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건축사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사회]〈11〉서브 컬쳐<세계일보>
- 입력 2010.06.15 (화) 22:33, 수정 2010.06.14 (월) 22:30
더 낮은 곳에서 더 높은 이상을 꿈꾸게
더 많은 ‘기차길 옆 학교’를
더 많은 ‘기차길 옆 학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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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최고가 된 한국 비보이들
2004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세계적인 비보이 대회 ‘UK 비보이 챔피언십’ 단체전에 한국 비보이 연합팀인 ‘프로젝트 소울’이 참여한다.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되는 경기에서 한국은 러시아 팀을 물리치고 캐나다 팀과 준결승에서 맞붙었다. 가벼운 동작으로 탐색전을 펼치던 캐나다 팀이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감추어두었던 고난도 동작을 펼쳐보인다. 이어 한국팀 진영에서 검은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작은 체구의 청년이 무대 중앙으로 뛰어들어온다.
◇2004년 UK 비보이 챔피언십에서 세계를 놀라게 한 한국 비보이 피직스.
일명 ‘크레이지 무브’라 불리면서 지켜보던 모든 관객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그 ‘무브’는 우리나라 비보이의 역사를 다시 쓰고 세계 비보이 역사에서도 영원히 기록될 장면으로 길이길이 남게 된다. 피직스는 우리나라의 단체전 우승을 이끌었으며 개인전 우승까지 거머쥔다. 경남 함안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춤을 추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춤 추고 춤 생각만 하던 아이가 마침내 세계적인 비보이가 된 것이다.
한국 비보이들은 세계가 경악할 정도의 빠른 속도로 정상에 올랐다. 힙합문화의 원조인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비슷한 문화적 환경을 가진 일본보다 훨씬 늦게 시작한 한국이 십 년도 되지 않은 시간에 세계 최정상 강국이 되었고 이후 세계 비보이 대회는 우리 비보이들에 의해 지배당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비보이 문화를 뒷골목의 ‘질 낮은’ 문화로 폄하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선진국 특히 유럽에서는 이미 사회 체육으로, 당당히 문화의 한 부분으로 대접받고 있다.
그 밑바닥에는 자율성이 있다. 그들은 모두 자발적이고 개인적인 흥미와 열정으로 시작했으며 어떤 후원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속한 분야가 우리가 그려놓은 ‘문화’라는 테두리 안에 포함되지 않아서 그들이 이뤄낸 괄목할 만한 성과가 크게 가려져 있다.
# 자생적인 생명력으로 빛나는 문화
서브컬처(subculture)는 ‘한 사회의 지배적 문화가 아닌 주변적 계층의 하위문화, 히피족 등에 의해 상징되는 뒷골목 문화나 전위 예술가들의 문화처럼 기존의 도덕규범에 반발하여 새로운 생활양식과 세계관을 추구하는 현상’을 통칭한다. 서브컬처는 자생적인 문화다. 혹은 문화로 분류되기 이전의 형식이다. 문화의 아래 단계가 아니라 아직 넣어주지 않았을 뿐이다. 그 말에는 반항이 담겨있고, 원시적인 순수성도 담겨있는 복합적인 단어이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서브컬처를 지향하는 공간이 있다. 독일에 기반을 둔 ‘플래툰 쿤스트할레(Platoon Kunsthalle)’라는 문화그룹이 만든 공간인데, 아시아 서브컬처의 새로운 거점으로서 ‘늘 편안하게 자신들만의 문화코드를 소비하던 사람들에게 불편한 자극을 주어 한 번 더 생각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그들의 의도라고 한다. 기존 강남의 문화에 불편하면서도 새로운 자극을 주기 위해 서브컬처를 들이대 보겠다는 이야기인 듯하다. 그 ‘불편한 자극’은 강남이라는 용광로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녹아들 것인가?
