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앞에 마네(Edouard Manet·1832~ 1883)의 작품 〈폴리-베르제르 바(bar)〉가 있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훤칠한 여종업원이 매력적인 그림이다. 그녀의 뒤로 시끌시끌한 술집의 내부가 펼쳐진다. 좀 더 들여다보면 뒤에 세워진 거울을 통해 반사된 내부의 모습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여종업원의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보이는 그녀의 뒷모습이다. 작가가 '관객의 시점'을 중앙으로 가정했다면 나올 수 없는 방향에 뒷모습이 반사되고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푸코는 이를 두고, 그때까지 답습돼온 '관객의 자리'를 바꿔버린 혁명적인 시도라고 평가한다. 이전까지 서양화가들은 관객의 자리가 중앙이라고 가정하고 그림을 그렸지만 마네는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시점(視點)을 들여놓았다.
- ▲ 마네의 <폴리-베르제르 바(bar)〉/기파랑 제공
프랑스의 사상가인 바타유는 마네야말로 예술을 라스코 동굴 벽화에서 시작된 예술 본질의 자리에 되돌려놓은 예술가라고 평가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이래 회화는 군주나 교회에 봉사해 왔는데 마네의 작품은 라스코 벽화처럼 자체의 즐거움을 위해 그려진 그림이라는 설명이다. 마네의 작품 〈풀밭에서의 점심〉에서 인물들의 자세나 몸짓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으며, 구도 역시 어떤 의미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관념에 얽매이지 않는다. 〈풀밭에서의 점심〉은 두 명의 남자는 옷을 입고 있지만 한 명의 여자는 벌거벗은 채로 관객을 빤히 쳐다보는 작품이다.
푸코나 바타유 같은 사상가들의 찬사가 쏟아지고 있지만 마네는 살아생전에 인정받지 못했다. 1863년 프랑스 미술 공모전이었던 살롱전에 〈풀밭에서의 점심〉을 출품했지만 낙선과 함께 혹독한 비난과 야유를 들어야 했다. 당시 파리 사람들은 이 작품을 보고 '외설적'이라며 손가락질을 해대고 "그림의 기본 구도는 물론 색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자"라고 조롱했다. 〈올랭피아〉 등 마네의 다른 작품도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마네는 당대의 인정은 받지 못했지만 그가 보여준 혁명적 시도는 새로운 조명을 받으며 부활하고 있다. 저자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는 불문학자로서 《비정상인들》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등 푸코의 저서를 다수 번역했다.
입력 : 2009.02.28 03:04
'◀취미와 여행▶ > 고고,미술,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속 여성]윌리엄 블레이크-캐서린 왕비의 꿈 (0) | 2009.03.06 |
---|---|
풍납토성 시유도기 복원 한창 (0) | 2009.03.04 |
[명화속의 여성]목마른 산모아기 물 못마시게 (0) | 2009.02.28 |
美-그녀의 짙은 눈동자, 천개의 고독을 담았네 (0) | 2009.02.28 |
HOME > 뉴스 > 전체기사 크게 작게 (0) | 2009.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