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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 차맥] (6) 다도는 한국의 브랜드가 될수없다

눌재상주사랑 2011. 8. 8. 02:08

[박정진의 차맥] (6) 다도는 한국의 브랜드가 될수없다<세계일보>
  • 입력 2011.02.21 (월) 17:55, 수정 2011.02.23 (수) 11:58
① ‘일본 다도’의 밖에서 한국의 차 문화를 보자
식민지·사대주의 깃든 ‘다도’ 잊고 새로운 차문화 논의할 때
  • 한국의 차(茶) 문화를 총칭하는 이름을 두고 차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해보았을 것이다. 국제적인 차 행사장에 가면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차인들이 쓰는 용어는 서로 대동소이하다. 때로는 구별이 되지 않아서 혼란스럽다. 다도, 다법, 다예, 다학, 다례, 선차, 차선 등등. 이유인즉 한·중·일 3국은 같은 한자문화권이고, 고대에서 세 나라 사이에 이주나 교류에 의해 문화를 공유해왔기 때문이다. 최근 일각에서는 차살림, 차레, 풍류차 등 순우리말이나 전통성이 강한 용어를 사용하자는 주장도 있다. 중국에서 발원한 차와 차 문화는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되어갔다. 물론 중국에서 출발하였더라도 다른 토양에서는 다른 문화로 열매 맺을 수밖에 없다. 3국의 차 문화는 표층적으로는 같은 것 같으면서도 심층에서 보면 현저하게 다르다. 그러면서도 한편에서는 서로 보기 좋고 마음에 들면 베끼기도 성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화경청적이라는 묵적(墨蹟)을 걸어놓고 차 표연에 들어가려고 하는 일본 차인.
    최근 국제선차대회에서 중국 측이 좌식다법을 시연해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중국은 본래 침대와 입식생활을 하는 나라이다. 그런데 차탁에 둘러앉는 입식(立式) 대신에 바닥에 앉아서 좌식(坐式)행다를 선보였다. 아마도 한국의 좌식행다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한국과 일본의 차인들은 묘하게도 국제대회에 참가하면 중국 다음에 2위 자리를 놓고 경쟁이라도 하듯 서로 긴장하게 된다. 일본과 경쟁하다 보면 한국은 어느새 약간 불리한 입장에 빠진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 ‘다도’의 영향을 크게 입었기 때문이다. ‘한국 다도’라고 내놓더라도 어딘가 일본 냄새가 난다. 그래서 보다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한국의 다법을 찾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국 다도’에 대한 새로운 명칭 정립과 함께 그것에 걸맞은 행다(行茶)의 모습, ‘차’ 철학의 필요성이 대두하고 있다.

    국제적인 차 대회나 축제, 그리고 크고 작은 국제적인 찻자리는 사적인 자리와 다르다. 여러 차의 퍼포먼스와 행다의 모습을 보지만, ‘바로 그게 한국적이야’라고 레테르를 붙일 만큼 마음에 드는 것을 찾기란 어렵다. 어딘가 어색하고, 굳어 있는 억지 춘향의 표정이라든가, ‘겉치레의 의식’ ‘몸에 익어 있지 않은 동작’ 등이 눈에 거슬린다. 일상적이면서도 깊이가 있고, 자연스러운 차 표연(表演)을 보기란 쉽지 않다.

    차인 중에는 일본 다도를 우리의 다도로 생각하는 차인도 있는 게 사실이다. 잘 정리되어 있는 일본 다도를 보면 부럽기 짝이 없다. 일본은 오늘의 다도를 위해 천여 년 동안 축적을 해왔다. 실지로 일본 문화는 세계를 대표하고 있는 것이 적지 않다. 차도 예외는 아니다. 국제 행사장에서 일본에 주눅이 들어있는 한국의 차인들이 많다. 그러나 동아시아 차의 역사를 알고 보면 그렇게 주눅 들 일도 아니다.

    일본 다도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세련되게 잘 다듬어져 있다. 사무라이 정신이 깃든 전통 법식도 있고, 다도 철학도 잘 갖추어져 있다. 외래문화를 철저히 소화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내는 일본 문화의 특성과 장점을 여기서도 느낄 수 있다.

