ‘피넘브러(penumbra)’, 헤이리의 ‘이비뎀(ibidem)’, 홍대 전철역 앞의 ‘청원제일주유소’ 등 김헌 표 건축은 건축에 대해 관심이 없는 누구라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그가 계획한 건축들은 늘 일상적인 직교 좌표에서 벗어난다. 삐딱한 형상과 모호한 기능, 고정되지 않은 연속적 흐름을 갖는 공간들을 둘러싼 콘크리트나 금속성의 이질적 표피들을 갖는다. 건축만큼이나 그가 구사하는 언어 또한 난해하다.

    “우리를 둘러싼 사물이 일관된 질서와 연속성을 지닌 채 흐름을 이어가고, 인간의 의식은 맑고 뚜렷한 장 속에서 많은 부분이 파악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섣불리 갖고 작업에 손을 대는 것은 아닐까. 이 같은 회의감의 실체를 들춰내기 위해 문득 건축이 인간의 의식에 대고 행사하던 힘을 될 수 있는 한 많이 빼앗고 싶다는 충동에 자주 사로잡힌다. 그럼으로써 최소한의 의식 흐름의 비연속성과 모호함을 인정하고, 동시에 건축이 그려내는 사물을 이로부터 철저하게 차단하여 본래의 좌표축에 놓고 이야기의 흐름을 냉엄하게 지켜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일종의 무위성이 짙은 공간이 지배적일수록 비로소 무의식과의 교감을 위한 통로가 열리고 추상성의 활약을 위한 여지가 확장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다.”(김헌, ‘C3 Korea 2001년 6월호’에서)

    그렇게 견고하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도시 속에서 권태로운 일상을 깨우는 긴장감을 선사하고, 새로운 경험에 눈뜨도록 유도하는 건축은, 존재에 대한 건축가의 고민이 도달할 수 있는 또 다른 영역을 보여주는 지점이다.

    가온건축 공동대표·‘이야기로 집을 짓다’ 공동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