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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19> 서사의 회복

눌재상주사랑 2011. 8. 12. 16:33

[부부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19> 서사의 회복<세계일보>
  • 입력 2010.10.26 (화) 17:46
  • 파편화한 현대성

    현대회화를 열어놓았다고 평가받는 폴 세잔이 그린 ‘생트 빅투아르(Sainte Victoire) 산’이라는 그림이 있다. 조각보를 기워 붙여놓은 것 같은 그 그림은 파편화한 빛의 이미지이며, 파편화한 색의 이미지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안에 ‘현대성’이 있다고 한다. 현대 독일문학의 대표작가 중 한 사람인 피터 한트케는 세잔의 그림을 보고 감동하여 산을 직접 찾아가 보고, 그림이 실제 산보다 더 절묘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고백한다. 리처드 베르디 또한 세잔의 그림을 보면서 마치 산이 평원 위에 무중력 상태로 떠 있는 듯하며 사람과 신 사이에서 정신적인 거간꾼 노릇을 하는 듯하다고 극찬했다.

    해발 1000m의 생트 빅투아르 산은 프랑스 액상 프로방스 동북쪽 평원에 솟아 있다. 그 인근의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난 세잔은 마치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화가가 되겠다며 파리로 올라가 그림을 그렸다. 다만 그에게는 천부적인 재능은 없었던지, 그냥 보기에도 데생의 기본은 조금 부족해 보인다. 대신 성실함과 열정이 있었고, 그의 주변에 피사로, 모네, 드가, 르누아르 같은 재능이 뛰어난 친구들이 있어서 그들과 어울려 다니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세잔은 나중에 인상파라고 이름 붙여진 그 친구들과 모여 앉아서 나누었던 그림에 대한 많은 논의들을 직접 시도해본다. 화가로 성공하는 일에 대해 한계를 느낀 세잔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몰두했던 말년의 작업들은, 그를 현대미술의 비조(鼻祖)로 손꼽히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세잔이 생트 빅투아르 산을 그린 그림은 유화가 44점, 수채화가 43점이나 된다. 이후 세잔의 여러 가지 실험은 브라크와 피카소로 이어지며 입체주의로 발전해 나간다.

    스위스 화가 파울 클레는 칸딘스키 등과 함께 추상회화의 문을 열었다. 그는 “예술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듯 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작업을 했다 한다. 가령 ‘튀니지 정원(Tunisian Gardens)’은 마치 물감 색깔 체크하듯이 화면을 분할해 놓고 칠해놓은 그림인데, 제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인다.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사각형의 반복을 덮은 몇 개의 삐죽거리는 선들과 색채의 향연, 그 안에도 ‘현대성’이 있다.

    그렇다면 현대성은 저렇듯 ‘파편화’됨에 있는 것인가? 인간을 끈질기게 동여맸던 완전성이라는 강박을 훌훌 벗어던진 것, 그것인가?

    ◇조선 정조시대 총체적 지식의 완성품인 수원 화성. 화강석과 벽돌을 함께 조합한 성벽은 마치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픽셀 개념을 미리 예견한 듯 현대적 디자인 어휘에 못지않은 세련된 형태다.
    이야기의 파편들을 이어 맞추다


    여태껏 본 영화 중 평점을 매겨본다면, 내가 진정 최고로 꼽는 영화는 바로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1994)이다. 사실 평소의 취향대로라면 유혈이 낭자한 영화나 갑자기 뭔가 화면에 튀어나와 사람을 놀라게 하는 영화는 절대 사양하는 편이지만 타란티노만은 예외다. 처음에 난폭하지만 잔인하지 않은 희한한 영화라는 소문만 듣고 그의 영화가 무척 궁금했으나 도저히 극장에 보러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컴컴한 극장에서 끔찍한 장면을 피하지 못하고 만나야 하는 곤경에 처하기 싫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 잠시 채널을 돌려 피해가며 볼 수 있는 케이블 텔레비전은 정말 좋은 매체이다. 그렇게 어느 추석 날 오후 거실에서 우연히 타란티노를 만났다.

    타란티노의 영화가 다 그렇지만, 펄프 픽션은 특히 더 복잡하고 정신 사납다. 타란티노는 시간과 사건을 조각조각 나눈 다음, 제 마음대로 뿌려놓았다. 머리에 대고 총을 쏘고, 피가 튀고, 마약을 삼키고 기절하는 그런 곤란한 장면들을 지나치다 싶게 모아놓고도, 결국은 구원이라는 주제로 맛있게 버무렸다.

