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23> 여행·바람<세계일보>
- 입력 2010.12.21 (화)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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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일보 창간 21주년 특집
만나는 건축물마다 藝魂 가득… 위로와 안식, 영감을 얻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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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가면 소리 남지 않고
風來疎竹 風過而竹 不留聲(대숲에 바람이 불어도 바람이 가고 나면 소리는 남지 않고,)
雁度寒潭 雁去而潭 不留影(차가운 연못 위로 기러기가 건너가도 기러기가 다 가고 나면 연못에는 그림자 남지 않는다.)
故 君子 事來而心始現 事去而心隨空(그러하듯 군자도 일이 생기면 비로소 마음이 나타나고, 일이 끝나면 그에 따라 마음도 다시 비워지느니라.)
명나라 때의 그리 유명하지 않았던, 실은 불우했던 선비 홍자성이라는 사람이 쓴 ‘채근담’에 나오는 글귀이다. 뜻도 깊지만 그림 또한 아름답다. 그는 유교에 기반을 두고 도교와 불교를 두루두루 섞어서 세상 사는 법에 대한 좋은 말들을 짧게 짧게 썼다. 책 이름처럼 진정으로 나물 뿌리와 같이 담담한 경구들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내 눈에 확 띄었던 저 구절은, 아주 적막한 밤 어느 물가 언덕 위의 고즈넉한 정자를 떠오르게 했다.
◇1987년 창평 소쇄원으로 들어가는 길 옆으로 흐르는 자미탄 풍경 스케치.
그렇게 여행은 바람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 자취가 남지 않는다. 그냥 지나가는 것이다. 그 모양이 우리가 사는 인생과 흡사해서 사람들은 여행을 하며 깨달음을 얻는 모양이다. 그래서 여행의 여정으로 인생을 그리는 ‘로드 무비’ 형식의 영화가 시대를 불문하고 만들어진다.
‘허수아비(Scarecrow)’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텔레비전에서 해주는 ‘주말의 명화’에서 보았는데, 새파랗게 젊었던 시절의 알파치노와 진 해크먼이 나온 1973년 영화로 그해 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흔히 로드무비가 그렇듯이, 갓 출소한 진 해크먼과 선원생활을 마치고 이혼한 부인이 맡아서 기르고 있는 아들을 보러가는 알파치노가 길에서 만난다. 수다스러운 알파치노와 세상에 대해 불만 많고 과묵한 진 해크먼이 함께 길을 가며, 해와 달처럼 겹쳐지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며…. 그냥 돌아다닌다.
사람과 사람이 겹쳐지더니, 나중에는 성격이 바뀐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가족으로부터 거절당하고 상심한 알파치노를 위로하기 위해 진 해크먼이 수다스럽고 야단스럽게 변신을 한다. 그 장면이 참 뭉클했었다. 사람과 길 또한 서로 겹쳐지며 처음엔 길이 사람의 배경이었던 것이, 나중엔 사람이 길의 배경으로 바뀐다. 여행에서는 그런 여우둔갑이 몇 번씩 일어난다.
기러기 다 가고 나면 연못에는 그림자 남지 않는다
오래전 불상과 석탑을 주제로 일주일 동안 가을여행을 했던 적이 있다. 가는 길에 들르게 되는 대부분의 옛집이 ‘절’이다 보니 그 집들의 주인인 불상과 석탑이 저절로 ‘주제’가 된 것이다. 전라북도 부안에서 시작해서 경주까지 서해안과 남해안과 동해안을 디귿자로 도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불교에서 예배의 대상인 불상이 원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배의 대상은 부처의 무덤이나 부처 몸의 일부라고 믿는 사리를 모시고 있는 사원이었다. 불교가 중국으로 들어오며 사신들이 머물던 목조팔각의 중층건물을 사원으로 이용했던 것인데, 나중에 불교의 상징이 불상으로 대체되기 전까지 사람들은 목탑을 예배했고, 그것이 돌이라는 재료로 번역된 것이 석탑이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부안으로 들어가서 내소사, 개암사, 그리고 고인돌을 만나며 시작한 여행은 선운사, 불갑사를 거치며 서해안을 타고 돌다가 목포에서 방향을 돌려 영암 도갑사의 저녁예불을 보고는 강진으로 넘어갔다.
◇1995년 가을날 새벽 무위사에서 월출산을 바라본 풍경.
