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와 여행▶/세계풍정

어느 몽골 부족의 처절한 귀향 엑소더스- 제 2 편-

눌재상주사랑 2010. 2. 1. 14:53

어느 몽골 부족의 처절한 귀향 엑소더스- 제 2 편-

2010.01.31 19:18 | 어느 몽골 부족의 처절한 귀향 엑소더스 | 울프독

http://kr.blog.yahoo.com/waterview33/1256 주소복사

 

어느 몽골 부족의 처절한 귀향 엑소더스

                            - 제 2 편-

한편 볼가 강 유역에서 편안하게 살면서 부족 명칭마저

칼믹으로 바꾼 토르구트 족도 점점 안 좋아 지는

환경에 불안해하여야 했다.

[칼믹이라는 명칭은 주변 이스람 부족들이 붙여준
 명칭으로 러시아 인들이 따라 부르다가 공식 명칭이
 되었다.]


러시아의 간섭이 점점 심해져서 이들 칼믹 족들에게

러시아 법률을 적용하여 소금 생산과 민물 어업권까지

제한하니 먹고 살 방도가 힘들어졌다,


독실한 라마 불교의 신자들인 칼믹들에게 강압적으로
러시아
정교를 믿도록 해대는 전도도 일종의 모욕이었다.


러시아 거주 칼믹들이 러시아 풍으로 지은 라마교 사원
---------------------------------------------------------


더구나 러시아 농민들의 칼믹 영토내 이주가
폭증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유목지가 줄어 들고 가축도 줄어드니 살기가

힘들어졌다.,


이렇게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칼믹 지도층에

러시아 땅을 떠나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만들었다.


1756년 준가리아 토벌의 마지막 원정이 실행

되고 있을 때 칼믹 인들은 건륭제에게 사자를

보냈다.


건륭제는 열하에 있는 여름 궁중에서 이들을

접견하고 연회를 베풀어 주는 등 따뜻하게

환대했다.

잘 대접 받은 칼믹 사절단은 티벳을 거쳐 무사히
볼가 강으로
돌아왔다,


건륭제와 이들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 아무런

기록이 없다.


그러나 칼믹의 사절단이 조심스럽게 고향으로

돌아오는 청원을 했고 건륭제는 곧 함락할

준가르 지역의 좋은 유목지에 돌아와서 살도록

권고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귀향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을 때

칼믹에게 여러 가지로 제약을 가하던 러시아가

이들 몽골 인들에게 살던 지역을 떠나서 타지로

이동하라는 결정타적인 명령을 내렸다.


그때 러시아의 황제는 독일에서 시집을 와서 황후가 되었다가

무능한 남편을 표트르 대제를 없애고  자신이 직접 절대 군주가

되었던 에카테리나  여제였다.


에카테리나의 젊은 시절 모습
-----------------------------------

그녀는 피터 대제 이래 여러 가지로 재주와 기술이 많고 쓸모도
많아서
적극 유치하기 시작한 독일인들을 볼가 강변으로 대규모로
이주 시키면서 칼믹 인들에게 다른 곳으로 이주를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 녀가 칼믹 인에게 이주해 가라고 한 곳은

땅은 넓었지만 물도 나오지 않고 목초가 좋지 않아서

전혀 방목을 할 수 없는  황무지였다.


이 곳이 이런 곳인 줄을 모르고 이주 명령을 내리는 실수를

나중에 에카테리나 여제는 인정했다.


여기에 러시아는 말 잘타는 칼믹에게 오스만 터키와의 전쟁에
부족이
감당하기 힘든 많은 수의 기병들의 차출과 참전을 요구했다,


때 맞춰 준가리아가 건륭제에게 멸망하고 주인 없는

땅이 되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1770년 러시아에 동원되어 오스만 터키 족과의 전투를 겪고
돌아온 칼믹의 족장 우바시 칸은 여러 부족의 원로들과

상의를 거듭해서 다음 해 초에 볼가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

가기로 했다.


칼믹 인 부족 원들은 평소 귀향에 대해서 깊이 논의하면서

공감대가 형성 되어 있었다.


러시아로서 다민족 지대인 러시아 남부에서 칼믹들이 러시아에

공공연히 반기를 들고 마음대로 러시아를 떠나는 것은

타 민족들을 자극하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는 행위였다.

칼믹의 대 이주를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바시 칸은 러시아를 속이기 위해서 성동격서의 전법을

썼다,


러시아에게는 평소 칼믹 들과 사이가 안 좋았던 카자크를

손보기 위해서 이동한다고 둘러댔다.



출발 전 날에야 부족민들에게 고향에 돌아가는

대 액소더스의 길에 들어간다는 것을 발표하고 부족민들은

다음날 모두 볼가 강 동안(東岸)에 집결하라고 명령하였다,


카스피해로 흘러 들어가는 볼가 강
------------------------------------

1771년 1월 5일 새벽,볼가 강 동쪽 연안에 토르구트인

33,000가구, 17만 명이 집결하였다,

이들 엑소더스의 원정대는 같은 몽골인들인 호슈트 인,
초로스 인,
그리고 코히토 인도 포함하고 있었다.


