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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 차맥] (8) 일본다도의 신화학과 탈신화학 (1) 일본다도는 잘짜여진 문화종교이다

눌재상주사랑 2011. 8. 8. 02:13

 

[박정진의 차맥] (8) 일본다도의 신화학과 탈신화학 (1) 일본다도는 잘짜여진 문화종교이다<세계일보>
  • 입력 2011.03.21 (월) 21:33
관련이슈 :박정진의 차맥
일본차회는 정치 권력과 야합한 '살롱 문화'로 日정치의 주무대
'조선의 초암차' 정신 활용했지만 무사다도 바탕 결국 일본식 왜곡
  • 일본의 다도는 중국과 한국에서 차 문화를 받아들인 이래 자신의 것으로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참으로 잘 짜여진 ‘다(茶)의 신화학’을 완성했다. 이것은 무라타 주코(村田珠光·1433∼1502)에서 센리큐(千利休·1522∼1591)에 이르는 이른바 ‘센리큐 신화학’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할복(割腹)을 한 센리큐의 죽음은 그 비극성으로 인해 신화의 완성도를 높였다. 센리큐의 죽음은 마치 일본 다도라는 ‘문화종교’를 위한 순교처럼 느껴진다. 참으로 일본미학의 완성에 어울리는 죽음이었다. 센리큐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무사다도의 차노유(茶の湯)에 함께 빠졌지만 마지막에 그들과 반대의 길인 와비차(侘び茶)를 만들어내고 숨짐으로써 문화인으로서의 임무를 다했다. 센리큐가 아니면 단지 권력자들의 잔치에 불과하였을 다도를 그윽한 문화적 향취가 나는 도(道)로 만들었다. 문화는 그 시대마다 신화를 잘 만들 수 있어야, 즉 신화를 잘 써야 ‘힘(능력) 있는 문화’가 된다.

    ◇무로마치(室町) 막부 3대 요시미쓰가 기타야마(北山) 산장을 짓고, 차회를 연 황금사찰 금각사(金閣寺).
    오사카 남서부 오사카 만에 면한 항구도시 사카이(堺)는 15세기를 전후하여 일본에서 최고로 번성한 항구였다 1469년 명나라로 가는 사신단이 이곳에서 출발할 정도로 번영을 누린 곳이다 일본 다도를 이끈 쌍두마차인 사무라이와 상인이 이곳에서 의기투합하였다 센리큐는 이곳에서 철학과 예술과 종교가 융합된 다도를 만들어낸다

    이마이 소큐(今井宗久) 쓰다 소큐(津田宗及)와 함께 3대 호상(豪商) 중 하나였던 센리큐는 신흥귀족으로 떠오른 무사들과 가장 활발한 교제를 한 다도종장(宗匠)이었다 센리큐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그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차두(頭)로 신임을 받는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센리큐는 전쟁을 반대하고 무사들의 힘을 분산시켜야 하는 히데요시와 정면대결하면서 죽는다 센리큐의 전쟁 반대는 평화주의자이기 때문인 점도 있지만 상인이기 때문에(전쟁을 하면 무역을 못한다) 반대했을 수도 있다

    센리큐 다도는 소위 와비차라는 것인데 쓰우키(數寄)라고도 한다 이것은 4장 반의 다다미를 가진 겉으로는 소박한 초옥차실에서 말차를 마시는 행위를 말한다 그러나 차실에 이르는 길은 화려하고 인공적인(전혀 자연적이지 않다) 정원길이다 다정(茶庭)은 다도가 처음부터 신흥귀족들인 사무라이계급의 과시용 연회로 출발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초옥을 내세우지만 초옥에 도달하는 과정은 호사의 극치에 해당한다 이곳의 다회는 기존 왕실의례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어느 나라든 새로운 권력은 그 추종세력들과 함께 신분 상승을 과시하기 위한 모임과 의례를 만든다 일본의 다도도 그렇게 출발하였다 한 가지 다른 점은 그러한 문화적 차별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차를 택했다는 점에서 정신적인 추구를 엿볼 수 있지만 그것도 선적(禪的)인 것(茶禪一味)을 추구하는 관념적 장식이었다 일본 다도는 겉으로는 정신적인 도(道)를 내세우지만 내심 속물적인 욕망을 감추고 있다

