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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를 위한 미술산책] 형상과 '美의 성역' 완전 파괴…피카소의 혁명, 신세계를 열다

눌재 2013. 10. 19. 10:46

[CEO를 위한 미술산책]   형상과 '美의 성역' 완전 파괴…피카소의 혁명, 신세계를 열다

입력
2013-08-30 17:34:46
수정
2013-08-30 22:42:00
지면정보
2013-08-31 A21면
정석범 문화전문기자의 CEO를 위한 미술산책 (11) 피카소라는 천재
지난 6월14일 런던의 소더비 경매장에 전시된 피카소의 1967년작 ‘화가’. /런던=AP연합뉴스

지난 6월14일 런던의 소더비 경매장에 전시된 피카소의 1967년작 ‘화가’. /런던=AP연합뉴스


피카소에게는 늘 ‘예술의 제왕’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화가 중의 최고라는 의미다. 오죽하면 미술의 ‘미’자도 모르는 사람도 피카소가 누군지는 알지 않는가.

피카소는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대해 천재적 재능을 나타냈다. 미술학교 교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똑똑한 아들을 둬 자랑스러웠지만 그를 가르칠 능력이 없다는 데 좌절했다. 피카소는 13세 때 바르셀로나의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혼자 작업에 몰두할 수 있게끔 아틀리에도 마련해줬다. 16세 되던 해에는 스페인 최고의 미술학교인 마드리드 산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그러나 학교 교육에 갑갑함을 느낀 그는 수업에 참여하지 않았고 프라도 미술관을 배회하며 대가들의 작품에서 위안을 얻는다. 그의 눈길을 끈 것은 벨라스케스, 무리요 등 전통적인 화법을 구사한 화가들이 아니라 신체를 기형적으로 늘어트리고 원근법과 명암법을 파괴한 매너리즘 화가 엘 그레코였다.

피카소는 마침내 1904년 당시 세계 미술의 중심지였던 파리에 입성한다. 그는 파리 북쪽 몽마르트르 언덕에 똬리를 튼다. 몽마르트르는 집값이 싸서 19세기 중반 이래 가난한 예술가들이 몰려든 곳으로 자유로운 보헤미안의 분위기로 충만한 곳이었다. 피카소가 정착한 곳은 일명 ‘세탁선(바토 라부아르)’으로 불린 싸구려 셋집이었다. 건물이 너무 낡아 바람이 불면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요란해 마치 세탁선에서 나는 소리 같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곳의 거주자는 피카소 외에도 모딜리아니, 후안 그리스, 조르주 브라크 등 미술가뿐만 아니라 작곡가 에릭 사티,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 같은 예술적 전위가 포진해 있었다.

피카소는 이곳에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세상을 놀라게 할 대표작들을 쏟아낸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1907년 칸바일러 화랑에 전시한 ‘아비뇽의 처녀들’이었다. 제목은 아비뇽의 집창촌에 자리한 업소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다섯 명의 창부를 묘사한 작품이다. 당시 이 작품을 처음 본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왜냐하면 피카소는 이 작품에서 원근법과 명암법 등 전통적인 미술의 가치를 모두 폐기처분했기 때문이다. 그건 인상주의자와 후기인상주의자들이 먼저 했는데 뭔 소리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물론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파괴의 강도로 얘기하면 피카소에 비할 바 아니다. 모네, 고갱, 고흐, 세잔 모두 혁신적이긴 했지만 형상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그들의 그림에서 규칙은 사라졌지만 적어도 형상만큼은 여전히 뚜렷한 모습으로 자취를 남기고 있다.

피카소는 형상을 완전히 해체해버렸다. 그는 인물을 묘사할 때 전후좌우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한 모습들을 한데 합쳐버렸다. 신체도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본 모습을 원칙 없이 결합시켰다. 또 두 명의 창부는 마치 아프리카 원주민의 가면을 쓴 모습으로 묘사했다. 그것은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그림은 일관되게 한 방향에서 바라보고 그려야 한다는 전통적 회화 원리를 전복한 것이다. 다소 뒤에 그려진 작품이지만 지난 6월 소더비 경매에 나온 피카소의 ‘화가’(1967) 역시 두 개의 서로 다른 시점에서 바라본 화가의 얼굴을 합성한 것이다.

그는 또 작품에 추한 형상을 그려넣음으로써 예술작품은 항상 아름다워야 한다는 ‘미의 성역’마저 무너트렸다. 작품도 의도적으로 치졸하게 그렸는데 이는 세련된 마무리보다는 그 반대의 방식이 작가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데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비뇽의 처녀들’이 후대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지대했던가는 2007년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지난 100년간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작품으로 선정한 데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피카소의 혁명적인 회화가 처음부터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아비뇽의 처녀들’은 오랫동안 그의 스튜디오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했고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은 것은 1920년대 들어와서였다. 몽마르트르의 화가들만이 그의 작품이 지닌 혁명성에 주목했다. 브라크는 피카소 그림을 보고 감격한 나머지 당시 화단의 일인자였던 마티스 진영을 탈퇴해 피카소와 함께 입체파를 결성했다. 현대미술은 이 피카소라는 예술의 제왕이 가속 페달을 밟으면서 만들어낸 궤적이다.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