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의 길 위에서 만난 쉼표] 프라하
불야성 이룬 프라하의 성 ‘위용’
관련이슈 : 정영의 길 위에서 만난 쉼표
20100429004101
-
사진으로만 본 프라하는 고성이 있고 강이 있는, 마리오네트가 춤추는 그저 아름답기만 한 도시였다. 그러나 늦은밤 프라하에 첫발을 내디뎠을 땐, 캄캄한 도시 저 밑바닥에서 슬픔의 소용돌이 같은 게 몰아치는 듯했다. 사회주의의 흔적과 ‘프라하의 봄’ 당시의 아픈 역사가 곳곳에 남아 있는 도시의 침묵은 아팠다. 그러나 그런 침묵은 누구에게나 있다는 듯이, 다음날 아침엔 유럽에서 본 중 가장 맑은 봄볕이 프라하를 감싸주었다.
◇프라하의 야경은 오래전 시간으로의 여행 같다. 현대문명이 모두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나면 고성의 아름다움만 눈앞에 펼쳐진다.
아침부터 햇살을 받으며 바츨라프광장에 앉아 국립박물관을 보고 있자니 모든 사람들이 광장으로 모여든다. 오래전부터 시민 시위나 공공집회의 장소인 이 광장은 여전히 차와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런데 성 바츨라프 기마상 아래에 사람들이 하나 둘 다가와 꽃을 두고 간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프라하의 봄’ 당시 소련이 무력으로 밀고 들어오자 분신자살해 공산주의에 저항한 대학생 얀 팔라흐와 얀 자이츠의 추모 제단이다. 다시 봄은 오고 꽃은 피고, 소련의 총탄에 무너졌던 국립박물관도 복원되었으나 무고한 생명들은 사라지고 없는 자리. 그러나 그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길고긴 목소리들이 있으니 이 봄이 서럽지만은 않다.
◇체코 사람들은 ‘성 비트 성당’을 유럽에서 가장 멋진 고딕양식 성당이라고 믿는다.
그 순간 왜 그리도 그들의 사랑이 어여뻐 보였을까, 그리고 아스라했을까. 아무것도 볼 수 없을 정도로 한 사람만 바라보게 되는 그런 마음을 잊고 살아서일까. 무엇을 위해, 누군가를 위해 목숨 한줌 내줄 수 없는 내 본질의 캄캄함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심장을 잃은 채 오래도록 심장을 잃은 줄도 모르고, 사랑을 잃은 채 사랑을 잃은 줄도 모르고 살아온 것은 아니었을까 싶어 팔다리가 후루룩 흘러내렸다. 프라하 구시가지 거리 곳곳에 걸린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그때 사람들이 분주히 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소란스럽게 골목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쫓아가 보니 프라하의 심장이라 불리는 넓은 구시가 광장. 사람들은 고개를 들고 광장 구시청사의 시계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각이 되자 사람들의 탄성과 함께 해골인형이 종을 치자 시계의 작은 창문이 열리면서 예수의 12사도 인형이 차례로 나왔다. 프라하의 명물이라지만 조금쯤은 시시한 천문시계 타종. 그러나 그 시계탑 기둥에 있는 네 개의 인형을 자세히 보며 ‘여명의 시간이 다가오면 허영도 부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의미를 생각해 볼 일이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프라하성’에서 빠져나와 주변 주택가 길에서 내려다본 프라하는 평온하고 고즈넉하다.
블타바강의 동서를 잇는 카를교 위는 늘 여행객과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들, 악기 연주자들,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로 북적인다. 그래서 진정한 카를교의 모습 보기를 원하는 이들은 모두 새벽에 찾아온다. 그러나 그 북적임을 뒤로하고 다리 위에 서서 오래도록 블타바강과 프라하성을 바라보고 있으면 한 편의 그림 같은 풍경에서 프라하만의 서정을 느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풍경이 오래도록 그리워진다.
카를교를 건너면 블타바강의 서쪽인 말라스트라나(소 지구)와 흐라드차니(중세고성 지구)가 이어진다. 각국의 대사관과 카페와 레스토랑이 즐비한 네루도바 거리를 지나 언덕을 오르면 드디어 프라하성. 매시 거행되는 근위병들의 교대식을 보고 성으로 들어서자 거대한 성 비트성당이 먼저 그 위엄과 정교함을 자랑한다. 약 500년 동안 지어졌다는 이 성은 어느 한 구석 예술적이지 않은 게 없다. 장엄한 외부의 모습이나 체코 미술의 거장들이 만들었다는 스테인드글라스를 비롯한 실내의 성스러운 아름다움은 어느 성당에서 본 것과 견주어도 최고라 할 만하다. 체코인들이 유럽에서 가장 멋진 고딕양식의 성당이라고 자부할 정도라니….
그리고 작은 상점들이 모여 있는 골목인 황금 소로에선 자꾸만 제자리걸음을 하게 된다. 22번지의 파란색 집은 프란츠 카프카가 잠시 머물던 작업실. 그곳에선 현재 카프카 기념품들을 팔고 있지만, 그 앞에 오래도록 서서 현재의 모습이 아닌 카프카가 살던 시절의 모습을 상상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 골목의 적잖이 무게감 있는 공기 속에 서서 말이다.
그리고 프라하성 주변은 대부분 주택가가 있어 좁은 골목과 계단들이 많다. 프라하에선 어딜 가도 만나게 되는 여행객들의 무리에서 빠져나와 천천히 그곳을 걷다 보면 그곳에 사는 현지인들을 마주치게 되면서 진정한 프라하 동네에 와 있는 듯, 그제야 기꺼이 프라하와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든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프라하의 모습은 참 평온하고 고즈넉하구나 싶어진다. 그래서 그곳에서 마주친, 이제 막 결혼해 프라하에 살기 시작했다는 한 한국 부부는 그곳으로 자주 산책을 오곤 한단다.
◇카를교 위에 서서 블타바강을 바라보고 있으면 프라하의 화려한 겉치레가 아닌 본 모습을 만나는 것만 같다.
시인·여행작가
>> 카를교의 조각상 ‘성 얀 네포무츠키’
카를교 위의 조각상은 모두 서른 개인데 진품은 박물관에 있고 현재 서 있는 것들은 모두 모조품이다. 그렇긴 하지만 가운데쯤 있는, 가톨릭 성인인 ‘성 요한 네포무츠키’의 조각상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유일한 청동상인 이 조각상 아래엔, 바츨라프 4세가 그에게 왕비의 고해성사 내용을 밝히라 했으나 말하지 않아 카를교에서 강으로 던져졌다는 내용이 담긴 그림이 새겨져 있는데, 그곳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그 부분만 노랗게 닳아 있으니, 어쩌면 우리에겐 행운보다도 고해성사가 더 간절한지도 모르겠다.
기사입력 2010.04.29 (목) 21:50, 최종수정 2010.04.29 (목) 21:49
-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취미와 여행▶ > 세계풍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영의 길 위에서 만난 쉼표] 스위스 루체른<세계일보>알프스 산맥·거대한 (0) | 2010.06.19 |
---|---|
[정영의 길 위에서 만난 쉼표] 방콕<세계일보>'방콕' 활기 넘치는 황금빛 (0) | 2010.06.19 |
스페인 그라나다 알람브라... 아라베스크 문양따라 이슬람 산책 (0) | 2010.06.17 |
休~`튀니지언 블루`에 젖다 (0) | 2010.05.30 |
[정영의 길 위에서 만난 쉼표] 로마스페인광장엔 연인들 밤낮없이 북적관련 (0) | 2010.04.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