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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문화기행] ① 시간을 초월한 마드리드

눌재 2011. 10. 12. 19:56

 

[스페인 문화기행] ① 시간을 초월한 마드리드<세계일보>
  • 입력 2011.09.14 (수) 18:16, 수정 2011.09.15 (목) 09:53
‘신대륙의 꿈’ 이루어내듯… 이사벨 여왕 후손들 신세계를 그리다
  • 20년 전 무작정 배낭 하나를 짊어지고 마드리드에 발을 내딛은 적이 있다. 스페인어를 한마디 못한다는 것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은 장애가 될 수 없었다. 젊음은 그런 것이었다. 모험과 도전 속에서 자유로움을 만끽한 순간이었다. 아프리카미술관 정해광 관장은 중년이 돼 지난 7월 다시 마드리드를 찾았다. 이번엔 스페인 문화에 갈증을 지닌 경남과학기술대학 박재현 교수(산림자원과)를 비롯해 몇몇이 동행했다. 이슬람 지배를 받았던 스페인만의 독특한 문화를 새롭게 바라볼 기회였다. 두 사람의 시선으로 담은 ‘스페인’을 격주로 8회에 걸쳐 소개한다.

    정해광 관장 박재현 교수
    직항이 생겨 참 편해졌다. 예전 같으면 스페인을 가기 위해서는 유럽의 다른 도시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는 수고를 감내해야 했다. 기내에서 영화 보고, 신문 읽고, 한숨 자고 일어나니 공항의 불빛이 보인다. 12시간이 좀 지난 것 같은데 벌써 마드리드다.

    그란 비아(Gran Via)에 있는 호텔에 짐을 풀었다. 그란 비아는 서울의 종로거리와 같은 곳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서울 500년의 역사는 좀처럼 찾기 힘들지만, 마드리드의 500년은 그란 비아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거리 전체가 500년의 역사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강산이 두 번 바뀐 세월 만에 다시 찾았지만 시간의 흐름을 무색케 한다.

    묵었던 호텔도 200년이 넘은 건물이다. 그렇다고 내부가 200년이 된 것은 아니다. 스페인 정부는 건물의 외관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수리만을 허락한다. 그러나 내부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리모델링 차원에서 내부 전체를 드러내기도 한다. 엘리베이터는 기본이고, 부대시설이나 침실은 초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것이다.

    일상에 대한 인식도 우리와 사뭇 다르다. 자동차만 하더라도 밴은 오토 차량이 거의 없다. 스틱차량을 렌트할 수밖에 없었는데, 오토에 익숙한 우리 일행은 사고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것도 경찰서 앞에서 기어 조작이 익숙하지 않아 접촉 사고라는 호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마드리드는 새것에 익숙한 우리에게 달리 생각하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프라도 미술관은 스페인 왕정에서 모은 작품들을 상설 전시하면서 시즌에 맞춰 기획전을 열고 있다. 미술관 입구에 혁명적 인생의 기로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남겼던 디에고 리베라의 ‘젊은 리베라’ 전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7월의 마드리드는 40도를 웃도는 더위지만 습도가 낮아 산보하기에는 별반 어려움이 없었다. 더구나 휴가철이라서 그런지 거리에는 자동차가 별로 없어서 쾌적했다. 발품을 팔며 문화욕구를 채울 일만 남아 있었다. 숙소에서 프라도미술관(Museo del Prado)까지는 1㎞ 남짓, 우리는 그렇게 500년의 거리 500년의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고야의 ‘옷 벗은 마야’
    현대문명에 익숙한 우리에게 프라도미술관은 오아시스와도 같은 곳이다. 시간의 흐름에 대해서 자유로움 혹은 여유로움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보았던 고야(1746∼1828)의 ‘옷 벗은 마야’는 또 다른 느낌을 갖게 했다. 회갈색의 배경에서는 지나간 중세의 암울함이 보였고, 청록색의 소파에서는 근대세계를 향한 날카로운 이성에의 빛이 보였다. 그리고 흰색의 쿠션에 몸을 기댄 마야의 모습에서는 미래에의 열려진 가능성이 보이는 듯했다. 프라도미술관의 수많은 그림들과 조각들은 그렇게 우리의 생각을 하나의 세계에 한정시키지 않은 채 예전과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했다.

    그란 비아에서 푸에르타 델 솔로 연결되는 거리로 오후가 되면 길거리 자체가 연주회장으로 바뀐다. 날씨가 덥지 않아도 사람들이 별로 없는 이유는 아직도 스페인 사람들은 시에스타(siesta)라는 낮잠을 즐기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쉬운 점은 항상 남는다. 프라도미술관은 마치 거대한 오아시스에 수많은 좌판을 벌여 놓은 것처럼 관람객의 정신을 빼놓는다. 전시장은 마치 미로처럼 끝 모를 지점으로 연결된 것 같아 무심코 가다 보면 길을 잃기가 일쑤다. 빼곡히 걸린 그림들과 수많은 관람객에게 치여 정작 그림에 도취하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명작을 스치듯 지나가면서 보는 우를 범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전시를 효과적으로 보는 비법이 있다. 취향에 맞지 않는 그림은 아무리 훌륭한 화가가 그렸다 할지라도 그냥 지나치는 것이다. 대가의 작품일지라도 고민하지 말자는 것이다. 다음을 기약하며 정말 보고 싶은 작품을 보면서 나만의 환상에 빠져보는 것도 하나의 현명한 방법일 수 있다.

