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의 문화 절정기,진경시대(최 완수편)
1.이념적 배경
진경시대라는 것은 조선 왕조 후기 문화가 조선 고유색을 한껏 드러내면서 난만한 발전을 이룩하였던 문화 절정기를 일컫는 문화사적인 시대 구분 명칭이라고 한다. 그 기간은 숙종(1675~1720)대에서 정조(1777~!800)대에 걸치는 125년간을 얘기하고 있다.영조51년의 재임 기간이 그 절정기이며 정조24년은 쇠퇴기라 할 수 있다.
조선 왕조는 주자 성리학을 국시로 천명하여 개국한 나라였다. 중국으로 부터 받아들인 주자성리학이 중국색을 지우고 조선에 와서 조선 고유의 주자학으로 뿌리를 내리는 데는 수많은 학자들의 노력이 따랐으나 그 중에 조선 성리학의 고유 이념을 창안해 낸 장본인을 본 글의 저자 최 완수님은 율곡 이이(栗谷 李珥)를 꼽고 있으며 그러한 이념을 창안할 수 있었던 것을 바로 앞 세대인 退溪 李 滉(1501~1570)이 주자 성리학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그 이념 체계의 요체인 理.氣에 대한 연구를 朱子 이상으로 진전 시켜놓았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주자 성리학이라는 것은 우주의 생성원리를 불변적 요소인 理와 가변적 요소인 氣의 상호 작용으로 보고,
인성과 물성이 모두 그에 의해 결정되니 부선억악(扶善抑惡)으로 인물의 성정을 다스려야 된다고 하는 유교 철학이다. 그런데 주자(朱子) 단계에서는 이기(理氣)의 상호 작용시에 불변적 요소인 理 자체도 기의 작용에 감응하여 변화 한다는 理氣二元論을 주장하는 데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자의 이기 이원론을 완벽하게 이해한 것이 퇴계이었다. 이에 대해 高峯 奇 大升같은 이가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여 이른바 四七理氣論으로 왕복토론을 전개한 것이 이러한 과정을 보여준 한 단면이라 할 것이다.
시대적으로 그러한 과정을 그치는 중에 율곡은 일찌기 금강산으로 출가 하여 불교대장경을 섭렵함으로써 주자성리학의 우주론적 철학 체계의 원형인 불교 철학을 근본적으로 관통한 실력을 바탕으로 퇴계의 이기이원론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理氣의 상호 작용시라 할지라도 氣만이 작동하고 理는 기에 편승할 뿐이라는 氣發理乘說을 주장하여, 만물의 성정이 氣의 변화에 따라 결정된다는 理氣一元論을 심화 시켜 놓았다는 설명이다.
결국 理는 만물이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인데 氣만 대상에 따라 국한됨으로써 만물의 차별성이 나타난다는 주장이니, 이를 理通氣局說이라 한다고 한다. 이는 주자성리학이 도달해야 할 궁극의 경지이며 고도의 신학설로서 조선에서 출현했으니 조선성리학이라 해야 할 것이고 이 신사상이 조선 고유이념으로 뿌리내린 바탕위에 문화의 꽃을 피워내리라는 사실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한다.
이 즈음해서 장차 西人으로 지목되는 조선 성리학파들은 우계 성혼(1535~1598),龜峯 송익필(1534~1599)송강 정철(1536~1593),백록 辛應時(1532~1585)등 율곡 사우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경복궁 서북쪽인 백악산과 인왕산 기슭에 터잡아 살고 있었다. 이들 문하에는 추종하는 학자들이 구름 모이듯 하여 거대한 학파를 형성해 나갔다.
이로인한 조선성리학파의 급속한 성장은 여타 보수학자들의 결속動因을 제공하여 퇴계학설을 묵수하는 퇴계 직제자들과 비순정주자학자들인 화담 서경덕(1489~1546),남명 조식(1501~1572)의 제자들이 연합하여 東人을 형성한다.
