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21>실존의 공간<세계일보>
- 입력 2010.11.23 (화) 17:47, 수정 2010.11.24 (수)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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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며
서울 신촌로터리에서 와우산 쪽으로 언덕을 올라 다리를 하나 건너면 오른편에 붉은 벽돌의 산울림소극장이 있다. 그 자리에 가면 늘 걸려 있는 연극 포스터가 있었다. 연출가 임영웅이 1969년에 첫선을 보인 후 산울림에서만 25년째 공연하고 있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특이한 연출가 기국서가 연출한 ‘고도를 기다리며’도 참신하고 감각적이며 생의 비극을 꿰뚫는 통쾌함과 유쾌함이 가득하지만, 임영웅의 정통적이고 원작에 충실하고 진지하며 무엇보다도 40년 동안 ‘기다리는’ 공력에는 우리 모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아직도 오지 않는 ‘고도’를 빼놓고는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기 위해 그 지하극장으로 내려가곤 했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아일랜드의 세계적인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가 쌓은 현대연극의 우뚝 솟은 봉우리이다. 베케트는 우리가 하버드 대학과 더불어 가장 좋아하는, 우리나라의 어떤 이는 문학적 추종자들의 존경까지 포기하면서까지 갈구하는 레터르인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 유명한 극작가이고, ‘고도를 기다리며’는 누구나 제목쯤은 알고 있는 유명한 연극이다.
막이 오르면 두 친구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하염없이 고도를 기다린다. 그곳에 럭키와 포조가 지나가고, 고도의 말씀을 전하는 소년이 잠깐 나온다. 등장인물이라곤 고작 그 다섯 명이다. 무대 역시 나무 한 그루와 나무 뿌리를 감싸는 야트막한 흙무더기가 전부다. 그러나 이 연극은 소수의 등장인물과 담백한 무대장치를 통해 보편적인 세계의 모습과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다.
◇평원 한가운데 마치 모노리스(Monolith)처럼 서 있는 클라우스 형제 교회. 스위스의 성인을 위해 세운 이 교회는 여러명의 집회가 아닌 건축주인 농민 부부만을 위한 기도 공간이다.
간혹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그들은 서로 일깨우며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린다. 듣자하니 고도는 신(GOD)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이 연극은 ‘부조리극’의 정점을 찍었다. 부조리극은 20세기 에우제네 이오네스코(Eugene Ionesco)의 연극 ‘대머리 여가수(The Bald Prima Donna)’로부터 시작되는, 말하자면 실존철학의 문학적 대응, 혹은 연극적 대응으로 볼 수 있는 현대 연극의 한 장르이다.
가령 이오네스코의 ‘코뿔소(Rhinoceros)’라는 연극에서는 어느 도시에 코뿔소가 나타난다. 당연히 사람들은 신기해하면서 “저 코뿔소가 어디에서 왔을까?” 궁금해한다. 그 후 코뿔소는 늘어나고 사람들은 점점 사라진다. 알고 보니 사람들이 코뿔소로 바뀌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부조리한 상황’에 금세 적응이 되고 도시는 점점 코뿔소로 넘쳐나게 된다. 코뿔소는 뿔을 갈고 거리를 내달릴 뿐 아니고 카페에 앉아서 일상적인 여유를 즐기고 담소하고 일을 처리한다. 결국 주인공만 사람으로 남고, 그는 좌절한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코뿔소로 변하는 상황에, 나중에는 자신이 코뿔소가 되지 않는 상황에. 그래서 그는 매일 밤 잠이 들 무렵 다음날 자신이 코뿔소로 변하는 희망을 품고, 다음날 아침에는 여전히 사람인 자신에 대해 좌절한다.
◇실존철학의 연극적 대응인 부조리극의 대표작 ‘고도를 기다리며’.
‘부조리(the absurd)’라는 개념은 카뮈가 인간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철학적 용어이다. 그것은 일상화된 기계적 반복에서 깨어나 의식을 되찾은 인간의 세계에 대한 관계를 말한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가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우리를 지탱해주고 있는 배경이 걷혀지며 인간은 고독을 느끼게 된다. 즉 삶과의 절연, 배우와 배경과의 절연, 인간과 신과의 절연 등…. 생의 부조리와 무의미함을 깨달은 인간에 대한 상황과 그에 대처하는 자세에 대한 이야기가 ‘실존 철학’으로 발전한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무대장치들이 문득 붕괴되는 일이 있다. 아침에 기상, 전차를 타고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카뮈는 ‘시작된다’라는 말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권태는 기계적인 생활의 여러 행동들이 끝날 때 느껴지는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의식이 활동을 개시한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권태 속에서 생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되고, 존재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하고.
