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의 길 위에서 만난 쉼표] 日 교토
전통 화류가 골목엔 앳된 게이샤들 ‘이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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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4003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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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교토의 골목을 걷노라면 걸음은 다소곳해지고 품새는 정갈해지고 마음은 할랑할랑해진다. 마을 수로의 작은 돌다리에 오래도록 기대 서서 햇살에 반짝이는 나뭇잎 사이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몸은 자전거 바퀴처럼 가볍게 구르는 것만 같다. 깨끗한 옷을 새로 꺼내 입고 나들이나온 듯 입가엔 잔잔한 평온이 스며든다. 먹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것도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생각도 더 이상 없다. 그저 그대로가 좋다. 간신히 아무것도 그립지 않은 순간이다.
늘어선 옛집들 대부분이 요릿집
◇시라카와를 건너는 돌다리 위에 앉아 있으면 자전거를 타고 다리를 건너는 요릿집 사내들이 자꾸만 지나간다.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얀 제등이 걸린 야사카(八坂)신사에서 한숨 쉬어 간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사람들, 처마에 매달린 큰 종을 치며 소원을 비는 사람들 속에서 생각한다. 늘 무언가를 소원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며 사는 것이 이생의 전부일 것이라고. 그러나 그것이 또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라고.
정문으로 빠져 나오자 길게 뻗은 기온(祇園) 거리가 펼쳐진다. 옛날부터 교토의 최고 유흥가였다는 기온 거리는 지금도 유흥가답게 북적인다. 하지만 그 북적이는 길에서 잠시만 걸음을 틀어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면 목조가옥들이 즐비해 마치 과거로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고즈넉하다. 좁다란 시라카와(白川)를 따라 늘어선 옛집들, 자전거를 타고 작은 돌다리를 건너는 요릿집 사내, 따끈히 볕드는 다리 위에서 잠든 고양이, 햇살을 받아 찰랑거리는 나뭇잎과 반짝이는 냇물…. 그 모든 것이 옛 영화 속의 풍경인 것만 같다.
시라카와 남쪽의 옛집들은 대부분이 요릿집들이다. 처음 그 집 앞을 걸을 땐 하도 조용해서 집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늦은 오후라서 채 문을 열지 않은 집집에 기모노를 입은 여인들이 저녁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인들은 집 앞에 나와 물청소를 하고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하지만 손길과 움직임이 어찌나 조용한지 마치 귀신 같았다. 그러나 그런 그녀들을 보고 있노라면 괜스레 가슴이 떨린다. 그녀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설렌다. 그저 걸음이 이끄는 대로 그녀들의 집에 들어가 아무 말 없이 조용조용 그녀들이 내주는 음식을 가만가만 음미하고 싶어진다.
그렇게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기온신바시(祇園新橋) 전통가옥보존지구를 다 둘러보게 된다. 그러면 해가 지고 요릿집 여인들도 문을 열고 손님 맞을 불을 밝힌다.
◇가모강을 건너는 다리 위에서 바라본 폰토초의 가옥 풍경은 평온하다.
기온 거리를 걷다 보면 가모 강(鴨川)을 건너게 된다. 다리 위에서 보면 강변에 늘어선 폰토초(先斗町) 골목의 식당들, 그리고 사람들이 강변을 거니는 모습이 마치 우리나라 어느 지방의 천변 풍경을 닮은 듯해 친숙하다. 그래서 오래도록 다리 위에 서 있게 되는데, 해 지기 시작한 강변 풍경과 눅지근해진 저녁 공기에 오후 내내 실바람 같던 마음은 아래로 아래로 내려앉는다.
◇폰토초에서 만난 앳된 게이샤들. 그녀들이 일본 전통의 한 모습이기도 한 게이샤의 명맥을 잇고 있었다.
잰걸음으로 골목 끝에서 걸어오는 앳된 얼굴의 그녀들은 이제 막 일을 하러 나가는 모양이었다. 그녀들은 내 사진기를 보자 마치 인형처럼 내 앞에 서 주었다. 웃음기도 싫은 기색도 전혀 없이. 그런 그녀들에게 조심스레 나이와 이름을 물었으나 그녀들은 입술조차 떼지 않았다.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았다.
본래 게이샤는 게이샤가 되면서부터 자신이 살아온 모든 인생을 지워야 한단다. 하얀 분칠로 자신의 얼굴을 지우듯 자신의 본래 이름을 잊고 새로운 이름을 얻어 게이샤로만 살아야 한단다. 술 시중을 들면서도 샤미센을 연주하고 춤도 추고 교양을 갖추어 화술도 뛰어나야 한다는 게이샤. 1600년대 말부터 생겨난 게이샤들은 현재 그 수가 점점 줄어 채 천 명도 안 된단다. 풍기를 문란하게 한다고 여러 차례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지만 교토엔 그 명맥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옛날엔 가난한 여인들이 돈을 벌기 위해 찾았던 직업 게이샤. 그러나 요즘엔 일본 전통의 한 모습인 게이샤를 이어가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제 발로 찾아오기도 한단다. 내 사진기 앞에 서서 입을 다물고 서 있던 어린 게이샤가 슬쩍 곁을 내주며 말했다. 최고의 게이샤가 되고 싶다고, 그리고 돈도 벌고 싶다고.
요정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얼굴과 인생을 모두 지웠다고 해서 존재가 지워지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그나마 교토에 살고 있어 다행이라고. 얕은 숨소리일지라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고요 속에서 일깨워 주는 교토에 살고 있어 다행이라고. 그러니 오늘도 소원을 빌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며 사는 것 아니겠느냐고.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라고.
여행작가·시인
소원을 빌고 싶다면 찾아가봐야 할 곳◇날이 저물면 야사키신사의 제등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두 손을 모은다.
■기요미즈데라(淸水寺)
절벽 위에 있는 절로, 139개의 거대한 나무기둥이 본당 무대를 받치고 있다. 본당 밑에 있는 오토와 폭포는 세 개의 물줄기로 떨어지는데 지혜, 건강, 장수를 의미한다. 그중 두 개만 마셔야 운이 따른단다. 욕심을 내서 세 개의 물을 다 마시면 불운하다고.
■야사카(八坂)신사
액을 막아주고 번성을 도모한다고 해서 교토 사람들과 친밀한 신사. 모두가 처마에 매달린 큰 종을 치고 소원을 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엔 이곳의 불씨를 집으로 가져가 새해 아침에 우리의 떡국과도 같은 오조니를 끓여 먹으며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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