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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 데이비드 호크니의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 전

눌재 2013. 9. 11. 10:03

카메라로 포착할 수 없는 자연의 무한한 다양성 담다

英 데이비드 호크니의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 전

 

현대인의 눈이 사진, 드라마, 영화, 광고, 게임을 장시간 접하는 사이 스스로 세상을 인식하는 것보다 카메라 앵글로 조작된 세상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재료의 거친 날것이 주는 신선함보다는 조리된 인스턴트 음식의 편안함에 손이 가듯이 말이다. 최근 미술에서의 ‘사실화 경향’ 중 하나도 카메라의 앵글을 통해 기록된 것이거나, 카메라의 기록과 컴퓨터의 조작, 손을 통해 재생산된 이미지들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영국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ackney·76)의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 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의 그림은 화가의 내부세계와 그림의 소재가 된 외부의 세계가 발가벗고 만나는 과정, 생생한 라이브 쇼를 우리에게 보여주며 지각의 주체로서의 시각 인식의 중요성에 관해 말하고 있다. 영국뿐 아니라 세계미술계에서 명성 있는 원로작가로 통하는 호크니는 국내에도 잘 알려진 ‘명화의 비밀’을 저술하기도 했다.

◆공간과 풍경에 대한 탐색

197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진행해온 호크니의 무대 디자인 작업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새로운 매체에 대한 도전의 일환으로 1975년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의 ‘탕아의 역정’ 오페라 세트를 디자인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무대 세트를 디자인했다. 3차원의 공간 속에 조명과 입체조형물로 구성된 무대 세트는 단일 초점의 원근법적 공간이 아니라, 보다 실제적인 인간 시지각에 가까운 ‘다시점’, ‘다초점’을 기반으로 직조된 공간이다. 관람객이 어디에 앉아 있건 편안히 모두를 볼 수 있는 조건이다.

단일 시점으로는 파악이 불가능한 우리의 현실 세계, 그리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의 다양성을 펼쳐 보이기 위해, 호크니는 1980년대에 들어 사진 콜라주 작업을 진행했다. 여러 장의 스냅사진을 짜깁기하듯 조합하는 것인데, 움직이는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다시점으로 포착, 이를 재조합하여 통합된 이미지로 만들어낸 것이다. 멀티캔버스 작업의 단초를 엿볼 수 있다.

◆뿌리로의 귀환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30여년간 거주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던 호크니는 2000년대 들어서면서 자신의 관심을 새삼 태어난 고향으로 돌렸다. 영국 풍경화 역사 속 대가들인 클로드 로랭과 윌리엄 터너 같은 인물들을 다시금 바라보게 되면서 새로운 작업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대형 그림들을 본격적으로 제작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다. 그는 이즈음 동양화의 다시점(이동시점)을 거론하며 자신의 그림을 설명하기도 했다. 붓질에선 동양화의 필선이 느껴질 정도다.

호크니는 드로잉수채화로 먼저 풍경을 그려보고, 그 다음 마치 19세기 화가인 클로드 모네나 존 컨스터블처럼 야외에서 유화를 그렸다. 이렇듯 야외로 나가 직접 보고 그린 그의 풍경화 작업은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에 이르러 정점에 다다른다.

호크니의 근작 중 가장 규모가 큰 작품으로 높이가 4.5m, 폭이 약 12m에 달하고 50개의 캔버스로 조합돼 있다.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 또는 새로운 포스트-사진 시대를 위한 모티브에 관한 회화’라는 이름이 붙은 작품을 관람자들이 살펴보고 있다. 호크니가 요크셔 고향 마을 풍경을 담은 작품으로 테이트미술관 소장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카메라의 눈으로 포착할 수 없는 세계…다시 그림이다

호크니는 이번 전시 출품작인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을 비롯하여 그의 최근 경향인 점점 더 커지는 그림들을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일까. 30여년간 거주하던 미국 캘리포니아를 떠나 다시 자신의 고향인 영국 요크셔로 돌아왔을 때, 그가 마주한 풍경은 그로 하여금 ‘자연의 무한한 다양성’을 시시각각 증거하고 있었다. 계절이 바뀜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자연 풍경 앞에서 호크니는 자신이 목격한 그 변화무쌍함을 화폭에 그대로 옮겨 담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야외에서 바로 그 대상(자연 풍경) 앞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호크니는 카메라의 눈으로는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변화와 생생함을 회화만이 잡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를 그리기 위해 ‘오랫동안 바라보기, 그리고 열심히 바라보기’를 자신의 눈으로 실천했다. 실제로 밖에서 자신이 본 풍경을 최대한 그대로 관객에게 전하고자 관객을 둘러쌀 정도의 거대한―마치 벽화와도 같은 (혹은 공연무대와도 같은)―멀티캔버스 회화를 펼쳐보이고 있다. 관객은 그의 작품 앞에 서는 순간, ‘저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가 아니라 ‘이미 그 안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스쳐지나갈 수도 있을 법한, 어쩌면 큰 특징이 없기까지 한 자연 풍경은 작가의 예민하고 섬세한 눈에 포착되어 우리 앞에 자리한다. 아니 우리가 그 안에 자리하게 되었다.

전시를 기획한 김형미 학예연구사는 “호크니는 인간의 눈, 더 이상 과거 이성을 대변하는 눈이 아닌 여타의 감각을 담아내는 눈을 이야기하고 있다”며 “‘다르게 느낄’ 가능성을 그의 거대한 그림 안에서 발견하는 것이 관람 포인트”라고 말했다. 내년 2월28일까지. (02)2188-6040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