    다회의 주최자는 그 다정을 지나면서 당대의 재력가와 권력자들에게 자신의 부와 호사취미를 과시한다 차옥에 들어가면 데이슈(亭主)와 더불어 한 잔의 말차(抹)를 먹지만 명다기(名茶器)를 과시하고 음미하는 과정을 반드시 갖게 된다 다인에 끼이려면 우선 당대 최고의 다기들을 여러 벌 가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첫째 조건이다 이는 다도가 초암차의 정신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실은 세속적 권력의 과시모임이라는 것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다시 말하면 일본의 다도는 겉과 속이 다르다

    센리큐는 무사들에 대해 내심 저항할 정도로 선불교의 경지를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차노유와 다른 새로운 다도 와비를 정립하려고 노력했지만 이것은 진정 자연과 하나가 되는 초암차의 정신으로 볼 때는 미완성이다 이는 일본 다도가 무사계급의 등장과 선종(禪宗)의 도래 그리고 부와 권세를 누리는 차상들에 의해 구축되었기 때문이다 문화는 항상 하부에 물질문화가 존재하고 있고 상부에 정신문화가 존재함으로써 하나의 완성된 구조 즉 세트를 이룬다 그러나 상부 정신문화가 하부 물질문화를 제대로 다스릴 때 문화적 번영을 이룬다 일본은 센리큐 죽음 이후 문화적 번영 대신에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일본의 말차다도를 배우고 있는 차인들
    차의 길은 불교의 길이고 불교의 길은 차의 길이다 중국 음차문화도 선종의 시작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대두하였듯이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흔히 선종의 초조 달마(達磨)가 뜯어 던진 눈썹이 차나무가 되었다고 하는 전설은 그러한 사정을 말하는 것이다 달마의 등장이 위진남북조 시대의 양무제(武帝)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보면 차는 불교와 더불어 촉진되는 계기를 마련하고 그 후 일반의 음료로 확산하였다 그 이전에는 대체로 도가에서 약용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도가에 차는 불로장생(不老長生) 선약(仙藥)이라는 말이 있다

    일본 불교의 길은 차의 길(Tea Road)이다 일본 불교의 시작을 상징하는 최초의 불상은 아쇼카(飛鳥) 대불(大佛)이다 쇼토쿠(聖德) 태자는 대불을 건조하고 법륭사(法隆寺)도 창건했다(607년) 군중행사에 차를 사용했다는 최초의 기록은 한참 후(720년)이다 제정(祭政)일치 사회가 제정분리 사회로 된 뒤 제(祭)에 속하는 종교는 세계사적으로 정치의 하위에 들어가고 정권의 정당화를 뒷받침함으로써 정치적 특혜를 받게 된다 불교도 권력과 밀착하였으며 차도 권력에 가까이 가게 된다

    나라()에서 헤이안(平安)으로 천도를 한 것은 간무천황(桓武天皇) 때(794년)이다 헤이안 시대에 불교 개혁이 이루어졌으며 그 중심에는 일본 천태종(天台宗)의 개조인 전교대사(傳敎大師) 사이초(最澄)과 진언종(眞言宗)의 개조인 홍법대사(弘法大師) 구카이(空海)가 있다 사이초는 절강성의 천태산에서 깨달음을 얻고 805년에 귀국하고 구카이는 장안의 청룡사에서 밀교를 배우고 806년에 연이어 귀국했다

    특히 구카이는 당나라에서 차종을 가지고 와 히요시다원(日吉茶園)을 만들었다 사가천황(嵯峨天皇)이 차를 마시고 산으로 돌아가는 그를 전송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헤이안 불교는 가마쿠라(鎌倉) 불교로 이어졌다 가마쿠라 시대(11851333)는 가마쿠라에 막부가 들어서고 교토의 조정과 권력을 나누어가진 1192년부터 본격화된다(이때 들어선 막부는 에도막부가 막을 내리는 1686년까지 약 500년간 계속된다)

    한편 대륙에서는 당(唐)이 망하고 송(宋)이 들어서고 한반도에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들어설 즈음 일본 불교는 독자적인 행보를 한다 천태종과 밀교에서 차와 인연을 맺은 일본 불교는 다시 선종과 인연을 맺는다 그 변화의 중심에 에이사이(榮西)가 있다 에이사이는 중국 임제종(濟宗) 황룡파(黃龍派)의 선을 전수받고 돌아와 흥선호국론(興禪護國論)을 주장한다

    에이사이는 일본 선종의 개조이자 송나라에서 차종을 가져와 오늘의 일본차를 있게 한 공인시조이다 일본 최초의 다서인 끽다양생기(喫茶養生記)를 저술한 차학의 원조이다 에이사이는 끽다양생기에서 차를 바치지 않으면 그 불도는 성취되지 않는다고까지 선언한다

