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의 길 위에서 만난 쉼표] 쿠바 뜨리니다드<세계일보>
- 입력 2010.06.10 (목) 17:34, 수정 2010.06.10 (목)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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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영의 길 위에서 만난 쉼표
낮이면 해변의 햇살로… 밤이면 뜨거운 춤으로…
온몸이 달궈지는 도시
온몸이 달궈지는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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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이면 뜨거운 앙꼰 해변의 햇살로 온몸이 달구어지고 밤이면 마요르광장에서의 뜨거운 춤으로 심장이 달구어지는 도시. 예전에 사탕수수 농장으로 부귀영화를 누렸던 이곳엔 스페인 정복 당시 부호들의 삶과 아프리카 노예들의 삶이 엉겨 있어 머무는 내내 가슴이 뜨겁다. 그 먹먹한 뜨거움을 씻어주는 게 있다면, 깊은 밤 사탕수수밭에 쏟아지는 달빛, 그리고 그 달빛 아래에서 추었을 달큼한 사랑의 춤이다.
◇북적이지 않는 한적한 풍경이 몸과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앙꼰 해변.
아바나에서 출발한 버스는 여섯 시간 동안 끝없는 사탕수수밭을 지나고 지나 뜨리니다드에 도착한다. 사탕수수 농장으로 한때 영화를 이루었다는 이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건 파스텔 톤의 낡은 집들. 비록 낡긴 했어도 색색의 집들이 줄을 잇고 있으니 그 골목을 걸으며 마음이 연한 파스텔처럼 부드럽고 편안해진다. 하지만 마을에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 당시 지었던 집들이 곳곳에 남아 있고 골목 또한 중세의 벽을 훌쩍 타고 넘기라도 한 듯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과거를 배경으로 그다지 풍요롭지 못한 현재의 시간을 거닐면서는 가슴이 울컥하지 않을 수 없다.
숙소를 찾다 지친 내게 길에서 마주친 한 여인이 자신의 집에 묵겠느냐며 말을 건넨다. 그녀를 따라 들어선 집은 정말 아름다웠다. 거친 바람 속에서 헤매다가 눈물이 다 소진될 대로 소진된 사람을 누이면 좋을 듯한 집. 반세기를 잠들어도 좋겠다 싶고, 그렇게 충전을 마치고 나면 다시 반세기를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 커다란 안채가 있고 뒤편에는 사랑스러운 정원이, 그리고 바깥채로 이어져 있는 그 집은 그녀의 스페인 선조가 건너와 지은 집이라고 했다. 그래서 스페인풍 타일로 장식된 벽과 천정은 고풍스럽고, 햇살이 오래도록 집안에 들도록 하기 위해 문을 아치형으로 천정까지 높이 올린 것도 특징이라며 그녀가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그 고풍스러운 저택들은 아름답다지만, 잉헤니오스 계곡으로 가면서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만 해야 했던 흑인 노동자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밤이면 마요르광장에선 아프리카 노예들의 전통 음악과 춤으로 어우러진 공연이 펼쳐진다.
기차는 마니까 이스나가 역에 멈춰선다. 그곳엔 그 당시 손꼽히는 부자였던 사람의 대 저택이 남아 있고 44m 높이의 노예 감시탑이 있다.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노예들을 감시하기 위해 지어진 탑으로, 나무 계단을 밝고 탑 꼭대기에 올라서면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 관망탑이 아니라 감시탑이라는 사실이다. 마을로 내려오자 마을 사람들이 사탕수수를 짜낸 음료를 판다. 그것을 한 모금 마시며 나는 생각한다. 이 달달한 사탕수수가 우리의 쓰디쓴 삶을 잠시나마 위로해 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나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흘린 눈물은 우리가 모르는 어디에든 있을 것이니 이 세상엔 또 얼마나 많은 위로가 필요한가. 역에서 돌아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청년이 풀잎을 접어 메뚜기를 만들어 선물이라며 건넨다. 감자 농사를 짓는다는 스물여덟 살의 청년이 부끄러이 웃는다. 태어나서 한 번도 마을을 떠나본 적이 없다며.