    동아시아 나라들 가운데 한국과 중국의 고대사를 보면 대체로 상고시대에는 동이족이 먼저 문화적으로 융성하였고, 주(周)나라 등장 이후 한족으로 중심이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중심이동 과정에서 상고의 삼황오제를 비롯하여 오늘날 우리가 중국문화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 고대문화가 중국문화의 옥상옥으로 덧씌워지고, 한국은 중국문화의 신화체계에 편입된다. 그 후 한국문화의 정체성 확인작업을 위해 단군신화가 기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주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문화가 건너간 경향을 보인다. 사안에 따라서는 중국에서 직접 문화가 전파되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한국에서 해석하고 걸러진 것들이 일본으로 들어갔다. 이는 오늘날 일본에서 해석하고 걸러진 서양문명을 한국과 중국에서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일본 문화의 원류에는 항상 한국적인 것이 숨어 있다. 따라서 한국문화의 원형을 찾아가거나 ‘보다 한국적인 것’을 복원해가는 방법 가운데 가장 추천할 만한 것이 중국이나 일본의 현재 문화를 비교 검토하면서 상대적으로 다른 우리의 것을 찾아가는 방식이다. 마치 DNA 지도를 통해 동식물의 순종을 찾아가는 방식과 같다. 한국 고유의 다법을 복원해가는 데 있어서 가장 우선하여야 할 것이 일본 다도(茶道)로부터의 탈피다. 우선 보기 좋고, 먹기 좋다고 따라가다 보면 나중에 그 맛에 중독되어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일본 국보가 된 기자에몬 이도(井戶)다완.
    개인적으로 일본의 다도를 좋아하고, 그것에 매료되는 것은 말릴 이유가 없다. 개인은 얼마든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국적과 상관없이 즐길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이며, 도리어 문화의 다양성과 잡종강세를 위해서도 권장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집단의 문화적 정체성은 개인과 달리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보존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전통은 소리치지 않아도 형성되는 ‘제2의 자연’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형성되는 것이 전통은 아니다. 누군가는 바로 전통의 확립을 위한 선각적 노력을 하여야 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스스로 차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 각자는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다도’라는 단어는 실은 일본에서 처음 쓴 말은 아니다. 문헌상으로 ‘다도’가 처음 등장한 것은 중국 당대의 선승 교연(皎然)의 ‘음다가(飮茶歌)’에서다. 일본의 저명한 차 연구가 구라사와 유키히로(倉澤行洋) 고베대 명예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교연은 그의 시 가운데, 차를 마시면 마음이 맑아지고 정신이 맑고 밝아져 번뇌가 사라지면 이윽고 ‘득도(得道)’에 이른다고 노래하고 있다. ‘차를 통한 득도’ 이것이 교연의 ‘다도’이다.”

    교연과 육우(陸羽·733∼804)는 친구였으며, 차에 있어서는 교연은 도리어 육우의 스승이었다. 육우의 ‘다경(茶經)’은 교연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다경’을 씀으로써 육우는 오늘날 다성(茶聖)으로 불리게 되었고, 육우의 다법은 동시대에 살았던 봉연(封演)의 저서에서 ‘다도’로 불렸다.

    그럼에도 오늘날 ‘다도’라고 하면 일본의 다도를 떠올린다. 중국도 ‘다도’라는 말을 쓰기를 꺼린다. 아마도 그러한 이면에는 일본의 브랜드라는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일본이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공을 들였고, 미학적 완성을 시킨 때문이다. 국제사회에서 ‘다도(茶道)’는 ‘젠(Zen)’과 함께 일본의 브랜드이다.

    우리가 ‘다도’라는 이름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일제 때 교육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로 차학자인 김명배 선생에 따르면 일본 다도교육은 1926년 6월1일 기후(岐阜)현 출신의 쓰다 요시에가 인천공립고등여학교에 다도강사로 부임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1940년대 전국 47개의 고등여학교와 6개 여자전문학교에서 우라센케와 오모테센케 식의 좌식 말차 다도교육을 하였다. 서울에서 다도교육을 한 전문학교 수준의 학교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 숙명여자전문학교, 경성보육학교, 청화여숙, 덕화여숙(인덕대학)이었다.

    차계의 원로 중진들은 ‘일본다도’를 벗어나야 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다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데는 주저한다. 여기에는 동아시아의 철학과 정신을 표현하는 데에 ‘도(道)’라는 글자보다 포괄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은 바로 문화적으로 앞서 있었기 때문에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용어를 선점하였을 것이다.

    ◇국제선차대회에서 말차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는 일본 차인.
    그렇다. 다도라는 용어로는 항상 일본의 아류밖에 되지 않는다. 인간사회의 정체성이라는 것도 실은 말과 철학에서 비롯된다. 다도를 고집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용어가 정체성에 얼마나 심각하게 작용하는지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제국을 경영해본 중국은 이 같은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다도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다도’라는 말을 쓰는 한 아무리 최남선(1890∼1957)의 말처럼 “고려의 차와 다도는 북의 거란과 남으로는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라고 말하더라도, 혹은 “일본 초암차실(草庵茶室)의 원류는 조선의 남방, 특히 전라남도의 민가나 승암이다”라고 하더라도 결국 일본의 족쇄를 벗어나지 못한다.

    ‘다도’와 ‘젠’은 한·중·일이 공유하는 ‘차의 정신’과 ‘선(禪)불교’일 뿐이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다. 오리지널은 물론 중국에 있지만, 그것을 현대화한 것은 일본이기 때문이다. 현대는 오리지널보다 브랜드가 우선이다. 누가 현재를 기점으로 실생활에 맞게, 자신의 문화에 맞게 잘 만들었고, 잘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 일본은 얄미울 정도로 동양문화의 정수를 자신들의 세련된 문화로 구성해내는 데 성공했다.

