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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종화는 사대부의 문인정신을 수묵담채로 그려 낸 작품을 뜻한다. 중국 명나라 때 시작돼 원나라 말기를 전성기로 본다. 소치라는 호는 원 말 4대 화가로 꼽히던 황공망(黃公望·1269~1354)의 호가 대치(大痴)인 것에서 따 왔다. ‘묵매도’는 소치의 후반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줄기는 거칠고 강렬한 필치로 표현하면서 꽃잎은 경쾌하게 묘사해 대비를 이뤘다. 소치는 임금(헌종) 앞에서 그림을 그린 최초의 화가로도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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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업을 이을 것으로 기대했던 큰아들이 요절하자 소치는 이를 안타까워했다. 넷째 아들 허형은 풍채가 없어 머슴처럼 일만 하며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의 재주를 발견하고 큰아들에게 줬던 미산이라는 아호를 이어받게 했다. 가세가 어려운 탓에 다작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의재 허백련, ‘산수도’, 종이에 수묵담채, 63.5x65.2㎝
소치의 방손으로 1914년부터 운림산방에서 미산과 무정 정만조 문하에서 그림과 한학을 공부했다. 일본 남화의 대가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을 만나면서 본격 정진했다. 의재는 고법 연마를 통해 시서화 일체를 근간으로 남종화의 근대화를 구축한 인물로 꼽힌다.산수도’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독수리를 잘 그리기로도 유명하다.
4 임인 허림, ‘화조도 10곡 병풍’ 부분, 비단에 채색, 103.5x32.2㎝
미산의 다섯째 아들로 18세부터 23세까지 연 6회에 걸쳐 선전(鮮展)에 입선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가와바다화(川端畵)학교에서 채색 중심의 감각적 일본 화풍을 익혔다. 그 뒤 41년과 42년 문부성 전람회에서도 연거푸 입선하는 재주를 보였다. 하지만 과로로 25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화조도 10곡 병풍’은 20대 젊은이가 그린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천재성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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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던 남농은 소치와 미산의 그림을 연구하며 실경 사생에 몰두했다. 44년 마지막 선전에서 최고상인 조선총독상을 받았다. 56년 목포 유달산 아래 정착한 남농은 국전 초대작가, 예술원 원로회원 등을 지내며 갈필산수에 매진했다. 81년 평생 수집한 수석 2000여 점과 그림을 목포시에 기증한 데 이어 82년에는 운림산방을 복원했다. 그림뿐 아니라 손재주도 뛰어나 의족을 직접 만들어 사용할 정도였다. ‘서귀포 풍경’은 보통 산수화에서 보기 힘든 바닷가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찐득찐득한 펄의 느낌이 살아 있다.
6 임전 허문, ‘산수도’, 종이에 수묵, 44x176㎝
임전 허문은 아버지 임인의 요절로 일곱 살 때부터 백부인 남농 밑에서 자랐다. 전래 남종화법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독특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안개화가’라는 별명답게 ‘운무산수’를 그리고 있다.
7 허진 ‘유목동물+인간 2007-20’, 한지에 수묵채색, 120x162㎝
현실 사회의 부조리와 탐욕·혼란 등을 희화화해 현대적 수묵채색 필법으로 그려 내고 있다. ‘유목동물+인간’ 연작은 아프리카 초원을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사는 맹수를 통해 원시적 야성과 자유를 추구하는 작품이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은 중심이 아닌 주변적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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