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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유산 답사기 ] 적멸보궁 가는길 - 오대산 적멸보궁

눌재상주사랑 2009. 5. 27. 21:14

[ 문화유산 답사기 ] 적멸보궁 가는길
김애경








여름이 끝을 향해 가는 9월 셋째 주 일요일.
매월 셋째 주 일요일이면 박물관회 답사가 있는 날이다. 지난 겨울, 논산 개태사와 쌍계사를 다녀온 후 봄과 여름을 다 지내고 올해 두 번째로 떠나는 답사길 이다.
아침 일찍부터 부산을 떨어 양재역 1번 출구에 도착했다. 답사 때면 항상 들러서 아침을 때우고 가는 던킨도너츠 집 앞에 와보니, 이런……. 도너츠 가게가 없어져 버렸다. 아쉬운 대로 편의점에 들러 삼각 김밥으로 요기를 때우고 물 한 병을 사고 버스가 도착하길 기다렸다. 곧 버스가 도착하고 우린 차에 올랐다.
낯이 익은 사람들과 함께 오늘의 답사지에 대한 자료를 받아들고 오대산으로 향했다. 두어 시간 모자란 아침잠을 자고 일어나니 버스는 이미 강원도 산하를 달리고 있었다. 머지않아 우린 오늘의 첫 일정인 오대산 사고지에 다다랐다.

오대산 사고지

인간에게 있어 역사를 무엇일까? 역사가 무엇 이길래 그 오랜 시간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역사기록을 보관하고자 그 많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은 것일까?
무엇 때문에 목숨을 바쳐가며 바르게 기록하려고 애를 쓰고, 무엇 때문에 쓴 것을 전화 속에서도 이리저리 피신해가면 그토록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한 것일까?
우리 민족이 왕조실록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때부터라고 하나, 고려왕조 실록은 전하는 것이 없어 그 내용을 알 수는 없고, 여러 번의 전란 속에서도 우여곡절 끝에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조선왕조실록뿐이다. 오늘 우리의 첫 일정은 바로 조선왕조실록의 5대 사고지 중의 하나인 오대산 사고지이다.
사고지까지 올라가는 길은 등에 땀이 살짝 베일 정도의 그리 험하지 않은 산길이었다. 20여분을 올랐을 때 쯤 아담하고 완고한 모습의 2층 누각건물 두 채가 눈에 띄었다.
첫 느낌이 좀 답답하다 할 만큼 두 건물이 붙어 있었는데, 앞의 건물이 사각(史閣), 그리고 뒤편의 건물이 선원보각(先原譜閣)이었다. 사각은 실록(實錄)을 보관하는 건물이고 선원보각은 선원보, 그러니까 왕가의 족보를 보관하는 건물이다.
조선왕조 때는 왕이 승하하면 바로 영의정이 주관하는 실록청이 설치된다. 실록청에서는 승하한 왕대의 사관들이 기록한 사초(史草)는 물론이요, 왕의 비서실격인 승정원일기, 춘추관 시정기를 비롯한 모든 관헌들의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실록을 편찬하게 된다. 이 점이 조선왕조실록이 다른 나라의 실록에 비해 역사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게 평가되는 점이라고 한다. 중국의 명왕조대에도 실록이 있지만 대체로 왕의 근황만을 기술한 것에 비해 조선왕조실록은 왕의 기록 이외에도 세시풍속과 천문기록까지 총망라한 방대한 자료를 포함하고 역사적, 문화사적으로도 매우 훌륭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렇게 편찬된 실록은 8부를 제작하여 내사고, 즉 춘추관 사고와 외사고(강화,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에 나누어 보관하게 되는데, 실록 편찬의 과정이 모두 끝나면 사초는 사관들의 직고(直告)를 보장하기 위해 세검정에서 물에 풀어버리는 세초(洗草)과정을 거치게 된다. 또한 당대의 임금은 절대로 자신대의 사초를 열람할 수 없었는데 이러한 비밀유지 장치가 있었으므로 올바른 역사기록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왕조대에 자신의 사초를 본 왕이 둘 있었다고 하는데, 바로 세종과 연산군이라고 한다. 그 둘이 무슨 연유에서 사초를 보고자 했는지는 부연하지 않아도 짐작될 만한 일이다.
건물의 형식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누각의 형태로 아래층은 실록을 거풍하던 곳이고 2층은 보관소라고 한다. 본래 건립당시(선조 39년, 1606년)에는 실록각과 선원각 건물 옆에 수호사찰로서 영감사를 지었으며 참봉 두 사람을 두어 관리토록 하였으며 승호군 60명, 승군 20명으로 하여금 사고를 지키도록 하였다고 하나 현재는 건물 두 채와 영감사만이 남아 있어 답사객을 맞이하고 있다.
일전에 역사교과서의 근현대사 부분의 기술에 대해 국방부가 이의를 제기하며 수정을 요청했다는 기사를 떠올리니, 이미 서슬이 퍼렇던 전제 왕조국가 시절에도 철칙으로 지켜졌던 일을 우습게보고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기술되기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한심스럽게 생각되었다.