그러나 곧 순정주자학파인 퇴계계가 분리되어 남인을 표방하자 화담계와 남명계는 북인을 자처하게 되고 북인은 다시 분열하여 화담계는 小北이 되고 남명계는 大北이 된다. 이 중에서 비순정성리학파로 보수 성향이 짙던 북인 계열들은 선조 말년과 광해군시에 왕권과 밀착하여 일시 정권을 擅斷하지만 조선성리학이라는 혁신적 고유 이념을 바탕으로 이상사회의 건설을 꿈꾸는 조선 성리학파들의 막강한 힘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고한다.변화와 혁신을 갈망하는 민심이 전기 2백년 동안을 주도해 온 생경한 외래이념을 청산하고자 하는 문화적 자존심이 상하에 팽배해 있어서 그 도도한 흐름은 이미 시류가 되어 있다는 설명으로 부연하고 있다.
그래서 조선 성리학파는 보수적 순정성리학파인 퇴계계의 묵시적 동조아래 혁명을 일으켜 성공하니 이것이 인조반정(1623)이다. 임진왜란을 당해서 곧바로 의병을 일으켜 국난 극복을 몸소 감당함으로써 군사기반을 마련하고,정유재란으로 이어지는 7년 전쟁동안 교란된 경제 상황 속에서 경ㅇ제 기반을 서서히 다져 나왔으니 혁명에 성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미 율곡이 조선 성리학 이념을 확립해 가면서부터 율곡학파에서는 이 고유 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문화 전반에 걸쳐 조선 고유색을 드러내는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었다.
우선 문학에서 송강 정철이 한글 가사문학으로 국문학 발전의 서막을 장식하였고, 簡易 崔笠은 독특한 문장 형식으로 조선 한문학의 선구를 이루었으며, 석봉 韓濩는 조선 서체인 석봉체를 이루어냈다.
그러나 그림만 하여도 선구적인 이념에 공감하는 선비 중에서 그림 재주를 타고난 이가 출현해야만 고유 이념에 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화풍을 창안해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조반정에 약관 29세로 참여 하였던 滄江 趙涑(1595~1668)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그래서 곧 그림도 조선 고유색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창강은 우계 성혼의 제자인 風玉軒 趙守倫의 자제로 광해군 4년(1612) 김직재 誣獄에 연루되어 옥사한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인조반정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는 명리에 뜻이 없어 반정 성공후에는 일체 벼슬길에서 물러나 전국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시화로 이를 사생해내는 일에만 몰두하게 되니 이때 사생해낸 시를 진경시 그림을 진경산수화로 부르게 되었다.
이무렵 중원에서 일고 있는 여진족이 명이 임진왜란에 우리를 돕느라 피폐해진 틈을 타고 강성해져서 청나라를 건국하고 중원을 넘보면서 성리학적 국제질서를 파괴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명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 우리와의 관계도 평등 이상의 관계를 요구하고 나서게 되니 이런 무리한 청의 요구를 받아 들일 수없던 우리로서는 군사력이 열세인 줄 알면서도 일전 불사의 투지를 보이다가 결국 여진족에게 두차례에 걸쳐 침략을 당하게 된다 바로 정묘(1627).병자(1636)의 양차호란이 그것이다.특히 병자호란에는 남한산성으로 피난 하였던 이조가 청군에게 포위당하여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치욕을 당한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 지식층들은 심각한 좌절감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지식인들은 자기 회복의 방법을 놓고 성리학의 절대 신봉이냐 이의 탈피냐 하는 두가지 노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율곡학파의 적통을 이은 우암 송시열(1607~1689)과 동춘 宋 浚吉(1606~!672)등은 주자성리학의 절대 신봉을 주장하고,비순정주자학적인 요소가 강하였던 소북계 출신 기호 남인인 白湖 尹휴(1617~1680)와 미수 허목(1595~1682)등은 성리학으로 부터의 탈피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런 주장이 현실에서 나타나게 되니 바로 우암은 주자 연구에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121권 17책과 [주자언동이고]를 저술하여 주자 연구를 매듭지어 놓는 반면 白湖는 경서(經書)의 주자 주(註)를 부정하고 독자적인 註疎를 다는 상반된 태도를 보이게 됨으로써 국상중에 왕대비의 복제 문제에 도화선이 되어 禮訟이라는 원리 논쟁으로 비화하게 된다.