    가마쿠라는 무로마치(室町) 시대로 넘어간다 무로마치 시대는 전국시대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다 남조와 북조로 분열하여 2명의 천황이 서로 법통을 따지며 투쟁을 벌였으니 말이다 무로마치 막부 3대 요시미쓰(足利義滿)는 천황의 도시인 교토를 점령하고 기타야마(北山) 문화를 만들었다 갑자기 졸부가 된 사무라이 집단이 신분에 걸맞은 천황가나 귀족층의 공가에 필적할 새로운 귀족문화를 형성하는 것이 급했다 여기에 차가 들어간 셈이다 차회는 이때부터 권력자의 모임이 된다

    요시미쓰는 기타야마 산장에 금각사(金閣寺)라는 황금사찰을 짓고 이곳을 산장으로 이용하면서 차회를 열었다 요시미쓰는 우지(宇治)에 차를 심게 하고 다원을 만들었다 당시 다원 조성 붐이 일어나서 7개의 다원이 생겼다고 한다 기타야마와 견줄 만한 문화가 바로 히가시야마(東山文化)이다

    동산문화는 8대 장군 요시마사(足利義政)가 히가시야마 산장에 기거하면서 처음으로 차회의 장식과 점다방식에 대한 원칙을 만들어서 일본 다도(茶道)에 접근했다 그의 문화시종관인 예인(藝人) 노아미(能阿彌)는 일본식 점다법과 차인이 입는 복장과 차대의 설치 다구의 종류와 배열 그리고 행다의 규칙들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일본 다도가 그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도 말한다 무가(武家)의 다도는 귀족들의 공가(公家)에 뒤지지 않기 위해 차와 차회를 활용했다

    일본차회는 초암(草庵)이라는 말에서 풍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소박한 차문화가 아니라 정치권력과 야합한 일종의 살롱문화였으며 일본정치의 주무대가 된다 그 뒤 전국시대를 통일한 오다 노부나가가 차를 중시하고 그 전통을 이어받은 히데요시가 차를 숭상한 것은 차회야말로 바로 권력의 과시와 그것을 공고히 하는 기제로서 작용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메이지유신(明治維新)도 차회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다도의 센리큐 신화의 이면에는 이러한 무사다도의 어두운 면이 있다 센리큐는 그의 생의 후반기에 이러한 차노유에 염증을 일으켜서 이를 개선하려고 무라타 주코에서부터 전수받은 조선의 초암차 정신을 활용했지만 결국 그것을 일본식으로 왜곡하고 말았다 따라서 오늘날 일본 다도에 심취하는 것은 조선의 초암차의 정신을 왜곡하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정반대의 타락한 차정신에 몰입하는 것이 될 위험마저 있다

    센리큐의 할아버지인 다나카 센나미(田中千阿彌)는 쇼군의 도보(同朋쇼군이나 다이묘의 측근에서 예능이나 다도에 종사했던 사람)였으며 아버지 대에 이즈미 구니(和泉國)의 사카이로 이주했으며 센나미에서 센(千)을 뽑아 가명(家名)으로 삼았다 리큐는 처음에 다도를 노아미류(能阿彌流)의 기타무키 도친(北向道陳)에게 배웠으나 곧 무라타 주코의 제자의 제자인 다케노 조오(武野紹鷗)에게 사사함으로써 다도종가의 발판을 마련한다 그는 교토의 대덕사(大德寺)에서 선(禪)도 배웠다

    리큐는 히데요시에게서는 봉토를 받았으며 항상 측근에서 차에 관한 모든 일을 지휘하는 등으로 정치와 외교에도 참여하여 권세를 누렸다 60세경부터 다사(茶事) 개혁에 전념하여 인재들이 앞다투어 그의 문하에 들어왔다 그가 임진왜란 한 해 전인 1591년 히데요시와 충돌하는 바람에 결국 죽는다 자신의 목상(木像)을 절에 안치했다는 것과 자작한 차도구가 비싼 값에 팔린 것이 처벌의 구실이었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지금 일본다도는 센리큐의 후손으로 구성된 3대 다도 종가가 지배하고 있다 일본은 동아시아 차 문화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그동안 많은 노력을 해왔다 적어도 500여년 차의 전통과 3대 다도 종가를 유지해온 셈이다 일본의 다도는 일본의 젠만큼이나 일본이 공을 들여서 자신의 것으로 재창조해내는 데에 성공한 분야이다 일본 다도는 무사도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일본이 동양문화의 정수를 이렇게 자신의 것으로 가꿀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근대 문화적 자각을 이룬 덕분이다 오늘날 서양 사람들은 다도나 젠을 중국이나 한국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 다도를 알면 알수록 다도는 한국의 브랜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까닭은 문화의 집단 무의식과 의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본 다도의 상징이 된 화경청적(和敬淸寂)의 화(和)는 바로 일본을 상징하는 말이다 일본이 왜(倭)에서 일본(日本)으로 바뀌면서 채택한 건국정신이 바로 대화혼(大和魂)이다 일본이라는 이름도 실은 야마토(大和)의 한자표기이다 일본 고유의 정형시는 와카(和歌)이다 화(和)는 일본정신이고 집단무의식이다

