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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성당을 배경으로 선 촌스런 나그네들 1.피에트로 성당
피에트로보다 베드로라는 한국적인 이름이 훨씬 더 부드럽다. 생선가게 하는 기독교 신도는 베드로라는 명칭을 많이 쓴다. 그의 직업이 그물질하는 어부였기 때문이다. 갈릴리 해변에서 그물질을 해서 물고기를 잡아 먹고 살았다. 한국식 음역대로라면 서양에서는 베드로 여인숙이라해도 될 것 같은데 사실은 피에트로, 페트로, 피터 등으로 발음하니 어려울 것 같다. 바티칸은 베드로성인이 순교한 로마의 여러 언덕 중의 한 언덕 이름이다.
베드로는 Fisher라는 이름을 한 산악인 같다. 그는 바다가 아닌 언덕 위에서 죽었고 그것도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 그러나 그는 순교해서 사람의 영혼을 그물질을 해서 천국으로 인도하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꿈보다 해몽이 중요하다고 하니 따지지 말고 그냥 넘어가자.
성(性)스러운 여행을 끝내고, 성(聖)스러운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침 일찍 행장을 갖추고 나와 바티칸공화국을 들리기로 했다. 로마 북서쪽 언덕에 있는 가톨릭 교황청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초미니 국가로 면적이 0.44㎢에다가 인구는 1000명 정도 된다. 작은 것은 강하다는 것을 실존적으로 증명해주는 곳이 바티칸이다. 이 곳은 모든 세계에 퍼져 있는 많은 천주교신자들의 마음을 휘잡는 구심점이다. 신도들은 교황 성하(His Holiness)아래에서 고개를 숙인다.카톨릭의 메카(Mecca)가 바티칸(Vatican)이라면, 무슬림의 바티칸(Vatican)이 메카(Mecca)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티칸은 로마 여행의 최고 정수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이 성당은 하늘에서 보면 십자가 모양이고 앞에 베드로 광장과 함께 보면 열쇄 모양이라고 한다. 예수께서 제자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쇄를 맡긴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베드로는 앞에서 언급한 네로에게 순교를 당했는데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과 똑 같이 죽을 수는 없으니 거꾸로 매달려 죽겠다는 그의 원대로 거꾸로 매달려 죽은 것이다.
주위를 좀 살펴보다가 성(聖) 피에트로(베드로) 성당으로 들어갔다.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객들, 성지순례 온 신부, 수녀, 카톨릭 신자들도 눈에 많이 띈다. 천주교도들에게 성지순례의 가장 으뜸인 곳이 바티칸이다. 여기에서 단순한 눈치로도 예술의 극치를 만날 수 있다. 세계 최고의 성당이라 할 수 있는 피에트로(베드로)聖堂을 천천히 음미해 보면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역사를 살펴보면 서기 313년에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된다. 그리고 12년 후 325년에 니케아 종교회의가 열려 삼위일체(三位一體)로 기독교의 교리가 통일하게 되면서 기독교의 교세는 급성장한다. 따라서 교회의 힘이 커지면서 수반인 교황의 힘은 점점 더 강해져서 기존의 왕권과 대립하기 시작된다. 이렇게 천년의 세월이 흐른다. 그러다가 14세기 초 교황이 로마에서 쫓겨나 프랑스의 남부 아비뇽에서 70년을 머문 사건을 ‘아비뇽 유수’라고 한다.
이 때 로마 교황이 자리를 비운 동안 새 교황을 뽑아 ‘아비뇽의 교황’과 ‘로마의 교황’이 서로 '진품이냐 짝퉁이냐'를 놓고 싸웠다. 이렇게 교권(敎權)이 땅에 떨어져 교회는 타락했으며 교황들이 싸우는 동안 王權은 점점 강해져서 성장일로를 달렸다. 당연히 종교계에서는 빨간불이 켜졌다. 이 당시 교황이 레오10세인데 땅에 떨어진 교권을 회복하고 멀어져 가는 백성들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서 새롭고 신선한 종교적 이슈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바티칸의 언덕 위에 성스럽고 아름다운 성당을 지을 것을 천명하였다. 교황 레오10세는 친서를 유럽 각국에 보내서 협조를 요청하였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 금화와 돈을 보내왔다.
