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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화 명작기행] 베일에 싸인 페르시아 풍광, 참신한 구도와 색채로 묘사…서구인 모험정신 생생히 기록

눌재 2013. 8. 23. 15:11

[풍경화 명작기행]   베일에 싸인 페르시아 풍광, 참신한 구도와 색채로 묘사…서구인 모험정신 생생히 기록

2011-08-12 17:27:08
수정
2011-08-13 02:36:30
쥘 오귀스트 조셉 로랑스의 '반(Van) 절벽'

佛학자 동방 탐사 동행, 데생 1000장에 낱낱이 수록…오리엔탈리즘 회화 쏟아내
붉은색톤 석회암 절벽, 우뚝 솟은 견고한 성채…푸른 하늘과 대비 절묘

베일에 싸인 페르시아는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으로 아랍 세계의 빗장이 열렸을 때도 유럽인들에겐 여전히 전인미답의 처녀지로 남아 있었다. 동양문화에 매료된 화가들은 물론 학자들로 조직된 학술탐사대 역시 지중해 주변만 맴돌 뿐 소아시아(터키) 고원을 넘어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페르시아까지 나아간 경우는 드물었다. 험준한 지형이라는 장애물과 함께 기독교도에 대한 배타성이라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메르 드엘(1812~48)이라는 프랑스 학자가 페르시아 탐사에 나섰을 때 사람들은 만용이라고 여겼다. 위험천만한 탐사 대열에는 쥘 오귀스트 조셉 로랑스(1825~1901)라는 젊은 화가도 끼어 있었다. 다소 생소한 이름의 이 화가는 주로 동방의 풍경과 풍물을 주로 그렸던 인물로 지명도는 떨어지지만 솜씨는 대가 뺨칠 정도였다.

로랑스가 신세계로 나아간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에 이뤄졌다. 몽펠리에의 국립미술대학(에콜 데 보자르)에 다니던 그는 이 학교 재학생이면 누구나 꿈꾸는 로마대상을 거머쥠으로써 로마 유학의 야망을 이루려 했다. 그러나 현실을 생각만큼 만만치 않았다.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젊은 지질학자인 드엘이 손을 내밀었다. 촉망받는 과학자였던 그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당시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오토만제국과 러시아,페르시아에 대한 과학적 탐사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때 로랑스를 탐험의 과정을 기록할 수행 화가로 위촉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1846부터 3년간 동유럽 그리스 터키 및 페르시아 일대를 여행하게 된다.

드엘 일행이 쿠르디스탄의 북쪽인 반(Van)호수 주변에 도달한 것은 1847년 11월3일이었다. 화가의 눈에 호수 남쪽의 깎아지른 절벽과 그 정상에 자리한 붉은색 어도비 벽돌(진흙과 짚을 섞어 만든 벽돌)로 쌓아올린 성채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즉시 이 경이로운 풍경을 스케치북에 담았다.

페르시아의 산악지대인 쿠르디스탄은 전통적인 쿠르드족의 근거지로 지형은 험준하지만 풍광은 서유럽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천혜의 절경이었다. 전통적으로 페르시아 영토에 속했지만 고유 문화에 대한 자존의식과 독립에 대한 집착이 유난히 강해 정치 지도자들에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드엘 일행은 1848년 2월9일 외부 세계와 단절돼 있던 이란의 테헤란에 도달했고,사파비왕조의 수도였던 이스파한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야심찬 탐사는 뜻밖의 파국을 맞는다. 선천성 약골로 툭하면 앓아누웠던 드엘이 이번엔 콜레라라는 치명적인 질병에 감염된 것이다. 결국 그는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이 해 8월29일 이역만리에서 최후를 맞는다. 그의 나이 겨우 36세.재능 많은 젊은 학자의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로랑스는 이곳에 좀 더 머문 후 이듬해 드엘이 남긴 탐사 노트와 유품을 가지고 파리로 돌아온다. 이 자료들은 부인에 의해 정리돼 페르시아 지역의 지질학과 광산학 및 인류학적 연구에 선구적인 업적으로 남게 된다.

파리에 돌아온 로랑스의 손에는 무려 1000장이 넘는 데생 뭉치가 들려 있었다. 답사지의 풍경과 풍물을 기록한 것들이었다. 페르시아 탐사 이후 화가로서 로랑스의 생애 상당 부분은 이 데생들을 화폭에 옮기는 일로 점철됐다. 그는 1850년부터 1891년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살롱전에 페르시아를 비롯한 동방 세계의 베일에 싸인 풍광을 출품해 당대 최고의 오리엔탈리즘 화가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반의 절벽'은 쿠르디스탄의 반호수가에 우뚝 선 석회암 절벽과 그 위에 지어진 성채를 푸른 하늘과 대비시켜 묘사한 수작이다. 참신한 구도가 눈길을 끈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산과 우뚝 선 성채를 우측에 꽉 차게 배치한 구도의 쏠림이 인상적이다. 특히 바위산 가운데의 동굴로 이어지는 성벽을 전면에 클로즈업시켜 후면의 절벽,왼쪽 아래의 시가지,그 뒤의 반호수와 강한 대조감을 유발하고 있다.

이런 전경과 후경의 극단적인 대비 및 클로즈업 기법은 당시 화단을 풍미한 인상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한 구도의 하나로 에도시대 일본 판화에서 영향받은 것이다. 이 작품을 스케치한 것이 1847년이고 당시에는 인상파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이 작품은 원래의 스케치를 토대로 1880년 그가 그림을 그릴 때 변형한 것이 틀림없다. 국립미술학교의 보수적인 전통을 계승한 로랑스로서도 시대의 기운을 거스를 수는 없었으리라.

인상주의자의 영향은 빛의 효과에 주목한 점에서도 드러난다. 감상자들은 눈부시게 빛나는 바위 표면을 바라보는 순간 강한 자외선의 존재를 느끼게 될 것이다.

색채의 구사에서도 대상의 색채를 액면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화면의 전체적인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 작가가 임의로 색채를 조율하고 있다. 화면의 색채를 붉은색과 청색 두 가지 톤으로 단순화시켰다든가 왼쪽의 호숫가 산들을 푸른색으로 묘사한 점에서 그런 작가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짙은 청색의 하늘은 페르시아에서만 생산되는 청색 안료인 회회청(回回靑)을 연상케 해 이국적인 느낌을 강화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로랑스의 풍경화는 근대 여명기 동방으로 눈을 돌리던 서구인들의 개척정신을 생생하게 기록한 것이다. 드엘처럼 탐구심으로 무장한 모험가들이 근대 서구인의 물리적 지평을 확장했다면 인상주의자를 비롯한 예술의 전위는 미술의 새로운 텃밭을 일궜다. 그들이 있었기에 서구인은 지난 한 세기 물질적,정신적 풍요의 달콤한 과실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한 점의 풍경화는 우리에게 참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것은 시대와 인간 삶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다. 그것을 읽어내고 그 속에서 삶의 지표와 기쁨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 미술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