색이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하는 절 마당에 백구가 한 마리 서 있었고, 그 외엔 아무도 없었다. 무위사 극락전을 약간 비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동네 어귀 ‘점방’처럼 생긴 요사채와 강당의 중간 역할을 하는 건물이 하나 있었다. 그 툇마루에 앉아서 눈으로 담아 가기만 하기엔 너무나 아쉬운 극락전을 스케치북에 새기고 있었다.
그 ‘점방’에서 6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삐죽 고개를 내밀더니, 마치 아침마다 흔히 하시던 일과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이른 아침부터 오느라고 아침도 못 먹었겠네, 들어와서 밥이나 먹지!”라고 하며 우리를 불렀다. 우리는 염치 불구하고 들어가 소찬으로 꾸려진 밥상을 한 상 받았다.
옆에서 밥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보살 할머니는 ―절에서는 들어오는 모든 이가 보살이다. ‘당신은 금세 다음 단계인 부처로 레벨 업 하실 겁니다’하는 덕담일 게다― 마침 명부전 한가운데 계시는 지장보살 ‘개금불사’를 하는 중인데 한손 보태라고 권하셨다. 어느 절이나 흔한 건 보통 기와불사인데, 부처님 집 지어드리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옷 새로 해 드리는 것이 최고의 불사라고 한다. 큰 돈을 낼 것도 아니고 다른 곳도 아닌 무위사에 그런 흔적을 남기는 것이라면, 언제고 찾아와도 마치 지분이 있는 주주처럼 ―물론 마음속으로― 당당하게 들락거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흔쾌히 응했다.
그래서 마을 청년회장 같은 느낌을 풍기는 젊고 활동적인 인상의 주지 스님을 알현하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흔하지 않던 컴퓨터며 프린터가 모두 갖춰진 데다 책상 위에는 읽다 만 진보적인 주간지가 펼쳐져 있었다. 스님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지 고맙다며 우리에게 옆 자리 냉장고에서 드링크제를 한 병씩 건네주었다.
◇르 코르뷔제에게 현대식 집합 주거의 영감을 준 터키 전통주택 코나크.
스님이 무척 빠른 속도로 SUV 차량을 몰고 앞서시는데, 우매하고 느려터진 중생은 도저히 그 넓고 빠른 보폭을 따를 수 없었다. 요금을 내는 곳을 덕분에 그냥 지나치고 산 속에 벌여진 사하촌을 다시 지나서 우리는 감히 차로 대흥사 경계 안으로 직접 진입할 수 있었다. 마치 돈오의 순간처럼 과정이 생략되고 바로 진리의 전당에 들어선 것이다. 마당에 이르자 스님은 잘 다녀가시라며 표표히 본인이 가시던 길로 가신다. 인근 절 스님들이 모여 무슨 결사인 양 개혁 논의를 하신다는데, 안쪽으로 조금 귀 기울이면 털털한 무위사 주지 스님 목소리가 들릴 것도 같았지만, 그럴 리야 없고 원교 이광사의 신들린 달필만 두 눈에 가득 들어왔다.
나는 무위사를 본 것인가? 대흥사에 들어섰던 것인가? 16년이 지난 지금도 꿈을 꾼 것 같다.
군자도 일이 생기면 비로소 마음이 나타나고
그리고 우리는 땅끝 미황사에서 점을 찍고 완도와 벌교를 지나, 장흥 보림사에서 장보고처럼 생기셨다는 대단한 철불을 봤고 대단한 부도를 봤다. 그러고는 화순 쌍봉사로 갔다. 3층목탑 형식을 응용한 특이하게 생긴 대웅전 앞으로 들어가는데, 생수병을 하나 들고 어디론가 물을 받으러 가시던 젊은 주지 스님을 우연히 마주쳤다. 합장을 하며 인사를 하자 문득 우리 앞에 서더니, 절에 대한 이런저런 내력을 책 한 권 분량으로 간추려서 짧은 시간에 들려주었다.
쌍봉사는 큰불이 나서 목탑 모양의 대웅전이 모두 소실되었으나, 다행히 실측한 도면이 있어서 다시 복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참 다행하게도 그 안에 모셔졌던 석가모니 목불은 그 화재에도 멀쩡하게 살아나셨다. 부처님이 살아나셨다는 말은 망발이지만, 정정하자면 부처님의 형상을 본뜬 나무조각상이 살아나셨다는 말이다.
불이 났을 때 마침 동네에 어떤 보살 할머니의 아들이 군대 갔다가 잠시 휴가 나와 있었다. 그 이는 절에 다니지 않았었는데, 불이 나자 대웅전으로 냅다 뛰어들어 가서 부처님을 업고 밖으로 뛰어나와서 무사하셨던 것이라 한다. 그런데 그 부처님은 평소에는 장정 여럿이 들어야 할 정도의 무게였는데 그 친구가 혼자서 답삭 업고 나왔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그랬지, 아마 부처님도 무척 뜨거우셨던 모양이야….”