해상 수송용 컨테이너 28개를 쌓아서 만들어 놓은 ‘플래툰 쿤스트할레’는 길고도 생뚱맞은 말들을 줄줄이 엮어놓은 묘한 복합체다. 마치 유리병에 흙을 채우고 검은 도화지로 감싼 다음 개미를 넣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드러나는 개미들의 생활상처럼, 환하게 드러난 12개의 단면이 일하는 개미와 관리하는 개미들이 열심히 물고 와서 늘어놓은 자랑스런 수확물처럼 적나라하게 길가에 펼쳐져 있다. 1층은 바와 테이블, 아티스트의 전시 쇼케이스와 여러 행사가 이뤄지는 넓고 높은 공간이 있고, 위층에는 예술가들의 숙소, 사무실 등이 있다.
◇플래툰 쿤스트할레. 28개의 컨테이너를 조합하여 만든 서브컬처 문화공간.
사실 그건 서브컬처가 아니고 무척 ‘비싼 컬처’다. 월마트 같은 곳에서 불과 1달러 정도에 팔리는 흔하디 흔한 캠벨 수프를 소재로 한 작품이 3만 달러 이상을 호가한다. 보기에는 되는대로 그리는 것 같은 것들이 사실 미술을 지배하고 문화를 지배하는 주류가 된 지 한참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런 것들을 하위문화라고 오해하고 있다. 쉽게 재현해 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저들의 위엄이나 가치가 내려오지는 않는다. ‘반항’이 제도권으로 수렴되면서 이제 반항은 없다. ‘플래툰 쿤스트할레’는 그러한 모순에 대한 한 조각의 상징처럼 다가온다.
# 문화란 인간의 지식과 습관의 총체적 형식
문화란 인간이 살아가면서 획득한 지식과 습관의 총체적인 형식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짧은 순간 만들어지고 완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문화라는 말에는 지속성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문화가 지속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무엇보다도 생명력이 담겨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대라는 시간과 자본주의라는 용광로 안에서는 문화도 녹아서 엉뚱한 형태로 만들어진다. 그 안에는 어떤 세상의 주도권을 향한 음모의 냄새가 난다.
인류가 생겨나며 만들어진 문화는 일정한 방향을 가지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흘러가고 있지만 그 주체는 늘 변했다. 문명을 싹 틔운 ‘4대강’ 주변에서 시작한 문화는 유럽을 거쳐 미국까지 끼어들면서 복잡한 양상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총아 미국은 20세기에 들어서며 문화적인 주도권까지 넘겨받는다. 그 전면에 등장하는 사람으로 앤디 워홀과 ‘추상표현주의’로 유명한 잭슨 폴록이 있고, 그 배후에는 이론적인 배경이 되어준 미술이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있었다.
앤디 워홀은 서브컬처를 표방하는 무척 비싼 예술가였다. ‘전략적 서브컬처’는 문화계의 지형을 바꿨으나 문화에 대한 냉소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문화는 사기이고 예술 역시 사기라는 말을 예술가들의 입을 통해 듣는 입장은 무척 난감하다. 그럼 그 문화, 예술이 사기임에도 열광해야하는 우리는 무엇인가. 20세기는 이래저래 중심을 잃게 하는 시대였다. 너희는 여태 속아왔고 지금도 속고 있고 앞으로도 속을 것이야. 인류의 역사 자체가 사기 아니겠어. 아주 농밀한 어조로 우리의 귀에 계속 주문을 흘려넣었다.
결국 예술이 사기라고 부르짖는 예술가들은 많은 부와 명예를 얻었다. 심지어 잭슨 폴록은 사진작가가 요구하는 포즈를 취해주다가 그만 화병이 나버렸다. 자본은 예술가의 자세를 정해주고, 예술가는 그렇게 만들어진 프레임 안에서 성공도 하고 고뇌 없이 편안하게 작업을 하게 되었다. 예술의 순수성과 진정성을 믿고 묵묵히 작업을 하던 많은 작가와 문화인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채 작업을 한다. 20세기는 순수라는 말을 바보스러움과 아둔함으로 덧칠해 버렸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우리는 대체로 속는 것을 더욱 선호한다.