    다도가 화에 중점을 두는 것은 명목상으로는 다실 안에서의 사회적 평등을 실천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일본 다도에는 정객(正客상좌에 앉을 손님)과 차객(次客두 번째 자리에 앉을 손님)의 자리가 있다 이는 최소한의 질서와 역할을 고려한 때문이다 일본의 화는 질서 속에서의 화를 말한다 질서를 지키는 것은 일본문화의 가장 큰 특징이다 무질서에 가까운 질서라는 것은 일본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래서 화는 형식적이며 규격적이다 진정한 의미의 중화(中和)라거나 평화(平和)라는 것과 거리가 있다

    센리큐는 다도를 통해 무사들의 권력을 견제하려고 한 것 같다 비록 그 때문에 죽음을 샀지만 말이다 그는 다도를 정립해가는 과정에서 다실의 입구를 거의 기어들어가게 함으로써 평등을 구현하려고 했다 다다미 넉 장 반짜리의 자그마한 넓이를 가진 초가지붕에 오두막집 양식으로 정형화해 가면서 소위 니지리구치(躪口)라는 가로 63 세로 66 크기의 나무로 된 입구 문을 고안한다

    이는 다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주로 신분이 높은 사무라이들이거나 돈 많은 상인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권력과 시욕을 누르기 위한 센리큐의 전략이었다 무사들은 목숨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칼을 다실에 들어가기 전에 니지리구치 앞에 놓아두어야 했다 참으로 기발한 권력견제 장치이다 이것은 일시적이지만 무사들의 무장해제이다 칼을 목숨보다 중하게 여기는 무사들에게는 결코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 아니었다 센리큐의 죽음은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것에 대한 무사들의 반감의 표출일 수도 있다

    일본 다도에 분명 센리큐와 같은 선차(禪)의 정신이 흐르고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것은 신도와 사무라이의 두꺼운 외피에 둘러싸여 그 흔적과 명맥을 발견하기조차 어렵다 규격화된 일본의 다도를 보면 숨이 막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일본 다도는 처음에는 그것의 형식미에 매료되어 그럴듯해 보여도 조금 지나면 싫증이 나게 된다 그만큼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본 다도는 초암차가 아니라 무사다도를 바탕으로 한 문화종교이다

    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차에세이 = 매화꽃 한송이와 어울리는 차

    한 차인이 한복을 곱게 입고 다소곳이 앉아 다기를 잡더니 차를 우려내기 시작한다. 그 다인의 옆에는 찻잔이 놓여 있고 그 잔 위로 매화 꽃 한 송이를 띄워 차 맛을 음미하는 순간 활짝 핀 매화 가지 사이에서 피어오른 매향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갈 즈음 차향에 흠뻑 빠져든다.

    지금 남녘에서는 매화향기가 온 산천을 퍼져나간다. 매화는 충절의 상징으로 선비의 기개와 의지를 나타내더니 오늘은 눈 밝은 차인들을 매화가 필 무렵 매화나무 아래에 빙 둘러앉아 찻자리로 이끌어 내면서 눈으로 감상만 하던 매화꽃은 어느덧 찻자리의 꽃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매년 3월 중순 남녘은 매화 향에 흠뻑 빠져들고자 매화차회를 열어 다심(茶心)을 일으키게 한다. 매화는 기나긴 겨울을 이겨내고 봄이 되면 늙은 가지에서 새싹을 틔워 매화꽃이 필 때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남녘의 고목에서 피어 올린 매화는 단연 으뜸이다.

    그중 내소사 봉래루 누각 사이로 힘차게 뻗은 매화꽃이 일품이다. 그 누각 위에 올라 매화 향을 맞으며 맛본 차 맛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봉래라는 말이 말해주듯 봉래산은 원래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러 갔던 곳이다. 일명 영주산, 방장산이라고도 불린다. 그 이름을 딴 봉래루에 앉아 매화 차 향기에 흠뻑 빠져본다. 

    글·사진=사진작가 운암(雲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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