    소피아미술관에 이르는 길가의 노천카페 풍경. 500년 세월의 풍화를 간직한 건물의 차양에 의지해 옹기종기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고즈넉하다.
    클래식한 그림으로 정신이 혼미해지면 잠시 샛길로 빠져볼 필요가 있다. 미술관을 나와 아토차(Atocha)역 방향으로 십분 쯤 걸어가면, 유리로 장식된 현대식 건물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병원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소피아미술관(Museo de Reina Sofia)이다. 

    병원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소피아 미술관에는 피카소, 달리, 미로 등 현대미술계에 족적을 남긴 작품들로 가득하다. 여름 특별전으로 일본의 여류화가 ‘구사마 야요이’전이 열리고 있어 관람객의 눈길을 끌고 있다
    이곳은 스페인이 전통에만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피카소, 달리, 미로, 타피에스 등 현대미술계에 한 획을 그었던 작품들이 수두룩하게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익숙해서인지는 몰라도 피카소(1881∼1973)의 ‘게르니카’는 역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게르니카는 참상을 당한 사람들의 절규뿐이 아니라 가해를 한 파시스트의 일그러진 영혼마저도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았다. 폭력과 절망에 뒤틀린 인물들의 형상과 무채색에서는 피카소의 분노와 공포가 느껴졌다. 그런데 게르니카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피카소가 위대해서? 아니면 이 시대가 여전히 증오와 원한의 소용돌이에 계속 빠져 있어서?

    다른 유럽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마드리드도 유난히 거리의 악사가 많은 도시다. 프로페셔널한 연주자의 음악은 물론 시골 마을에서나 봄직한 아마추어적인 악사들도 길에서 자연스럽게 연주하고 있다.
    피카소의 기하학적인 그림과 미로와 달리의 이상한(?) 그림들을 보면서 ‘스페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다름에 대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 이는 새로운 세계를 추구하려는 열린 마음과 맞닿아 있다. 마침 소피아미술관에서는 일본의 구사마 야요이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는데, 스페인 사람들이 그녀의 작품을 보고 즐거움에 빠져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에서는 구사마 야요이의 아트 상품은 쉽게 볼 수 있지만, 그녀의 작품이 일부 갤러리에서 소개된 것을 빼고는 제대로 된 작품을 볼 기회가 없었다.

    소피아미술관을 나오면서 문득 한 여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슬람 700년 지배에 종지부를 찍고, 이베리아 반도에 통일왕국을 세워 오늘의 스페인을 있게 하고, 콜럼버스를 통해 신대륙의 꿈을 현실 속에서 이루었던 500년 전 이사벨 여왕이 뇌리를 스친 것이다. 이사벨 여왕의 후손들은 수많은 화가들과, 건축가들 그리고 문호들과 함께 마드리드에 역사를 썼고 영혼이 깃들게 했다. 새로운 세계의 추구를 업으로 삼았던 이사벨 여왕의 유전자는 오늘도 마드리드 골목길의 스치는 바람이 되어 이방인을 반겨 맞고 있다.

    글·사진=정해광(아프리카미술관 관장), 박재현(경남과학기술대학 교수)

    마드리드, 미술관·박물관 270개 즐비

    마드리드에는 크고 작은 미술관과 박물관이 270여개가 있다.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즐거운 비명을 질러도 좋을 곳이다. 그러나 아무리 미술관이 좋고 대가의 그림이 많다고 해도, 짧은 일정에 쫓기듯 보다간 실망하기가 일쑤다. 여유 공간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그림들은 감상의 맛을 떨어지게 한다.

    얼마나 그림이 많으면 그럴까. 한 번 가서 보시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런 점에서 마드리드는 한 달 이상 머물라고 권하고 싶다. 한 미술관에 사나흘 아니면 일주일 정도 머물면서 그림을 대하면 놀랄 일이 많을 것이다. 대가의 그림이라서 갖는 놀라움과 경이로움 때문만은 아니다. 색과 사조 그리고 정신의 향연에 흠뻑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옆 그림을 훔쳐보지 않는 대가들의 작품들, 그것은 행복한 여행의 발로다. 행복하기 위해서 감탄을 하는 것처럼, 행복한 사람이 감탄을 잘 하는 것처럼, 마드리드는 미술의 도시며, 감탄의 도시다. 좋은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과 행복에 빠지게 하는 것이 마드리드가 지닌 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