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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 속 여성] 제임스 티솟 - 정원벤치사랑을 잃은 절망의 시기에 행복의

눌재상주사랑 2009. 4. 17. 00:19
[명화 속 여성] 제임스 티솟 - 정원벤치
사랑을 잃은 절망의 시기에 행복의 절정 추억
관련이슈 : 명화 속 여성
  • 제임스 티솟은 프랑스 낭트 출신의 화가로, 조국보다 영국을 사랑하여 19세기 말 런던에서 왕성히 활동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빛과 색감을 다루는 경이로운 테크닉 덕에 지금도 그의 작품은 사진의 생동감과 회화의 표현력 모두를 감상할 수 있는 좋은 케이스로 꼽힌다.

    다작(多作)을 남긴 그가 40여년간 혼자 소장했던 작품이 있다. 눈이 부시도록 꽃이 만개한 정원에 놓인 벤치에 아름다운 여인과 아이들이 봄날의 정취를 만끽하는 ‘정원벤치’다. 편안하게 벤치에 기대거나 앉아있는 이들의 모습엔 견고하고 충만한 행복감이 엿보인다. 누구나 꿈꾸고 지켜내고 싶은 단란한 가정의 풍경 바로 그 자체다.

    하지만, 관람객을 흐뭇하게 하는 그림의 이면에는 놀랍게도 화가 개인이 체험한 큰 슬픔이 배어 있다. 티솟의 연인이자 뮤즈였던 그림 속 여인, 캐슬린 뉴튼이 바로 그 슬픔의 주인공이다. 런던에서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하던 무렵의 티솟은 인근에 살던 캐슬린과 운명적으로 조우하게 되고, 첫눈에 상대가 자신의 반쪽임을 감지한 두 사람은 일사천리로 사랑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세간의 시선은 두 사람의 사랑을 곱게 보지 않았다. 캐슬린은 결혼에 실패하고 사생아 둘을 키우는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런던 사교계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화가가 애 딸린 이혼녀와 일으킨 스캔들은 뒷담화의 좋은 소재였다. 더군다나 스스럼없고 소탈한 성격의 캐슬린은 당시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뻔뻔스러운 부도덕의 극치로 여겨졌다. 티솟이 캐슬린을 모델로 남긴 수많은 작품 역시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혼당한 여자 따위를 그리는 화가’에 대한 초상화 제작의뢰는 점차 줄어들고 사교계 출입까지 제한된 데다 작품전시에도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창창했던 티솟의 앞길에 먹구름이 드리워졌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더욱 깊어졌고, 사랑의 깊이만큼 티솟의 예술적 감성 또한 더욱 충만해져 갔다. 그렇지만 캐슬린의 인생은 굴곡의 연속이어서 행복을 오랫동안 누리지 못했다. 당시 유행하던 폐결핵에 걸려 스물 여덟 꽃다운 나이에 인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들이 사랑한 지 6년째 되던 해였다.

    티솟은 캐슬린의 죽음 이후, 화가로서의 근거지였던 런던을 떠나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깊었던지, 혼령을 부른다는 강신술 모임에 나가기도 하였으며, 이후 구원과 영생에 대한 관심으로 기독교에 대한 작품활동에 몰두하기도 했다. ‘정원벤치’는 그녀가 사망하기 전 구상되어 사후에 완성되었는데, 절망의 순간에 행복의 절정을 추억하던 그의 심정이 어땠을지 감히 짐작하기 어렵다.
    심형보 바람성형외과 원장


    아름답고 달콤한 것이 사랑이지만, 때론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주는 것도 사랑이다. 이외수의 ‘뼈’에서 그랬듯, 살아있는 자라면 사랑이 다가오기를 기다릴 때, 사랑을 할 때에, 사랑을 잃은 후에 고통을 겪게 마련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사랑의 고통은 그 이름값을 오롯이 해내지 못하는 것 같다. 사랑의 아픔을 이해하는 사람은 더욱 강인해지고 성숙해지기 때문이다. 티솟 역시 말년의 종교화에 한층 성숙한 필치를 담아 이를 증명해냈다. 이는 사후에 그의 작품에 많은 이들이 찬사를 보내는 이유일 뿐 아니라, 모든 이들이 고통을 짊어지면서도 사랑의 마력에 빠져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심형보 바람성형외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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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09.04.16 (목) 18:38, 최종수정 2009.04.16 (목) 18: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