◇르 코르뷔제가 그린 파르테논 스케치.
돌로 만들어진 조각이 마치 튜브처럼 생긴 용기에서 슈크림을 짜내어 장식을 한 듯 유려하기 그지없었다. 목조건축 양식을 본뜬 지붕돌은 통일신라 당시의 건축술을 연상시킬 정도로 놀랍도록 정밀했다. 진전사 도의선사 부도에서 시작하여 염거화상 부도를 거치고, 보림사 보조선사 부도를 거쳐 하나의 양식이 완성된 부도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일이 끝나면 마음도 다시 비워지느니
영광 불갑사와 영암 도갑사를 이미 보았고, 듣자하니 어디선가 봉갑사라는 절이 있다기에 ‘갑’자 돌림을 다 훑자! 생각하고 지도만 믿고 무작정 숲으로 찾아들어 갔다. 그런데 아무리 숲을 헤매도 그런 절은 흔적도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헐렁한 바지를 끈으로 질끈 묶은 노인이 홀연히 우리 앞에 나타나, 이 산중에 무슨 일이냐고 물어왔다.
“혹시 봉갑사라는 절, 이 근처에 없습니까?” 하니 “그런 절은 잘 모르겠고, 아래로 내려가서 큰길로 쭉 나가다가 지름집(주유소) 끼고 들어가면 참 좋은 절이 하나 있는데 가보쇼” 하고는 산속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그래서 내려와 말씀대로 지름집을 끼고 들어가니 대원사라는 절이 나왔다. 전혀 예정에도 없었고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 절 마당에 들어섰는데, 그곳은 다양한 크기의 지장보살상으로 가득했다. 지장보살은 지옥 앞에서 마지막 한 명이라도 구원하겠노라고 서원을 하고 중생을 구하는 자비의 화신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원사는 부모와 인연은 맺었지만 태어나지 못하고 죽어간 영혼, 즉 태아령을 달래주는 절이기도 했다. 절의 연못에는 태아령을 상징하는 연꽃이 앙증맞게 피어 있었고, 연못 안에 귀여운 아기 부처 한 분이 웃으며 앉아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때 그 노인이 그곳으로 우리를 이끈 것은 지장보살을 보라는 것이었는지, 아기 부처를 보라고 한 것이었는지, 혹은 삶이 시작되기 전부터 삶이 끝난 이후까지의 모든 인연들을 생각하라는 그런 뜻이었는지, 역시 알 수 없었다.
이윽고 경주에 다다라, 석굴암 본존불과 불국사 석가탑, 모든 불상과 석탑의 완성의 경지를 비로소 보았다. 백제와 신라를 거쳐 통일신라에서 형식이 완전해지고, 다시 그 형식을 벗어던지기까지의 과정들이 그 여행을 통해 뚜렷하게 각인되었다. 그리고 그때 듣고 만났던 땅과, 사람들과, 예술에 담긴 정신의 흔적들이 오래도록 우리 공부의 밑천이 되고 있다.
여행은 끊을 수 없는 모든 일상적 관계들로부터 잠시 거리를 두고, 오롯이 자기 자신만을 생각할 수 있는 기회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여행을 통해 위로와 안식을 얻고, 적잖은 예술가들은 풍성한 경험을 통해 영감을 얻는다. 건축가들도 마찬가지다.
동방여행을 다녀 온 스물네 살의 샤를 에두아르 자느레(현대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제의 본명)는 터키의 전통주택 코나크(Konak)를 보고 그 군더더기 없는 실용적인 형태와 구조를 보며 현대 도시성에 부합하는 기계미학적 건축에 착안하였고,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거대함과 정교함에 압도당하며 충격을 주는 크기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그때부터 ‘사람이 팔을 들어올린 높이’라고 부르는 길이가 내 건축술의 핵심이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권투선수 출신인 일본의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 또한 스물한 살 때인 1962년부터 8년간 일본과 유럽, 미국과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건축을 배웠다. 여행이 그의 스승이며 건축가로서의 삶을 이끈 길잡이였던 셈이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수없이 인구에 회자하는 저 서정주의 시구처럼 건축가, 혹은 예술가, 혹은 사람을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소리없이 흔적 없이 키운 건 팔할이 여행이다.
가온건축 공동대표·‘이야기로 집을 짓다’ 공동저자
- 입력 2010.12.21 (화)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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