월정사(月精社)

오대산 월정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 자장 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에 유학 중에 문수보살을 친견하게 되었는데, 그 때 문수보살께서 말씀하시길 “너희 나라 동북방에 일만의 내가 있으니 거기서 나를 친견하라.”하셨다고 한다. 그리하여 귀국하자마자 오대산에 임시로 초가를 짓고, 거기에 기거하면서 문수동자를 친견하고자 했으니 끝내 친견하지 못하고 입적하시고 만다. 그러나 그것이 계기가 되어 초가 자리에 월정사가 터를 잡게 된다. 이후 월정사는 상원사와 더불어 오대산을 지키는 대 사찰이 되고 한암스님, 탄허스님 등의 큰 스님들을 배출하게 된다.


월정사의 금당은 적광전(寂光展)이다. 슬그머니 금당 안을 들여다보니 1)지권인을 하신 비로자나불이 아닌, 2)촉지항마인을 하고 계신 석가모니불이 계셨다. 현판과 본전불의 부조화가 과연 의도한 바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으나 설마 스님들이 모르고 하신 일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촉지항마인 수인에 3)우견편단의 법의를 걸치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4)협시보살 없이 닫집 아래 조용히 자리하고 계셨다.
월정사는 1금당 1탑 양식의 절집으로 적광전 앞에 국보 48호로 되어 있는 팔각구층석탑이 있었다. 이 탑은 불국사 석가탑으로 대표되는 신라의 전형적인 탑 양식과는 다른 다각 다층탑으로 고려 초기에 가까운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2층으로 된 기단 위에 고임대석을 놓은 것이 특징인 이 탑은 9층의 탑신과 9개의 옥계석을 8각형으로 다듬어 올렸고 옥계석의 끝마다 풍탁을 달아 장식성을 주었으며 상륜부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우리나라 석탑은 본디 그 바탕을 목조건물에 두고 있어, 옥계석의 반전이라든가 층 끝 받침, 풍탁 등은 각각 목조건물의 기와의 반전, 서까래, 풍경을 본 뜬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석탑을 마주보고 있는 공양하는 보살상 또한 월정사 석탑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높은 보관에 목걸이 완철 등의 화려한 장식을 갖춘 보살상은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모습이 압권이다. 석탑 앞자리에 있는 보살상은 복제품이고 진품은 성보박물관 안에 보관 전시되어 있다.
월정사 경내에 있는 성보박물관은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해체 복원시 발견된 사리구를 비롯해 상원사 문수동자상의 복장 유물 등을 모아 전시한 불교박물관으로 그 안에는 공양하는 보살상 진품 이외에도 세조의 어의, 각종 불상, 사리구, 월인석보 등의 보물들이 가득했다.

상원사(上院寺)

상원사는 신라 성덕왕 4년(705년) 신문왕의 두 아들이었던 보천, 효명 태자에 의해 창건된 월정사 서북쪽 오대산 비로봉 중턱에 자리 잡은 암자이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진여원으로 태자 시절 두 왕자가 오대산으로 수행을 와서 머물던 것이 인연이 되어 신문왕에 이어 보위에 올라 후에 성덕왕이 된 효명태자의 발원으로 창건하게 되었다. 이후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세조의 원찰이 되기도 하는데, 그 때문인지 세조와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항상 그 죄의식 속에 살아가야했기 때문에 후에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세조는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침을 뱉는 꿈을 꾼 이후 피부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래서 전국의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질병 치료를 하던 중 이곳 오대산에 도착해 보니 계곡물이 맑고 깨끗하여 옷을 벗어 걸어두고 계곡에 들어가 몸을 씻게 되었다.
이 때 웬 동자승 하나가 나타나 등을 닦아준다고 하기에 맡겨두었더니 병자리를 골라 시원하게 잘 닦아주기에 세조가 등 위에 있는 동자승에게 “너는 나중에 어디 가서라도 임금의 몸을 닦아주었다고 하자 마라.”하였다고 한다. 그랬더니 이 동자승이 “너는 나중에 어디 가서라도 문수동자를 보았다고 하지 마라.” 하더란다. 그래서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니 아무자취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세조는 월정사를 창건한 자장율사가 그리도 친견하기를 고대했던 문수동자를 친견한 것이었다.
그 때 세조가 목욕을 위해 의관을 걸쳐 놓았다는 관대걸이가 지금도 상원사 입구에 그대로 보전되어있다.
세조에 얽힌 또 하나의 이야기는 세조가 상원사 법당에 부처님을 참배하러 들어가려는데, 난데없이 고양이가 나타나 세조의 어의를 물고 늘어지는 통에 의아하게 생각되어 들어가려다 말고 호위 군사를 시켜 법당 안을 살피게 하였더니 단종 복위를 노리는 자객을 찾아내어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고양이를 찾아 보은 하려 하였으니 찾지 못하여, 그 근방의 기름진 땅을 절에 내려 고양이의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고 하니 그 밭을 묘전(猫田)이라고 한다. 상원사 법당 아래는 세조를 구한 고양이를 기념하기 위한 고양이석상 한 쌍이 지금도 다소곳하게 자리 잡고 있다.