    어설픈 강도 허니버니와 펌킨, 심각하면서도 능숙한 깡패 빈센트와 줄스, 섬뜩한 보스 마르셀러스와 한물간 복서 버치 등 등장인물들은 마치 포크댄스를 출 때 빙빙 돌면서 파트너를 바꾸며 춤을 추듯 영화를 정신없이 가로지른다. 빈센트와 줄스는 허니버니와 펌킨을 구원하고(죽이지 않고 살리고), 버치는 도망치는 자신을 추격하던 원수 같은 마르셀러스를 구원하고(변태들로부터 구해주고), 줄스는 신에 의해 구원을 받으며(빗발처럼 쏟아진 총탄이 모두 그를 피해간다), 그 외에도 빈센트 역의 존 트래볼타는 우마 서먼을 마약으로부터 구원하고, 결정적으로 거의 잊혀진 배우였던 그는 이 영화로 구원을 받아 화려하게 재기하여 지금은 자가용 비행기까지 타고다닌다.

    정말로 구제불능의 감독이 만든 구제불능의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먼저 있었던 일이 뒤로 가고, 나중에 있었던 일이 앞에 나오고, 결국 마지막 장면이 영화의 제일 첫 부분의 앞 장면이 되는 복잡함에 잠시 어리둥절하긴 하지만, 우리는 꿋꿋하게 뒤바뀐 앞뒤를 순서대로 배열해서 인과관계를 정립하게 된다. 내용이 뚝뚝 끊어져 눈앞에 던져지고, 시간이 순서 없이 배열되는 그런 장면들은 굉장히 낯설면서도 익숙한 풍경이다. 그건 우리가 매일 겪는 일이 아닌가. 매일 밤 꾸는 많은 양의 꿈들의 형식이 그러하듯, 우리는 기억날 듯 말 듯 한 시간적 전도와 이야기의 파편들을 주워 모으고, 각자 알아서 기워 내야 한다. 파편화된 정보, 파편화된 사건들, 그 안에 녹아든 파편화된 현대성….

    ◇세잔의 ‘생트 빅투아르 산’. 마치 산이 평원 위에 무중력 상태로 떠 있는 듯하다.
    서사의 회복이 필요한 시대


    한때 유행했고 지금도 어디선가 이름 지어지고 있는 ‘신지식인’은 파편화한 인간형을 보여준다. 학력이나 인맥 같은 제한 없이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겠다는 출발은 좋았지만, 보편적 세계관과 총체적 지식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낮아지고, ‘잘하는 것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식의 좁은 시각을 전파하게 된 것이 문제다. “자본주의는 사람을 파편으로 만들고, 다시 흡수하는 능력이 있지.” 백기완 선생의 말이다. 담벼락에 병을 던지면 산산조각 나듯, 역사적인 시공간을 살아왔지만 주체성을 상실하면 조작 대상, 파편이 되는 거라고. 개인이 파편화하고, 지식도 파편화하여 전문적이지만 종합을 하지 못하는 지식불구자가 되어 자신의 몸이 조금씩 지워지는 것도 모르게 된다는 이야기다.

    싸이월드 미니홈피의 시대도 지나고 블로그의 유행도 지나고 트위터가 대세라 한다. 고구마 줄기 뽑아낼 때 딸려 나오듯 줄줄이 매달린 말들의 파편. 다들 140자의 제한된 글자 수에 맞추지 못해 안달을 한다. 기쁜 일도, 화나는 일도, 반짝 이벤트도, 희귀 혈액형을 구한다는 소식도, 누군가 유서 써놓고 나갔으니 빨리 찾아내야 한다는 절박한 사연도 모두 140자 안에서 소용돌이친다. 말의 길이가 파편화되면서 생각의 크기도 파편화된다. 앞뒤 문맥 뚝 잘라먹고 포털 사이트의 메인 페이지에 뜨는 기사들에 ‘낚여’, 사람들은 믿지 못할 소문과 근거 없는 비방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닌다. 사건만 있고, 사유는 없다.

    서사를 강조하면 ‘스토리텔러’로 몰리고 촌스러운 사람 취급당한다는 이야기를, 신문에서 대담하는 소설가들을 통해 들었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그 경향이 강조되어서 ‘세련된’ 소설가는 무릇 서사를 극복하고 섬뜩하다든지, 눈이 튀어나올 정도의 강도를 가진 소재를 던져 넣어야 상도 받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다는 그런 이야기로 들린다.

    그러다 보니 소설에서 이야기는 사라지고 강하기만 한 이미지들과 전혀 맥락이 닿지 않는 상황들만 우리에게 던져질 뿐이다. 20세기 접어들며 기존의 질서에 대한 반항과 새로운 패러다임의 제시로 시작된 예술적 각성이 이제 와서는 하나의 딱딱한 형식이 되어버리고 그 형식 안에서는 어떤 인간도 없고 감성도 없다.