1506년 교황 율리우스2세가 건축가 브라만테에게 명하여 현재의 모습대로 개축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기초 말뚝을 박은 것이다. 이후 부라만테, 라파엘로, 미켈란젤로와 그의 제자들 같은 많은 건축가들의 손끝을 거쳐서 1626년 교황우르반 8세 때 완공되기까지 120년이 걸렸다. 베드로 성당을 개축 공사 진행 동안의 경호를 위해 1505년 교황 율리우스2세와 스위스 쮜리히, 루체른 주 사이에 용병파견 계약을 맺으면서 최초 150명이 교황청에 파견되어왔다. 이것이 교황청 용병의 역사의 시작이기도 하다.
베드로성당은 세계적으로 호화의 극치를 자랑하고 있어 유럽 각국에서 갹출(醵出)한 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래서 교황 레오10세는 자금조달을 어떻게 할 것인가로 골몰하다 만들어낸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작품이 ‘면죄부’였다. 흥진비래(興盡悲來)처럼 그 면죄부판매 사건은 그 동안 곪고 곪았던 종교계에 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다. 종교개혁으로 기독교계가 이분화되는 반대급부를 치뤄야 했다.
면죄부판매 반대를 기치로 들고 일어선 마르틴루터의 95개조의 반박문을 필두로 기독교계가 구교(카톨릭)와 구교를 반대하는 반대자인 신교(프로테스탄트)로 갈라져 100년 가까이 유럽을 피의 바다로 만들었다. 하느님 말씀은 한가지인데 그들은 서로 다른 해석으로 서로에 맞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싸웠다.
여기에서 종교는 초월적인 것이 아니고 초법적인 것도 아니었다. 종교의 오류는 우리의 삶 속에서 만나는 그런 오류들과 대동소이하다. 역사상 종교의 대표적 오류는 이런 면죄부 판매, 십자군전쟁, 천동설, 마녀재판 등이 있다. 종교가 자기정화(自己淨化) 노력으로 개선되기도 하지만 끝내 잘못된 대세(大勢)를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사실 구교에서 신교가 서로간 의견의 일치를 못 보고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간 것이다. 이것을 보면 종교라는 것도 어느 정도 인간의 이데올로기로 다시 포장될 수 있는 것 같다.
하여간 역사는 많은 교훈을 준다. 우리도 대원군의 무리한 경복궁 중건으로 국고를 탕진하여 역사의 전환점을 만드는데 일조하지 않았던가! 베드로성당에는 인류 역사의 걸작들이 다 모여있다. 대리석을 마치 떡 주무르듯 한 미켈란젤로의 대표작인‘피에타상’은 섬세하고 조형미 넘치는 작품으로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그는 화가 조각가 건축가였다.
베드로 성당 전망대에서 바라본 베드로 광장 걸어서 돔형의 전망대까지 올라간다. 이 돔은 미켈랄젤로가 설계했다. 전망대에는 묵주와 성물 엽서를 파는 곳이 있다. 여기에서 묵주와 성구를 팔고 있는 한국수녀님을 만났다. 독실한 신자인 선배는 묵주와 성구 금반지 등을 사는 것 같다. 필자도 물건값이 비싸지 않는 탓에 나무십자가 몇 개와 묵주 등을 샀다. 단순한 충동구매였다. 피에트로 성당은 너무 완벽해서 피곤하다. 압도하는 예술품과 장식을 오래 바라보는 것은 아주 피곤하다. 너무 완벽한 사람과 하루만 지내보라. 그것 또한 못할 짓이란 생각이 들 것이다.