    일본의 재빠른 근대화나 제국주의의 성공도 실은 그러한 문화능력에 힘입은 바 크다. 그래서 과거에는 중국을 문화적으로 카피(copy)했지만, 현대에는 일본을 카피하고 있다. 나라 간의 침략과 정복이라는 것도 실은 선악(善惡)의 문제나 가부(可否)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能力)의 문제이다. 문화의 주도권도 마찬가지이다.

    한·중·일 문화를 놓고 볼 때 한국문화의 중간적 특성이 때로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중간적 특성이야말로 세계적인 것을 탄생시킬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문화의 중간적인 성격이라는 것이, 지리적으로 중간에 있다는 것이, 문화의 융성기에는 양쪽을 통합하거나 거중 조정하는 주체적인 입장에 설 수 있다. 물론 그 반대로 문화의 쇠퇴기에는 양쪽에서 샌드위치가 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미궁에 빠지는 것이 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한국은 지금 국운융성기에 있다. 따라서 차 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할 매우 좋은 기회이다. 한국은 이도(井戶)다완을 만든 나라이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가진 자연미를 섬길 줄 모르고(이는 자신이 살고 있기 때문에), 일본은 그러한 그릇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섬길 줄 아는(살지 않기 때문에 도리어 대상으로 음미하고 미학적으로 승화시키는) 그런 나라이다. 양국은 교차관계에 있다.

    동양미술사학자인 존 코벨 박사는 1982년 신문에 기고한 ‘한국의 고려다완과 일본 다도’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교토에서 만약에 특별한 차회(茶禮) 행사가 있었다고 하자. 그럴 때 십중팔구 차를 마신 후 손님들은 찻그릇을 두 손에 받쳐들고 조심스럽게 돌려가면서 모래가 두둘두둘 두드러져 나온 바닥과 혹처럼 불거져 나온 표면을 장식한 균열을 손가락으로 만져 보며 감상하는 시간을 가진다. 그럴 때 흔히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는 감탄사가 ‘고라이자왕’이다.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고려다완, 즉 한국에서 만든 찻그릇이라는 뜻이며 일부 일본인들이 신(神) 바로 다음으로 떠받드는 대단한 문화재이기도 하다.”

    존 코벨 박사는 “일본 문화의 뿌리는 한국이고, 한국의 일부 고고미술사학계가 스승의 이론을 뒤집는 유물이 나오면 발표를 하지 않거나 재매장하는 경우가 있다”고 학자적 양심으로 비판했던 인물이다.

    우리는 존 코벨 박사에게서 중요한 두 가지 시사점을 얻게 된다. 한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스승(혹은 원로나 선배) 때문에 비겁하게 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처음부터 ‘일본 다도의 틀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은, 혹은 남의 것으로 잘난 체하거나 거드름을 피우는 것은 참으로 못난 식민지 근성이다. 이는 사대주의의 전형적인 예이다. 사대주의자들은 흔히 문화를 상류층이 독점하는 데 힘을 쓰는 반면, 국민생활화하는 것을 도리어 방해한다. 그 까닭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의 기호로 문화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다도라는 말 속에는 식민지 근성과 사대주의가 숨어 있다.

    이제 일본 다도의 밖에서 한국의 차문화를 정립하여야 한다. 한국도 일본이나 선진 구미 제국의 틀 밖에서 우리 문화를 논할 때가 되었다. 차인들은 문화적 독립전선의 맨 앞에 서야 한다. 일본 다도의 밖에서 한국의 차 문화를 찾아들어가 보자. 그러면 일본 다도의 안에서 바라볼 때보다 훨씬 더 수월하게 한국의 차문화를 정립할 지름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 차포토에세이= ‘소우주 보는 듯한 말차 한 잔’

    한 차인이 공손히 앉아 차선을 잡더니 일도양단의 자세로 차를 우려내자 순간 다완 사이로 푸른 빛깔의 거품이 일어나더니 이내 사라져갔다. 그 다완을 공손히 두 손으로 잡고 물끄러미 텅 빈 우주를 바라다봤다. 이 장면은 고려시대 유행한 말차 행다의 참모습이다. 사실 일본의 전유물처럼 되어버린 말차는 우리 차문화의 하나로 조선을 건국하면서 사라져갔다. 그러나 사실 일본이 국보로 정해버린 기자에몬오이도(喜左衛門 大井戶)는 조선 서민의 막사발로 때론 차를 마셨던 차완으로 익히 알려졌다. 그 다완에 감격한 일본은 도자기 전쟁이라고 불리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바 있다. 그 반증으로 야나기 무네요시는 “일본의 수많은 명공들이 위로는 고에쓰 다기부터 아래로는 리쿠(樂)다완까지 이도의 운치를 좇았으나 대명문인 기자에몬이도를 뛰어넘지 못했다”고 통곡한 바 있다. 선조의 숨결이 살아 있는 조선의 혼이 담긴 다완에 말차 한 잔이야말로 조선을 깨우는 것 같았다. 이제 차인들의 노력으로 다시 말차 다도가 부활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사진·글=사진작가 운암(雲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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