그리고 그는 이야기한다. 인간이라면 반항하라, 생에 대해 반항하라고. 생에 대한 무의미를 목도하면 좌절하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반항하라. 그것이 인간에 대한, 인생에 대한 긍정이라고.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끝없이 정상으로 돌을 들어올리는 시지프스처럼 성실성을 가지라고.
그렇게 인간이 잊고 있던 자신의 본 모습을 깨닫고 생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상황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대함으로써, 인간 소외와 상실의 상황에서 벗어나 인간의 회복을 추구하는 것이 실존 철학(existential philosophy)의 핵심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에서 앙투안 로캉탱이라는 역사학자는 3년째 연금으로 생활하며 프랑스 혁명시기의 음모가이며 정치가인 드 로르봉 후작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다. 세상과 격리된 채 지나간 시간에 대해 연구를 하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해변에서 물수제비를 뜨는 아이들을 보고 자신도 물수제비를 뜨려고 조약돌을 손에 쥐었다가 구토의 느낌을 받는다. 그 구토의 느낌은 존재에 대한 계시이다.
“오! 어떻게 나는 그것을 말로 규정할 수 있을까? 부조리, 조약돌과의 관계, 노란 풀 덤불과의 관계, 마른 흙과의 관계, 나무와의 관계, 하늘과의 관계, 또 초록색 의자와의 관계에 있어서의 부조리이다. 달리 표현될 수 없는 부조리. 그 아무것도-자연의 심원하고 은밀한 헛소리에 의해서조차도, 그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 물론 나는 다 알지는 못한다. 나는 싹이 자라고 나무가 커지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껄껄한 굵은 발 앞에서는 무식도, 지식도 중요하지 않았다. 설명이나 이치의 세계는 존재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존재가, 스스로의 존재가 자신에게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스무 살이 갓 되었을 때 우연히 그 책을 접했던 그때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의 무대와 같았던 신이 무너져버리고,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버린 20세기를 하나의 상징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그 은일자적 삶에 대한 동경과 신의 죽음과 양대 세계대전의 비극이 만들어낸 20세기 초의 허무가 공명이 되었다.
나는 존재하는가? 인간이 실존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일까? 피터 위어 감독의 영화 ‘트루먼 쇼’(The Truman Show)에서 주인공 트루먼 버뱅크는 자신이 평범한 샐러리맨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실은 24시간 생방송되는 쇼의 주인공이자 스타이다. 전 세계의 시청자가 그의 탄생부터 삼십여 년에 이르는 인생을 지켜보고 있다. 어린 시절 부친이 바다에서 익사하는 것을 보고 물에 대한 공포증이 있지만, 실은 섬을 떠나려는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설정된 가짜 진실(True)이다.
트루먼이 사는 세상에서는 그 자신만이 실존의 인간이고 나머지는 모두 허상이고 이미지이다. 어느 날 그 ‘무대장치’가 무너지며 트루먼은 자신의 실존적 상황에 대해 자각을 하게 되고, 당연하게도 인간으로서 ‘반항’을 하며 바다로 나간다. 그는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를 가로질러 어느 순간 무대의 끝에 다다르고, 그는 계단을 올라가서 문을 열고 멋지게 인사하며 무대 밖으로 사라진다. 트루먼은 무대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자신의 실존을 되찾게 된다.
◇스위스 건축가 페터 줌토어의 ‘발스 온천’. 원초적 자연으로 환원된 건축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만나는 실존의 공간이다.
그렇다면 실존의 공간이란 무엇일까? 예전 중앙청 자리에 앉아있던 중앙박물관을 장마 한가운데에 찾아간 관객이 나 혼자였던 어느 날 수백의 유물과 수억의 시간이 고여 있던 공간이라든가, 혹은 건너편 아파트가 내다보이는 담배 피우는 가장의 베란다 혹은 화분이 즐비한 할머니의 베란다라든가, 가족이 모두 나가고 난 아침 열 시 거실의 텔레비전 소리가 벽을 타고 넘어오는 주방 싱크대에서 방금 설거지를 마치고 한숨 돌린 주부의 식탁, 자정이 다가오는 시간 한강 다리를 건너가는 버스 맨 뒷자리…. 모든 관계가 소거된 채 오로지 ‘나’만의 실존을 느끼는 일상의 공간들. 그런 것이 아닐까.
2009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 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의 수상자로 스위스의 노장 건축가 페터 줌토어(Peter Zumthor)가 선정되었다. 당시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그를 “건축에 관심을 가진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는 물론 건축계 안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건축가”라고 소개했다. 1979년부터 매년 건축 예술을 통해 인간성 회복에 기여한 건축가에게 수여되고 있는 이 상은, 필립 존슨을 시작으로 프랭크 게리, 안도 다다오, 렘 콜하스, 자하 하디드 등 주로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대표적 건축가들이 매년 수상자로 선정되어 왔기 때문이다. 주최 측은 줌토어가 “유행에 따르지 않고 건축의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인물”이라고 밝혔다.