2.바티칸의 경비병
바티칸의 경비병은 그 유명한 삼총사들이나 입었음직한 수려한 줄무늬 제복에 긴 장화와 챙이 넓은 모자를 비스듬히 쓰고 창을 들고 서있다. 바티칸의 경비병은 아직도 스위스 출신 젊은이들만 뽑는 전통이 있다. 스위스 산악지대에 사는 젊은이들은 예로부터 아주 용맹하고 성실하며 강건해서 프랑스의 외인부대의 단골 고객이었다. 유럽에서 그런 용맹한 스위스인 젊은이들을 용병으로 채용하는 전통이 있다. 18세기 프랑스왕 루이 16세 마리아 앙뚜아네트가 고용한 용병들은 튀를리 궁에서 왕을 호위하고 지키겠다는 계약 때문에 혁명군과 끝까지 싸워서 700명이 죽었을 정도로 지독했다. 스위스 용병이 온다고 하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칠 정도로 대단했다고 한다.
교황청이 스위스 용병을 고용한 것은 베드로 성당의 증축 공사 과정을 경호할 용병계약을 율리우스 2세가 스위스와 맺은 것에서 유래가 되었다. 스위스 근위병 창설일은 스위스 용병들이 로마에 도착한 1506년이라고 한다. 그들은 이후로 교황청 전체의 안전을 책임지고 교황과 고위 성직자들과 바티칸 경호를 맡고 있다.
교황청 스위스 경비병들은 스위스 국적을 가진 18~25세의 미혼인 가톨릭 신자들로서 키는 174이상 준수한 용모의 남자들로 스위스에서도 독일어를 사용하는 캔톤(Canton) 출신이어야 한다. 그 화려한 제복은 영광스럽게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했다는 설이 있다.
세계1차대전 영국군 용병으로 유명한 구르카족도 네팔의 산악지대 출신들이다. 시골이나 산골 출신들이 용감하고 일도 깔끔하게 잘 해서 ‘군대체질’이란 말을 많이 듣는다.
발걸음을 바꾸어 바티칸 박물관으로 간다. 이곳은 법왕의 궁전이라고 한다. 방만도 1400개에 이르고 미술품이 몹시 많다. 진귀한 보물과 거장의 예술품들이 수없이 많다. 그 소장품의 몇 십분의 일만 팔아도 피에트로 성당 하나 더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박물관과 미술관의 전시물과 그림을 오래 보는 것은 안력(眼力)이 많이 필요로 해서 힘들고 피로하다. 비전문가에게는 그렇고 그런 그림이 지겨우니 스치듯이 보고 지나가야지 완벽한 이해와 감상을 하려면 힘들다.
아! 여백(餘白)이 그립다. 오후에 피곤한 몸을 좀 쉴 겸 바티칸 우체국에 앉아서 엽서에 여백을 채우며 내가 살아 숨쉬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3.올림픽 유스호스텔
우리가 묵은 곳은 65년 로마올림픽이 열렸을 때 선수단 숙소로 쓰이던 곳이라고 한다. 이 숙소를 개조해서 유스호스텔로 만든 곳으로 다운타운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다.
집이 길가에 있어서 불면증환자들은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내내 자동차의 소음이 귀를 괴롭혔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루 꼬박 로마를 주유했다.
올림피아 유스호스텔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고 샤워를 한 다음 널찍한 나무 숲 속에서 메트리스를 깔고 요리를 만들어 와인을 마셨다. 넓은 정원 사람의 발길이 없는 곳에서 우리만의 작은 세계를 만든다.
제법 많은 양의 술을 마셨지만 豪飮, 快談이었다. 밤이 깊도록 그 동안 회포를 풀고 잠재워야 될 것이 많이 있었다. 하늘에는 별이 내리 비추고 풀벌레의 울음소리도 상큼하다.
/ 김규만 (한의사) transvill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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