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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몽골 부족의 처절한 귀향 엑소더스 - 제 1 편

눌재상주사랑 2010. 2. 1. 14:51

어느 몽골 부족의 처절한 귀향 엑소더스 - 제 1 편

2010.01.31 19:55 | 어느 몽골 부족의 처절한 귀향 엑소더스 | 울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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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몽골 부족의 처절한 귀향 엑소더스
                                   
-제 1 편-

 

구약(舊約)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민족의 엑소더스는

민족 생존 몸부림의 상징 같은 대 탈출이었다.


이집트에서 갖은 핍박 속에 시달리다가 선지자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 군의 추적을 따돌리며 홍해를 건너 이스라엘

옛 땅으로 귀향한 대서사시적인 민족 탈출은 이차 세계 대전 뒤에

여러 유럽과 중동에서 핍박 받던 유태인들이 여러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신생 독립국 이스라엘로 귀향함에
큰 영향을 주었었다.


그러나 민족 생존을 위한 엑소더스의 규모나 이동 거리나  

혹독한 고통의 크기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의

그 것과도 비교가 안 되게 장대한 민족 대이동이

지금으로부터 240년 전에 아시아 대륙을 가로 지르며

감행 되었었다,.


몽골민족의 한 부족인 토르구트 족이 생존을 위한

그 엄청난 귀향의 장정을 해 낸 것이다.


이 아시아 대륙판 엑소더스의 고난은 민족 이동을

갖은 시련을 겪으며 목적지인 옛 고향에 돌아왔을 때는
부족의 숫자는
단지 그 출발 인원의 절반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고향에 돌아가서 행복하게 살겠다던 부족민의 절반이
중도에서 낙오했거나
세상을 등지고 눈을 감는 비극을
맛보았던 것이다.,



아시아 대륙을 서쪽으로 가고 또 가다보면 황인종의

집단은 찾아보기가 기대 할 수 없는 백인종의 지역인

카스피 해와 흑해의 중간쯤 볼가 강의 연안에 벨기에 크기의

칼믹[또는 칼묵] 공화국이라는 국가가 존재한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국민 대다수가 이 지역과는

아무 연관이 없어 보이는 불교신자인 불교  국가이다,.

비슷한  불교 국가로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부탄 왕국이 있다.


이 작은 국가는 독립 움직임이 요란한 체체노잉구슈와 같이

러시아의 지방 자치 공화국으로서 1935년 지정되었다.


이 작은 국가는 좀 골치가 아픈 독재자로 세계에 알려져

있다.

칼믹 자치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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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산 일리움노프라는 독재자인데 자신이 화성인에게 납치되어
가다가
살아 나온 수퍼 맨이라고 자처하는 이상 성격자이다.

대통령이 되기 전의 전직(前職) 또한 괴상해서 프로 서양장기의

선수였다..


그의 상식을 뛰어넘는 행각에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칼믹 공화국의 주력 주민이 믿는 불교는 보통의 불교가

아니라 티베트와 몽골 민족이 신봉하는 라마불교다.


칼믹 족이라 불리는 이들은 이 지역에 이주해서

140년간 거주하다가 고향으로 대 엑소더스를 해 버린

몽골 동족들에게 합류하지 못하고 그냥 남아 있었던 잔류민이다.


오늘날의 칼믹 공화국이 탄생하게 했던 아시아 대륙을
가로 지르는
대 귀향의 엑소더스가 일어났던  역사적 배경을
알아보기로 하자.



19세기 초의 칼믹 주민들의 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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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 칸의 후손들이 지배했던 원나라에서 쫓겨나

북쪽으로 올라가 북원이라는 나라를 세웠으나 불과

2대 만에 멸망해버렸다.


징기스칸 가문  왕조의 그림자가 사라진 몽골은 분열을 거듭했다.


동 몽골과 서 몽골로 나뉘어져 통일된 몽골을

이루지 못하고 갈등을 거듭하던 중에 서 몽골의 합스걸

호수가의 산림지대에서 흥기한 오이라트 부가 몽골을

쥐고 흔들었다.


명의 명군 영락제는 재위중 여러 번 이 새로 흥기(興起)한

오이라트족을 토벌하러 시도했지만 번번이 헛물만 키어야 했다.


이 오이라트 족은 징기스 칸 시절의 전투력을 완전히 회복하여
주변,
특히 동 몽골족들과 강대한 명나라들을 타격을 주었다.