    서사를 회복하자. 단절적이지 않은, 파편화하지 않은 ‘상식적’인 선에서의 공감 가능한 이야기를 하자….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가 왜 너무나 어려운 이야기로 되는 걸까.

    ◇파편화한 도시성을 상징하는 서울 을지로 도심재개발구역.
    수원 화성, 총체적 지식의 발현


    현대 한국 건축에서도 그런 경향이 어느덧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인간적 스케일과 자연과의 교감, 아름다운 비례는 촌스러운 이야기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마치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나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그리는 화가를 찾아보기 힘들듯이, 건축도 사람이 담기는 풍경과 도시든 전원이든 자연과의 교류를 추구한다는 것은 케케묵은 낡은 발상으로 치부된 지 오래다.

    그래서 우리의 건축에는 의미가 모호한 국적불명의 알레고리들만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다. 서울 한복판 을지로1가의 한 블록을 쓸어내고, 싸우듯이 들어서고 있는 고층 빌딩들을 볼 때 그런 생각이 든다. 1980년대 말부터 대표적인 서울시 도심 재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차곡차곡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해서 현재까지 그 블록이 계속 메워지고 있다.

    사업의 성공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일부 성장론자들의 시각에서 볼 때는 낙후되고 후미진 골목이 없어져 도시가 깨끗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 사업은 인근 블록으로 확장될 기세이다. 다행히 작금의 경제상황이 그 발육을 억제하여 주춤하고 있지만 을지로 블록은 재개발의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물론 그 안에는 어떤 종류의 도시적 연속성이나 맥락이란 없다. 그저 최고의 용적률과 수익성과 건물의 인지성만이 있을 뿐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도시의 구조가 파편화되어 있다.

    도시는 서로 간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각각의 개체들이 다른 개체와 충돌하고 관계를 맺으며 이를 통해 스스로의 개별성을 확보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블록 안에서는 충돌만 있지 관계는 없다. 심지어 어떤 건물은 스스로의 몸도 파편화한 이미지를 구현하고 있다.

    정약용 이황 조식 송시열 등 우리가 아는 옛날 우리나라의 학자들은 모두 자신의 학문뿐 아니라 다른 분야, 심지어 집 짓는 일까지 일가를 이룬 분들이다. 그 당시의 학자들은 자신의 분야에만 앎의 범위를 한정한 파편화한 지식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을 바탕으로 인식의 지평을 넓힐 줄 아는 총체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런 지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놀라운 결과물이 있다. 수원 화성은 조선의 22대 왕인 정조가 정약용과 유형원 등 약관의 실학자들과 단원 김홍도를 비롯한 예술가들을 앞세워 지어놓은 성이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를 가진 동양성곽의 백미이며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그 당시 상상할 수 없는 하이테크적 기술들이 동원되었고, 체계적인 공사 관리로 불과 2년9개월 만에 성을 완공했다는 놀라운 물리적 배경과 더불어, 무엇보다 그 성은 아름답고 인본적이다.

    화강석과 벽돌을 함께 조합한 성벽은 마치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픽셀 개념을 미리 예견한 듯 현대적 디자인 어휘에 못지않은 세련된 형태다. 새로운 기능, 새로운 재료와 형태를 탐구하고, 시대적 요구를 선도하기 위한 노력에서 엿보이는 것은 우리가 유럽 혁명기로부터 배워온 바로 그 근대의 정신이기도 하다. 수원 화성을 통해 우리는 정조가 부친에 대한 개인적 감정과, 전란을 겪고 당쟁에 시달리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준비하려 했던 군왕으로서의 야심 모두를 아우르는 총체적 지식으로써 당시의 모든 문화적 역량을 결집해간 놀라운 서사를 읽는다.

    ‘철학 이야기’를 쓴 윌 듀란트는 “종합적 사고와 철학의 결핍 때문에 항상 새로운 이론이 늘어나고, 우리의 정신은 혼돈된 특수과학에 압도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인간 가능성의 한 조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파편화하기 이전에도 이미 가능성의 조각들이었다. 과학은 분석적 기술이고, 철학은 종합적 해석이다. 탐구적인 과학이 분석적으로 분해한 우주라는 거대한 시계 장치를 전보다 더 훌륭하게 조립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바로 철학이듯, 파편화한 시간과 공간을 추슬러 가장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이야기로 돌아가야 할 때가 아닐까.

    가온건축 공동대표·‘서울풍경화첩’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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