뜨겁게 타올라 이내 가볍게 떠오르는
눈부신 모래밭과 잔잔한 에메랄드빛 카리브해를 바라보며 야자수 나무 아래서 책을 읽다가 스르르 눈을 감는다. 북적이지 않아 조용하고 한가로운 이 앙꼰해변에서 나는 이 세상의 모든 무게를 잊는다. 육체의 무게와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죽을 때까지 지고 가야할 짐의 무게, 그러니까 삶의 모든 무게를 잊는 것이다. 그리고 살며시 이마를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이 이 세상에 왔다가는 내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슬며시 낮잠에 빠져든다. 해변의 수많은 모래알처럼.
꿈결인 듯 들리는 사람들 웃음소리에 눈을 슬며시 떠보니 스노클링을 즐기기 위해 요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이들이 보인다. 그들과 함께 카리브해에 몸을 담근다. 그리고 그 풍요로운 바다 속 풍경에 그만 조금이나마 남았던 뼈의 무게, 그러니까 내 근본의 무게마저도 벗어던진다. 허공의 형체가 없는 바람들처럼.
◇높이 44m의 노예 감시탑. 이곳에 올라가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들을 감시했다고 한다.
뜨거운 오후를 보내고 뜨리니다드의 중심가로 돌아오면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밤이 기다리고 있다. 쿠바의 어느 도시보다도 뜨거워 결코 잊을 수 없는 밤은 이 도시의 중심인 마요르광장에서 시작되는데,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하는 시간이면 광장을 중심으로 방사선 모양으로 퍼진 길을 따라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그러면 광장에선 매일 밤 뜨겁고도 아름다운 라이브 연주와 춤판이 펼쳐진다. 그러나 늘 뜨거운 밤의 시작을 알리는 것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던 아프리카 노예들의 삶을 보여주는 아프리카 전통 춤 공연이다. 전통 의상을 입고 나온 마을의 젊은이들이 전통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동안엔 여행객들도 조용히 공연을 바라본다. 그러나 공연이 끝나고 나면 동네 사람들과 여행객들이 어우러져 밤새도록 살사춤을 추며 럼과 맥주를 마신다. 음악과 함성이 밤을 가득 채우는 동안, 뜨거운 별들이 환하게 박힌 까만 하늘 아래에서 뜨거워진 영혼들은 춤을 출수록 더 환하게 빛난다. 그토록 환한 몸짓은 마치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는 영혼의 신호처럼 아름답고 어여쁘다. 그것이 비록 사탕수수밭에서의 아픈 사랑일지라도.
다음날 이른 아침, 지난밤의 뜨거웠던 열기도 사라진 마요르광장을 지나 산 프란시스코 교회의 종탑 위에 올라서자 뜨리니다드 전경이 다 펼쳐져 보인다. 옛날에 뜨리니다드가 번성했던 시절에 지어진 대저택들과 후미진 골목의 다 낡아빠진 집들까지도.
그리고 골목을 거닐다가 마을 빵집에 들러 빵을 사겠다고 했을 때, 현지인이 아닌 사람에겐 빵을 팔 수 없다는 청년이 돌아서는 내게 슬쩍 쥐여준 빵 한 조각을 먹으며 나는 다시 보았다. 색색으로 어우러진 집들을, 그리고 대 저택과 낡은 집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그것이 하루하루 이어지는,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시인·여행작가
〉〉 쿠바의 두 가지 화폐
쿠바에선 외국인이 채소나 빵이나 달걀 같은 식료품들을 자유롭게 구입할 수 없다. 슈퍼마켓에서 물과 음료나 과자류는 쉽게 구입할 수 있지만 시장에서 음식재료를 사와 음식을 만들어 먹긴 어렵다. 화폐는 외국인들이 쓰는 세우세(CUC)와 현지인들이 쓰는 모네다 나시오날(MN)이 있어 상점마다 받는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외국인들은 사 먹을 수 없는 저렴한 길거리 음식도 많다. 그러나 몇몇 환전소에서는 외국인에게도 모네다 나시오날(MN) 화폐를 내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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