우리가 아는 문화라는 것은 시장에 나와 있는 상품들을 의미한다. 우리는 도저히 뜻을 알 수 없는 물감 범벅의 그림 앞에서, 그 그림과는 도저히 연관을 지을 수 없는 그림의 제목 앞에서 좌절 하면서도 그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문화적이고 싶기 때문이다. 문화는 이름 지어진 어떤 것일 뿐이지, 내용을 가진 사람에게 ‘찌릿’한 전류를 보내는 정신적, 역사적인 산물이 아니다. 건축은 결국 그런 문화라는 이상한 모양의 지붕을 같이 덮고 있는 한 가족이므로 같이 시들시들해지고 있다.
# 건축가들도 낮은 곳으로 임하는 삶 찾아야
15년 전 개봉되었던 ‘바이올린 플레이어’라는 영화가 있다. 아르몽이라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가 주인공인데, 그는 어느 날 속해 있던 오케스트라와 음악적인 견해차로 갈등을 겪고 그곳을 뛰쳐나온다. 주류에서 뛰쳐나온 그는 소수의 청중을 위한 연주가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지하철로 내려간다.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통로에서 연주를 한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위한 기찻길 옆 공부방.
서기 2000년이 되면 새로운 밀레니엄과 더불어 온 세상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모든 생활이 버튼 하나만 누르면 되는 최첨단의 기술로 재무장될 줄 알았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때 우리는 ‘낡은 이야기’에 크게 감동을 받았던 적이 있다. 동화이지만 오히려 어른들이 더욱 감동했던 그 책은 ‘괭이부리말’이라는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담담하게 묶어놓은 작은 분량의 소설책이다.
그 책을 지은 이는 소설가이자 사회운동가 김중미씨다. 인천시 북항 근처 만석동에 공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 여름이었다. 공장들이 들어서며 사람들이 살 곳이 필요했고 갯벌을 흙으로 메우고 조개껍데기로 터를 다져서 만들어놓은 동네가 바로 인천 만석동 괭이부리말이다. 또한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달동네’이기도하다.
그 동네에 1987년에 ‘그저 좋아서’ 들어가 주민들과 살을 부대끼며 살았던 지역운동가 김중미 씨와 최흥찬씨 부부는 들어간지 10년 만에 그냥 방치되고 있는 그 동네 아이들을 위해 ‘기차길 옆 공부방’이라는 공간을 연다. 건축가 이일훈이 설계를 한 그 건물은 지상 3층, 연면적 45평으로 그 동네에서는 꽤 큰 건물이다. “나는 이 땅의 건축가들이 어떻게 만드느냐 라는 문제보다 왜 만드느냐를 먼저 물었으면 좋겠다…. 왜 만드느냐가 내게는 힘이다.” 이일훈은 그렇게 이야기한다.
재료는 콘크리트와 블록 그리고 나무를 섞어서 썼는데 건축적으로 빼어나다거나 공간이 기가 막힌 곳은 아니다. 다만 이루어질 수 없는 금액으로 지어져있고, 아무도 생각하거나 실행하지 못했던 건축적인 실천을 이루어놓았다. 아이들이 자라며, 공부방도 같이 자라서 ‘공부방’은 ‘기차길 옆 작은 학교’(http://gichagil.saramdl.net/)로 성장했다. ‘아이들’ 나아가서 ‘사람들’이 바로 “건축가의 ‘왜(why)’”에 대한 답이다. 굳이 돌보지 않아도 스스로 성장하는 문화, ‘서브컬처’의 힘이다.
문화의 생명력, 문화의 진정성은 제도권이 끌어들이는 순간 혹은 문화라는 허울을 쓰는 순간 증발해버리는 특성이 있다. 자발적이지 않은, 통조림 안에 포장되어 안전하게 식탁에 놓이는 문화는 생명력 없는 플라스틱 성형물이 되어 더 이상 우리에게 필수아미노산과 비타민 등의 영양을 공급하지 못한다. 자발적인 분위기 속에서 낮은 곳으로 임하는 삶, 모든 사람을 위한 예술을 꿈꿀 때 우리는 건강하지 않은 문화, 소비를 위한 생산이 아닌 진정한 ‘문화’의 단서들을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일들이야말로 예술가들, 건축가들이 마땅히 해야 할 근본적인 직능이다.
가온건축 공동대표·‘서울풍경화첩’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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