평소 준비는 하고 있었다지만 실로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은

민족 대 집합이었다,


그러나 볼가강 건너에 살던 일만 여 가구 6-7만명의 도르베트
인 들은
비밀 회의에서 이 귀향 엑소더스에 참가하지 않고
그냥 그 땅에 눌러서
살기로 했다.


그러나 이 엑소더스에 동참하지 않은 구실로서 그 해 따라
온난해진
날씨 때문에 얼지 않은 볼가 강의 도강이 불가능하여

동참 할 수없다는 핑계를 댔다



이들 귀향길에 오르지 못한 볼가 강 서안(西岸)의

도르베트 인 후손들이 형성한 오늘날의 칼믹 공화국의 국민이 된다.


연중 가장 추운 1월에, 그리고 일부 동족들마저 버리고

부랴 부랴 귀향의 엑소더스에 올랐던 것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런만한 다급한 이유가 있어서 였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동계의 몽골 카라반. - 토르구트 족도 이런 행장으로
길을 나섰으리라 .
----------------------------------

이들의 귀향 움직임을 눈치 챈 러시아 당국이

대 병력을 동원해서  이 대 민족 러시아 탈출행을

차단하고자 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귀향길에 오른 칼믹 족은 세 개의 부대로 나뉘어서 대장정을

시작했다.


조상인 코 오르크 칸이 살길을 찾아 볼가로 이주한지

실로 140년만의 귀향이었다,


이제는 칼믹 인이 아니라 옛 토르구트의 이름으로 불려야 될

이들의 여정은 숱한 역경을 겪어야 했다,


가축이 풀을 뜯기 힘든 겨울철에 대장정을 시작한 것부터가

무리가 있는 엑소더스였다.


볼가로 올 때 조상들이 가축을 방목도 해가며

월동도 해가며 여유있게 이주했던 것에 비하면

이번 그때에 비하면 이번 귀향은 비교도 안 되게

힘든 것이었다,


우바시 칸은 고향으로 가는 최단거리를 택했다.

그것은 사이가 안 좋은 카자크족과 키르키즈 족이 다스리는
영토였다.


이 영토를 정공법으로 치고 들어가 관통 서진해서 고향에
신속하게
도착하자는 전략이었다.

 

적성지구를 지나는 동안 토구르트는 이 카자크 족과 키르키즈 족의

끊임없는 습격을 받아야 했다.전투요원들이 아니라 가족까지

거느린 토르구트 족은 이 습격에 숱한 목숨이 잃어야 했고 다수가

이들에게 붙잡혀서 젊은 여자는 능욕 당하고 어린 토르구트들은

이 이민족의 노예가 되었다.


추운 겨울 목초가 말라붙어서 제대로 먹지 못한 가축들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


습격해오는 카자크나 키르키즈들에게 약탈당한 가축도

수천 두였다.


더구나 이 루트는 물이 많지 않은 지역을 통과하였다.

많은 토르구트 인들이 굶어 죽고 물을 마시지 못해
목마름으로
죽음의 길을 갔다.


수백, 크게는 수천의 집단이 따라오지도 못하고 러시아로

돌아가지도 않았고 또 적에게 투항하지도 않았는데도

그냥 증발하기도 했다.


황야의 어느 구석에서 기아로 모두 집단 사망했을 것이라는

것이 나중의 추측이었다.


이들의 훼방을 따돌리기 위해서 볼가로 가던 조상의 이주처럼

느긋할 수가 없었다.


토르구트들은 이민족의 습격과 기아와 고통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리라 할 정도로 스피드를 냈다.


기아와 상처투성이의 만신창이가 된 토르구트들은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도 추적과 도발을 일로 동진(西進)에 동진을
되풀이 한 끝에
7개월 뒤에 준가르 지방 일리 강 유역에
도착하였다.


드디어 도착한 준가르의 초원 - 현 몽골족 자치주-
-------------------------------------------

비록 140년 전 원래의 조상들이 살았던 정확한 고향이 아니라
조금 남쪽이지만 같은 오이라트 족이 다스리던 고향 땅으로,
타국에서 핍박 받고
긴 역소더스에 올라 여정에서 갖은
간난신고를 겪은 원 오이라트
부의 용사와 가족들이
기진맥진해서 돌아 온 것이다,


오늘날 토르구트 족의 후손들은 우루무치 서북쪽
자치주에서 살고 있다. 신강 위그르 자치구에는
두 개의 몽골족 자치주와 한개의 몽골족 자치 현이
있다. 중간 2번이 토르구트 후손들이 사는 
자치주이다.[巴音郭楞蒙古自治州 -줄여서 파주]
영어 명칭은,
Bayingolin Mongolia Autonomous Prefecture
--------------------------------------------


고향으로 돌아 왔다지만 부족은 만신창이였다.

볼가 강 유역을  떠났던 17만 명의 부족민중

일리 강 상류에 도착했던 것은 절반도 안 되는

7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 민족의 엑소더스 도중의

홍해를 건넜을 때와 같이 여호아의 기적 같은 수호신의

도움은 이 동방의 민족이 초원을 건너는 고난의 엑스더스에서는

일어나지를 않았었다.