에센이라는 오이라트의 지도자가 오이라트 족의 수장이
되었을 때
그 전투력은 절정에 달했었다.


명 천자 [영종]가 50만의 대군을 직접 인솔하고 출정했지만

토목보라는 곳에서 전멸의 대패를 맛보고 중국 대륙의

만승(萬乘)의 천자인 영종이 포로로 하기도 하였다.


이 오이라트 부가 최 성세를 누릴 때 징기스 칸에 필적하는

리더가 나타나 몽골족을 이끌어서 단결시켰더라면

징기스 칸의 시대가 재래(再來)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족간의 불화와 반목이 너무 심해서

이를 화합하는 걸출한 지도자가 출현 할 행운의 기회가
오지 않았다.


이래서 서 몽골의 오이라트라는 강대한 부족이 큰 위세를

부렸고 동 몽골도 이에 복종하는 영세한 족속으로

서 몽골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하지만  권불 십년이었다.

기울어 가던 동 몽골이 혼란의 와중에 흔들리고 있을 때

이 동 몽골에 여자 징기스 칸이라 할만한 여장부가 혜성같이
나타났다.


동 몽골 족의 대칸 만두굴의 가장 젊은 후궁으로 서른 한 살의

만두하이라는 여장부였다.

남편이 죽으면 요새 말로 별 볼일이 없어지는 순번 낮은 

후궁의 존재인 이 여자가 고려 출신 기 황후같이

꺽달진 여장부였다.

[만두하이의 일대기나 영화가 한국에도 소개되었으니
 본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 녀는 1467년 남편
만두굴이 죽은 후에
뒤를 이어 대 칸이 된
볼후
진왕도 또 죽자
유일하게 징기스 칸,
쿠빌라이의 혈통을
받은
볼후 진왕의
여섯 살 먹은 왕자
바트 뭉흐의 상품적[?]
가치를
내다보았다.


만두하이는 아버지가
죽자 재혼해버린
그의 어머니조차
그를
돌보지 앉아 병든
바트 뭉흐의 양육을 
자청하여 이 어린
왕자를
엄격하게
길러냈다.










그리고 태고 난 수완과 미모를 다 동원해서
바트 뭉흐를
동 몽골의 왕위에 올려놓았다.

제위에 오른 바트 뭉흐는 다얀 칸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만두하이의 훈육 덕과 보좌 덕에 이 사람은 나중에
몽골 역사에
명군으로 알려지게 된다. 


바얀 칸이 어느 정도 성장하자 만두하이는 -
지금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지만- 마흔 두 살의 나이로
열일곱 살의  어린 이 다얀 칸과
결혼하였다.
실로 여자가 스물 다섯이나 더 먹은 연상녀와의 결혼이었다. 
만두하이에게는 재혼이었다.


그렇게 늦은 나이에 결혼했음에도 만두하이는 이 꼬마 신랑과의

사이에 연타로 쌍둥이들을 출산하여 소생만 모두 아들인

일곱 명이나 두었다.
[막내만 쌍둥이가 아니었다.]


이들 소생들이 나중에 동 몽골 부족들의 지도자로 부임하여

동 몽골 부족들을 재기 시켜놓은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중에 동쪽의 할하족은 만두하이의 두 아들이

부족의 지도자들을 맡아 이 부족을 동 몽골 최대의
조직으로 키웠다.


오늘날 몽골인들의 70 퍼센트가 이 할하 부의 후손들이다,


그 세력을 할하족을 중심으로 한 동 몽골족은

서쪽으로 세력을 급속히 넓혀서 이제는 약화 된 서몽골의
오이라트
부를 압박하였다.


오이라트 부는 한 족속 같지만 내면에 여러 작은 부족이 있다.

오이라트는  초로스, 두르베트, 토르구트, 호쇼트

등 네 개의 주요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할하 족의 영향을 받던 토르구트 족[정확한 발음은 투얼후트다]은

수장은 코 오르록이라는 인물이었다.


역사는 그가 할하의 귀찮은 간섭과 지배가 강화되자 눈을
서쪽으로 돌려
새로운 영토를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내면을 보면 그가 인구 증가와 가축 수 급증으로

더 넓고 풍부한 목초지를 찾아 이동하지 않았나하는 추측도 든다.


즉 목초지가 또는 오랜 가뭄이나 지나친 방목으로 황폐화
되었거나
축소되었기 때문이라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으리라고 본다,



몽골에서부터 중앙 아시아를 가로 질러 흑해까지

이르는 넓은 평야 지대에는  드문 드문이지만 좋은

목초지들이 염주처럼 연이어 있다.