적멸보궁(寂滅寶宮)

우리나라 절 가운데는 불상을 전혀 모셔놓지 않은 데가 있다. 법당 안에는 단(壇)만 있고 속이 텅 비었으며 법당 밖 뒤편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사리탑을 봉안하여 놓은 곳이 있는데 이러한 곳을 적멸보궁이라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보배스러운 불전이란 뜻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으니 다른 불상을 모실 이유가 없는 셈이다.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적멸보궁이 다섯 곳이 있는데 그 기원은 자장율사에게서 찾을 수 있다. 신라 진덕왕 때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 가사와 사리를 받아와 우리나라의 가장 수승한 땅에 부처님 사리를 봉안하여 모셨는데 경남 양산 통도사에 부처님 가사와 사리를 모시고 금강 계단을 세웠다. 그리고 강원도 설악산 봉정암(鳳程庵),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강원도 영월 사자산 법흥사(法興寺)와 태백산 정암사(淨岩寺)에 사리를 모시고 적멸보궁을 지었다 한다.
적멸보궁을 향해 올라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게다가 잔뜩 흐리던 날씨는 더 이상 무게를 참아내지 못하고 빗방울을 떨구어 내기 시작했고, 땀인지 빗방울인지 모를 물기들 때문에 달라붙은 옷가지들이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발걸음에 무게를 더했다.
이미 적멸보궁을 참배하고 내려오는 처사와 보살들에게 얼마나 올라야 하는지를 서너 번 물을 동안 내 머리 속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쉽게 보여줄 수는 없다는 거군.” 하는 생각이 맴돌았다.
한 시간 남짓 구름이 안개처럼 낀 산등성이를 오르자 드디어 시야에 적멸보궁이 들어왔다.
화려한 연등이 법당 앞마당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상대적으로 어두컴컴한 법당 안에는 금빛 찬란한 단만 있을 뿐 부처님은 보이지 않았다. 부처님이 계셔야할 곳에는 빈 방석이 하나 놓여 있었고 광배 자리만 금빛이 반사되었다. 역시 적멸보궁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법당 뒤편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사리탑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얼른 법당 건물을 돌아 불단의 뒤편을 살펴보니 야트막한 구릉이 있고 그 곳 한 가운데 사리탑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만한, 소박하다 못해 투박한 탑이 하나 아무런 장식도 없이 세워져 있었다. 기대에 한껏 부풀어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참배하러 간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은 불경하게도 “에게게…….” “이게 뭐야?”였다.

 


그러나 그 곳에 모인 참배객들의 모습은 너무나 진지했다. 다들 저마다의 소망을 기원하며 연신 합장을 하고 절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들의 기에 눌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다소곳이 수그리고 그들의 표정을 보았다. 뭔가를 읊조리는 사람, 눈을 감고 돌부처처럼 굳어 있는 사람, 빗방울인지 눈물방울인지 모른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사람.
뭔가를 빌기에 이만한 기도처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그들의 진진한 표정에서 읽은 나는 얼른 자세를 바꾸어 나름의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아까의 불손한 언행에 좀 찔리는 구석이 있긴 했으나 너그러우신 부처님께서 다 용서하리라 믿고 열심히 빌었다.
땀과 빗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지만 또 하나의 답사기를 쓸 수 있다는 마음에 하산하는 발걸음은 마냥 가벼웠다. 이 꼴을 보시면서 부처님께서는 이러고 계시겠지. ‘에이그, 저 가볍디 가벼운 중생이여…….’

입력 : 2009.05.13 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