이들이 이스라엘의 가나안처럼 젖과 꿀이 흐를 것으로 기대하며

천산 산맥 아래의 초원 지대에 겨우 도착하자
수호신 대신
새로운 마신(魔神)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천연두의 유행이 기진맥진한 

이 불운한 부족을 강타했던 것이다.

적어도 1만 명 이상이 죽었고 더 훨씬 많은 부족민들이

평생 얽은 자국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


그러나 새주인인 청국의 건륭제에게 도착 인사를
안 할 수는 없었다.


청나라 국력 확대에 지대한 업적을 쌓은 건륭제
그의 사후 청왕조는 사양길로 들어선다.
----------------------------------------

열하의 피서지에서 이들 토르구트족의 대표를 만난 환갑의

건륭제는 기분이 이들을 극진히 환대하고 기념비를 세우도록
지시했다.


준가리아를 멸망시키고 기분이 한껏 좋았던 건륭제에게는
토구르트가
먼 길을 와서 자기에게  신속(臣屬)하는 것은 마치
몽골인 정벌의 마침표를 찍는 기념비적 행사와도 같게 느껴졌다.



자치주는 상당한 도시화도 진행되어 있다.
-------------------------------------------

지금도 남아 있는 토르구트 족 귀순비에는 이런

글귀가 남아있다.

- 이제 남아 있는 모든 몽골 부족은 하나로 돼 신복(臣僕)하지

  않은 것이 없게 되었네 .-


고향에는 찾아 왔지만 본의 아니게 민족 생존을 위해서

죽을힘을 다하여 고향을 찾는 토르구트 족의 엑소더스는

징기스 칸 후에도 여러 차례 중원의 중국 민족에게 치명적인

군사적 타격을 주며 재기의 가능성을 보여주던 몽골민이

민족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청에 완전 굴복한 모드로 들어가는

이정표적인 이벤트가 되고 말았다.


몽골 자치주에 있는 호수
--------------------------------------


이민족의 탄압이 싫어서 추운 겨울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멀디 먼 귀행 길에 올랐다가 목숨을 다한 몽골 인들이

지금 결과를 본다면 요새의 막말로 '죽 쑤어 개주었다'고

할만한 일이다.


오늘날  이스라엘이 목이 메어 찾아가던 가나안과

같이 토르구트 족이 갖은 고난을 겪으며 찾아가던

이리 강 상류지역은 천산 산맥의 북쪽으로서 신강성

위그르 자치구가 되었다.


민족도 몽골족이 아니라 이국적인 풍모를 가진 터키계의

위그르 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그들은 몽골 민족들이 신봉하는 라마교가 아니라

이슬람 족이 믿고 있다.


천산 산맥의 찬 얼음물이 녹아 흘러가며 적시던

일리 강 유역은 지금 대규모 농경지와 과수원등이 들어서있다.


청 나라 때는 그전 왕조인 명대보다 휠씬 더 넓게 영토를

확장했다,


그 청조를 열었던 여진족이 소멸되고 그 유산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현대의 한족들이 그 광활한 영토를

다 차지하였다.


사실 청 왕조가 확대한 영토는 알고 보면 원조 멸망 뒤 변방으로
내몰린 몽골족들이
다 개척해놓은 것을 힘들이지 않고 청이
다 빼앗은 것들이다.


내몽골 지역은  투메르 족,  청해성 지역은 호쇼트 부,

신강 위그르 지역은 준가르 부등이 다 터전을 닦아 놓았었다


몽골 부족의 내부적인 갈등과 경제적인 궁핍, 그리고 이것들을
이용한
청조의 교묘한 농간과 정책적인 중국인들의
집단 이주로서 다
청국의 땅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최대 전리품이라 할 수 있는 티벳트는

1700 내분을 휩싸인 티베트를 원조 한답시고 보낸

청병7,000 명이 권력 투쟁의 교통정리를 해주고

꿀걱 삼킨 것이다,


사실 이 티베트도 몽골인들의 국가 준가리아가 공격하여서

상당히 약체화 된데다가 청군들이 몰려오자

후퇴하는 바람에 청군들이 거저줍다시피 한 것이다,


사실 풍운아 같은 민족의 삶을 살은 몽골족은

그 좋은 기동력으로 너무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단결의 연대가 힘들었다는 기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여기에 교활한 청 왕조의 농간 까지 겹쳐 징기스 칸 때와 같은

강력한 중앙 통치체제를 이루지 못하고
‘죽 쑤어서 개 좋은 일’ 같이
중국 좋은 일만 시켰다.


현대의 몽골 민족들은 독립국가인 외몽골과 중국의 한 자치구인
내몽골과
러시아의 부리아트 공화국 세 국가로 나뉘어져
약소국의 운명이 되었다.

[이 세 곳에 흩어져 사는 몽골족의 인구는 약 일 천만 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미래에 언제인가 역사의 수레바퀴가 운명적으로 굴러
몽골 민족이 다시 뭉쳐 인구 일천만을 자랑하는 통일 국가가  
되어서 중국이나 러시아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아시아 대륙
중앙의 정치적 강국이 될 수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