이 목초지들은 수많은 가축들을 데리고 서방 원정에

나선 몽골 부대에게 식량인 육류를 부족함이 없이

공급하게 하는 기여를 했었다.


코 오르록은 1610년 최초의 정찰대를 구성해서 아랄 해와

카스피 해 사이의 엠바 강 유역으로 파견했다.


그 뒤에도 계속 살기 좋은 지역을 찾는 탐험대가

서쪽으로 파견되었다.


1623년 오이라트 내부에 또 부족간의 갈등이 표면화 되자

그와 그의 측근들은 미리 선정해놓았던 카스피 해 북부의

볼가 강 유역으로 떠나기로 결정한다.


1628년 토르구트 부족과 다른 부족이지만 이주에 동참하기로

했던 호쇼트 족과 두르베트 인들이 포함된

5만여 명의 오이라트 인들이 서쪽을 향한 대 장정을

나섰다.


미국의 서부 개척 당시의 대 이동을 연상케 하는 서부 대 장정은

새 정착지 찾기 착수 20여 년 만의  결단이었다.


이들은 이동 도중에 이주 단에 적대적인 카자크 인들이나

여러 잡 종족들을 격퇴하고 굴복시켜가면서

이동 2년만인 1630년 드디어 미리 결정해둔 카스피 해의
북쪽 볼가 강변에
도착했다,


집권한지 겨우 10년밖에 되지 않은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는

토르구트 족의 이주를 황무지 개척 차원에서 환영하였고

좋게 대우해주었다.


로마노프 왕조가 또 눈독을 들인 것은 기마에 능숙한 몽골인의

군사력이었다,


1700년부터 러시아가 스웨덴과 벌인 북방전쟁에서 몽골족의

기병대는 볼가 기병단의 일원으로서 참전했다,


현대에 재현한 전설적인 몽골 기병대의 돌격.
칼믹의 부대는 칼이나 활이 아니라 총으로 무장하고
싸웠으나 말을 다루는 솜씨로 러시아가 항상
필요로 하는 기병 전투력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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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2년 러시아 표트르 대제는 볼가강변의 도시 사라토프
근처에서
칼믹의 지도자 아유기를 만나 우수한
칼믹 기병 10,000기를
요청했지만 아유기는 5,000기만
제공할 수 있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다.


아유기는 80두의 낙타와 50두의 암말을 선물로 받고

그의 처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금시계와 비단을 선물 받았다는

사실도 기록에 남아있다.


러시아로서  이 변방을 개척해주고 우수한 군사력까지 빌려

주는 칼믹 족을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칼막로 이름까지 바꾼 토르구트 족이 볼가강가에서

그럭저럭 평화롭게 지나는 동안 동쪽 몽골의

세계는 쉬지 않고 불어오는 역사의 폭풍우속에서

뒤흔들리고 있었다,


동 몽골 하르하 족에게 밀리던 서 몽골의

오이라트 네 개 부족 중 초로스와 두르베르들이

연합하여 서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족민들은 천산 산맥 북쪽의

준가르 분지에 정착했다,

준가르 족은 초로스 족이 명칭을 바꾼 것이다.



준가리아가 있던 지역은 지금의 신강 위그르 자치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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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지금 중국 신강 위그르 자치구의 수도 우루무치 의

서쪽 방향에 위치한다.


1671년 이들 부족에 갈단이 지도자로 부상하면서

이들 준가르 분지의 몽골인들은 준가리아라는 단명했던

국가를 만든다.


그러나 몽골족이 단결하여 건국한 이 위험한 국가를

청 왕조는 그대로 방치하지 않았었다.

여러 번의 토벌이 있었다.


갈단은 청군을 상대로 수차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으나

청조 최고 명군 강희제가 직접 이끌고 출동한 청군에게
패배하여
1696년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준가리아는 급속히 내리막길을 갔다


준가리아는 그 후 좀더 계속되었지만 내부 갈등으로 콩가루 집안

같은 형상이 되어서 국력은 매우 허약해 졌었다.


1754년 청나라 건륭제의 원정 공격을 받고 많은

부족들이 손을 들고 항복하는 바람에  허망하게 지도자 다와치는

청군에 체포되고 준가리아는 허망하게 패해서 해체되었다.


이로서 몽골인들이 징기스 칸의 꿈을 이어 받아

다시 한번 강력한 통일 국가를 이룰 꿈은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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