남인들은 "王者의 예는 士庶의 예와 같지 않다"고 주장하며 왕권을 절대화하려 하였으나 서인은 즉 조선성리학파는 "천하의 사람들은 예를 같이 한다"는 평등론을 주장하였다.
결론은 남인들의 움직임은 일시 왕권과 결탁하여 성공하는 듯 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은 평등을 전제로 하는 서인의 원칙론에 입각한 개혁을 열망하고 있엇다. 그래서 남인들은 결국 숙종 20년(1694)갑술환국을 끝으로 정치일선에서 완전히 제거되고 만다. 이로부터 서인 즉 조선성리학파들이 정치를 오로지 하게 되었다.
병자호란후 남인들의 파상적인 공세로 서인들이 수세에 몰린 경우가 여러번 있기는 하였지만 세도의 소재가 서인 영수의 손아귀를 떠난적은 없었다. 인조반정이후 조선성리학파들이 성리학적 이상 정치 구현을 표방하면서 반정의 원훈이었던 율곡의 제자 묵재 이귀(1557~1633)가 새도를 율곡의 수제자인 사계 김장생(1548~1631)에게 위임한 이래 변함없이 이어져 온 전통이었다.
사계가 서거하고 나자 청음 金 尙憲(1570~1652)이 세도를 담당하여 주전파를 이끌고 대청강경 자세를 고수해 나가 민족 자존심을 지키게 되었고, 청음 사후에는 사계의 의발을 전수받은 우암 송시열이 세도를 담당하여 효종과 함께 복수설치를 부르짖으며 북벌을 도모하고 예치의 기틀을 마련한다.
우암은 국왕의 사부자격으로 국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정사를 직접 擅斷하게 되며 이런일이 비롯되자 조선성리학이라는 고유 이념을 뿌리로 하는 진경 문화의 싹은 모든 분야에서 맹렬히 움터 오르기 시작한다.
문화적으로 우리보다 열등한 여진족이 무력으로 중국을 차지했다 해도 중화의 계승자가 될 수 없으며 급기야는 중국에서는 이미 중화 문화 전체를 야만적으로 변질시켜 놓았으니 중국에서는 이미 중화 문화 전통이 단절되었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니 중화 문화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주자 성리학의 적통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조선만이 중화 문화을 계승할 자격을 갖추엇으므로 이제는 조선만이 중화문화를 계승할 자격을 갖추었으므로 이제는 조선이 중화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런 일을 바깥으로 드러낸 예가 바로 우암과 그 제자들은 만동묘를 세워 명태조와 마지막 황제인 毅宗,임진왜란 당시 우리를 도와준 神宗황제 드의 제사를 지내고 조정에서도 大報壇을 설치하여 이들이 제사를 지낸다.
그리하여 율곡학파에서는 조선 성리학을 바탕으로 문화 전반에서 조선 고유색을 현양해오고 있었는데, 이제 조선이 곧 중화라는 주장을 떳떳하게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계기가 되어 조선 고유문화를 꽃피워내는 데 한 발자국 더 나아가는 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정리한 이념적 배경은 조선 전기를 거쳐 중기에 걸친 조선 사회의 조선 성리학의 배경을 이해하는데 간송미술관 학예실장으로 있는 최완수님의 정리한 내용은 간단 명료하게 조선 성리학이 국시가 바탕이 된 당시 사회를 정치와 그 철학적 모태가 문화적으로 흘러 진경산수의 토양을 형성해가는 장면을 해박한 지식으로 풀이를 하였기에 글을 다시한번 정리하여 보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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