줌토어는 1943년 스위스 바젤에서 태어난 가구 만드는 장인 집안 출신의 건축가이다. 그는 바젤 미술공예학교와 뉴욕 프랫인스티튜트 등에서 수학하고, 1979년 스위스 하덴슈타인에서 독립 사무소를 열었다. 그는 “건축은 음악과 같은 것”이라며 “내면의 소리에 자신을 맡겨 설계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그는 기억 속의 이모 집 정원 문 손잡이를 떠올리며, 그 손잡이는 ‘다른 분위기와 냄새의 세계로 들어가는 특별한 신호로서 발밑에 밟혔던 자갈의 소리와 오래된 오크 계단의 촉촉한 느낌과 향, 삐거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 공간을 떠올리는 표식’이 된다고 말한다. 그는 “건축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행위이며, 좋은 설계를 할 수 있는 힘은 우리 자신의 내부에 이미 존재하고 있고, 이 세계를 감성과 오성을 통해 지각할 수 있는 가능성에 놓여 있다”고 이야기한다. 스위스의 작은 마을에서 지역 문화를 기반으로 자신만의 건축적 이상을 표현해온 그는 창문틀과 난간 마무리 등 디테일 하나하나까지 살펴 건축을 하며, 건축주의 취지에 공감할 수 없는 작업은 절대 맡지 않는다.
독일 와센도르프의 ‘클라우스 형제 교회(Bruder Klaus Field Chapel, 2007)’는 평원 한가운데 마치 모노리스(Monolith)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콘크리트 덩어리인데, 건축가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꾸었을 법한 건축이다. 이 작품에서 줌토어는 투박한 목재로 골조를 세우고 콘크리트를 부은 다음, 콘크리트가 굳은 후 나무를 3주 동안 불로 태웠다. 그래서 검게 탄 내부 벽에는 나무의 옹이와 껍질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그 무늬와 냄새를 통해 건축과정에서 존재했던 시간에 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스위스의 성인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이 교회의 건축주는 이 지역에 거주하는 평범한 농부 부부였고, 그들은 친구의 도움을 얻어 교회를 직접 지었다. 여러 명이 모여 집회를 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개인으로서 자신만의 신을 만나는, 이를테면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가 말한 ‘신 앞에 선 단독자’를 구현한 공간이다.
또한 스위스 그라우뷘덴에 지은 ‘발스 온천(Thermal Bath, Vals, 1996)’을 빼놓을 수 없다. 알프스에 산재한 온천지역 중 하나인 발스는 전형적인 스위스 마을로 편마암이 많아 이를 자재로 이용한 건축물이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그 편마암 6만 개를 쌓아 만든 단순한 형태의 건물이 언덕에 파묻혀 있는데, 계곡 인근 호텔의 부속시설로 증축된 것이다. 해마다 이 온천을 즐기러 4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발스를 찾는다.
줌토어는 온천 수맥을 따라 건축 구조물을 ‘감추는’ 방식으로 설계했다. 마을 채석장에서 나온 편마암으로 마감한 콘크리트 벽이 물을 감싼 듯한 모양은 이 공간의 주인공이 건축물이 아니라 물(水)이라는 메시지를 뚜렷하게 전달해 준다. 동굴과 같은 방들을 8cm 폭의 틈을 가진 콘크리트 판들이 덮고 있다. 유리로 처리된 이 틈으로 내부에 빛이 유입되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그 위로 자연스레 풀이 덮여 사람과 동물들이 거닐 수 있다. 주출입구에서는 지하수가 흐르는 경로를 통해 자연스럽게 방문객들이 탈의실로 이어지도록 도와주며, 그 내부의 온천은 돌로 된 벽에 담긴 물의 조화로운 촉감을 느끼며 몸을 가다듬고, 정신을 가다듬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다양한 온도의 온천수와 조명과 빛으로 인해 변화하는 공간의 색, 주변 자연을 그대로 끌어들인 재료의 경험은 건축과 인간의 실존적 경계를 넘나든다. 산 속 동굴에서 솟아나는 온천수를 상징하듯 이 건물에서 “산, 돌, 물”이 빛과 함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어 일상적 행위인 목욕의 의미를 종교적 의식(목욕재계 혹은 세례)으로까지 확장시킨다. 그 안에서 벌거벗은 사람들은 마치 인간이 원시 동굴 속에서 처음 겪었을 법한, 가장 원초적인 모습의 자기 자신이 된다.
줌토어의 공간에서는 낱낱의 개별재료가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물성과 기억들이 신 혹은 물과 같은 원초적 자연으로 환원된다. 그렇게 건축화된 자연 안에서 그 장소에 머무는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를 실존적으로 만나게 된다.
가온건축 공동대표·‘서울풍경화첩’ 공동저자
- 입력 2010.11.23 (화) 17:47, 수정 2010.11.24 (수)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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