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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화 명작 기행] 세속과 理想 두 눈으로 바다 저편 영원을 보다

눌재 2013. 8. 23. 14:59

[풍경화 명작 기행]   세속과 理想 두 눈으로 바다 저편 영원을 보다

입력
2010-11-19 17:53:18
수정
2010-11-20 01:52:08
 
● 獨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뤼겐의 백악절벽'

고독했던 노총각 화가의 허니문…인생이라는 고단한 바다 헤치고 영적 세계로 향하는 두사람 표현
낭만적 색조에 명상적 분위기 '충만'

지난 여름 바쁜 틈새를 비집고 제주도에서 겁 없이 사흘을 보냈다. 제주도에 간 건 삼다도의 아름다움을 보려했던 게 아니라 숨가쁜 두뇌운동을 잠시나마 멈추고 구석에 틀어박혀 그냥 먹고 자고 여름 베짱이가 돼보자는 심산이었는데 단지 그 장소가 제주도였던 것뿐이었다.

행복한 베짱이는 마지막 날 아침 잠시 게으름을 털고 성산 일출봉에 올랐다. 정상에 오르고 보니 일출 구경은 언감생심.벌써 중천에 뜬 해님이 혀를 날름 내민다. 부끄러운 얼굴을 가리고 정상을 내려오는데 어라 바다가 내게 말을 걸어온다. 그날따라 바다는 고요했다. 저 멀리 작은 어선이 잔잔한 수파 위로 하얀 발자국을 남기며 미끄러진다. 까치발로 녀석의 뒤를 밟던 내 마음은 어느새 천연덕스럽게 배 위에 올라앉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구름이 포물선을 그리며 푸른 하늘을 사랑스럽게 감싼다. 순간 내 눈 앞에는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아름다운 풍경화 '뤼겐의 백악 절벽'이 오버랩된다.

일곱 살에 어머니를 잃고 뒤이어 누나와 동생을 차례로 잃어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낸 프리드리히는 열여섯살 때 처음 그림에 입문한다. 이때 스승인 키스트로프를 통해 알게 된 종교학자 코스가르텐으로부터 "자연은 신의 계시다"라는 가르침을 받게 되며 풍경화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1794년 그는 명문 코펜하겐아카데미에 입학,낭만파 화가인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로렌첸과 젠스 주엘의 지도를 받는다. 두 스승은 독일의 낭만주의 운동인 '질풍노도운동'에 깊이 발을 담그고 있었는데 이들의 그러한 성향은 프리드리히의 낭만적 기질과 어울려 그의 화풍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1798년 드레스덴으로 이주한 프리드리히는 틈틈이 인근의 뤼겐을 비롯한 독일 북부 지역을 여행하며 자연과 대화를 나누고 숭고한 경관들을 스케치한다. 그는 차츰 신비적 경향의 풍경화가로 명성을 쌓아나가게 되는데 그의 풍경화는 종전의 화가들처럼 자연을 단순히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에 비친 자연의 시각적인 인상과 명상을 통해 얻은 정신적 느낌을 결합한 것이었다. 그의 이런 창작태도는 화가는 단순히 대상의 외형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접했을 때 분출하는 감동을 대상을 빌려 표현하는 것('의경'이라고 한다)이라는 동양화의 목표점과 통하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그는 명상적이고 신비적인 느낌을 강화하기 위해 본래의 풍경을 대칭적으로 재배열했고 기하학적으로 표현했다. 이를 통해 감상자들에게 일종의 정신적,종교적 충만감을 안겨주려 했다. 그러나 이런 그의 본질적 의도는 대중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고 그는 한낱 호사가들의 기벽을 충족시켜주는 신비주의 화가로 비칠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토록 원했던 대학교수직을 평생 얻지 못했다. 그의 작품이 너무나 개성적이고 전통적인 회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어서 학생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긴 어렵다는 게 이유였다. 그렇게 그는 세상의 몰이해 속에 고독과 가난을 벗하며 힘겹게 이승의 고통스러운 바다를 건넜다.

방랑벽이 있어서였을까,아니면 그림에 먼저 마음을 주었기 때문일까. 이 불운한 노총각은 마흔 다섯이 돼서야 가정을 꾸린다. 20년 연하의 염직공 집 딸을 아내로 맞은 그는 작품을 위해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뤼겐섬으로 허니문을 떠났다. 드레스덴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발틱해 연안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 뤼겐은 독일에서 가장 큰 섬으로 이미 18세기부터 여름 휴양지로 명성이 자자했다. 섬 동남쪽의 자스문트국립공원은 기암괴석의 눈부신 백악 절벽으로 유명하다.

프리드리히는 사랑스러운 신부 카롤리네 봄머를 이 백악 절벽지대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안내했다. 화가는 그녀와 손을 맞잡고 새하얀 백악 절벽 너머 전개된 발틱해를 바라보면서 인생과 결혼의 의미에 대해 바다와 무언의 대화를 나눈다. 명작 '뤼겐의 백악 절벽'은 사랑의 기쁨으로 충만한 가운데 대자연과 나눈 대화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신혼의 단꿈에 젖은 덕분일까. 대화의 결과는 눈부시게 아름답다.

화면의 구도를 보면 두 그루의 나무가 액자 테두리처럼 화면을 하트 모양으로 감싸고 있다. 풀밭이 무성한 하트의 아래쪽에는 세 명의 인물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앉아 있는데 맨 왼쪽의 붉은 색 옷을 입은 젊은 여인은 신부인 카롤리네다. 그녀의 시선은 백악 절벽 아래로 향하고 있다. 무엇인가를 발견한 듯 오른손으로 그곳을 가리키고 있다. 그곳은 인간세상을 상징한다.

그 오른쪽의 인물은 세속적 존재로서의 프리드리히로 그는 혹시라도 미끄러질까 두려워하며 땅에 엎드려 신부가 가리키는 곳을 내려다보고 있다. 오른쪽의 젊은 남자는 이상화된 존재로서의 화가 자신의 모습으로 팔짱을 낀 채 멀리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그는 아슬아슬하게도 마른 나무 둥치에 기대어 있는데 위험을 무릅쓰는 젊은 패기로 충만해 있다.

세 사람 뒤로 망망대해가 전개되어 있고 청색,분홍,보라,회색의 잔잔한 수파 위에는 두 척의 돛배가 대양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프리드리히에게 바다는 인생의 험난한 여정을 상징하며,그 위를 헤쳐나가는 두 척의 돛배는 바로 자신과 아내의 인생이다. 그 배가 향해 나아가는 곳은 영적인 세계다. 얼핏 보면 신혼의 낭만적인 정서로 가득한 산뜻한 색조의 그림이지만 영원의 세계를 지향하는 명상적인 분위기가 결합되면서 화면에는 어떤 풍경화에서도 찾기 어려운 정신적 충만감이 넘쳐흐른다. 팍팍한 현실 위에 배를 띄운 우리들에게 프리드리히는 구원의 희망을 전한다. 그의 풍경화가 이 시대에 유난히 빛을 발하는 이유다.

정석범 < 미술사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