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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曲線美感 2부] (13) 천한봉의 찻사발

눌재 2009. 5. 24. 01:01

[曲線美感 2부] (13) 천한봉의 찻사발
두 손 모아 반듯하게 잡히는 찻사발의 아늑함
입술 살짝 갖다 대면 비로소 손과 마음은 하나가 된다
차(茶). 그게 뭘까. 먼 시절의 그 조주스님이 일찍 "끽다거(喫茶去)"했건만 몸이 무겁고 마음 답답한 이들 여전히 부지기수. 한 모금의 그 차로 달래지려나. 차 마시기를 다반사(茶飯事)로 여기는 이들 또한 부지기순데. 그들 또한 무겁고 답답한 몸과 마음 없으랴. 마셔도 안 마셔도 몸과 마음 그러니 "차나 한 잔 드시고 가게"가 실로 우리들에게는 영원한 화두로 자리매김된 거 분명타. 그래도 마셔야 하는 차라면 그냥 마실 뿐. 거기에 몸과 마음을 싣고 화두마저 덧씌운다면 차만 고생이요 몸과 마음 또한 헛수고.


천한봉(千漢鳳)의 '문경요'를 찾아가는 날. 마침 문경장날이었다. 산 두릅이며 다래순, 미나리, 곰취나물, 가죽 등 입맛 돋우는 봄나물들을 사이에 두고 흥정하는 소리가 새재를 넘나든다. 그래서 흥정인가. 싸게 사고 비싸게 팔아야 하는 뻔한 잇속들. 용케도 합의에 이르면 웃음들이 장바닥을 들썩이고 기분 좋게 나누는 차 한 잔. 그 차가 인근의 자판기에서 뽑아온 종이컵에 담긴 커피. 그 역시 '끽다거(喫茶去)' 아닌가?


봉하마을에서도 시시각각 다들 차 한 잔씩 할 건데. 운명의 그 날을 앞두고 목이 타고 가슴이 답답하니. 그들이 무슨 차를 마시든 화두는 역시 '끽다거'. 차 한 잔 하고 간다면 어디로 가는 것일까. 문경장날 흥정하듯 무슨 흥정이 이뤄지는 것은 아닐까. 산나물 흥정하듯 흥정할 리는 없을 테고. 그렇다면 그 흥정은 덩치 큰 것이 분명하다. 흥정을 유달리 싫어했다는 몽테뉴가 싫어한 이유로 겨우 두어 푼 소득을 보는 때문이라고 그의 '수상록'에서 밝혔지만 이렇게 '덩치 큰 흥정'을 왜 그는 몰랐을까.


문경요는 장터서 자동차로 약 20분. 낮은 여름이고 저녁부터는 서늘한 기가 도는 요즘이지만 조령산록 밑은 바람 때문에 제법 한기가 있다. 신물 나도록 들어 온 인플루엔자A(신종플루) 이야기가 여기서는 좀 낯선 듯싶다. 당국의 발표로는 여전히 겁을 먹어야 할지, 괜찮아질지 가늠키 어렵다. 외신들은 신종플루가 기후변화, 환경파괴, 혹은 가난 탓이라니. 모두가 허겁지겁. 결국 인간의 탐욕이 화근으로 귀결된다. 수의사 마크 제롬 월터스는 '전염병이 몰려 온다'며 이런 것들을 생태병(ecodemic)으로 부른다. 인간을 포함한 생물들 사이의 균형이 깨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망할 놈의 균형. 우리들에게 지금 깨지고 있는 것은 어디 그런 균형뿐인가.


그는 도예명장이다. 무형문화재 32호. 사기장. 이 날도 희끗한 머리카락을 날리며 희뿌연 흙물을 거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60여년을 이렇게 살아 왔다며 응접실로 안내하는 걸음이 나비같이 사뿐하다. 차 도구를 비롯한 진열된 많은 작품들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다. 어느 지인이 샘과 같이 맑은 도자기를 빚어라며 지어준 도천(陶泉)이라는 아호가 비로소 어울린다. 가업을 잇는 막내 딸 경희씨가 2대도천. 15대 심수관가에 비하면 아직은 엄청 많은 연륜이 필요하지만 숫자는 역시 숫자에 불과한 것.


전통을 고집한다고 했다. 고려와 조선시대 서민들이 즐겨 쓰던 것을 재현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름다움과 실용성이라는 기본 정신에 충실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그의 찻사발은 곡선이 아름답다. 두 손 모아 반듯하게 잡히는 찻사발의 그 아늑함. 그런 가운데 그어진 곡선의 그 둘레는 세 바퀴 돌려 입술에 갖다 대면 비로소 가슴으로 번져 오는 저 손과 마음의 일치. 비록 '다경(茶經)'에 "심산유곡의 한 칸 집에 앉아 샘물로 차를 달일 때 솔바람 같은 소리가 들리며, 이 때 피어오르는 연기 즉 다애(茶靄)를 맡을 때의 그 맛은 속인으로는 도저히 가까이해 볼 수 없다"고 했어도 그렇지. 도천의 찻사발 한 바퀴만 돌려도 그에 버금가는 맛들이 손끝으로 물씬거려 오듯 한다. 여기에 차 한 잔이면 가히 그 기분 어떠랴 싶다.


오늘은 말차 대신 작은 찻잔에 차를 따라 준다. 한 모금 머금어 도천이 빚은 두두옥다완(斗斗屋茶碗)을 본다. 그가 가장 좋아한다는 찻잔이다. 일본인들이 미친다는 찻잔이다. 그냥 청빈하고 욕심 없고 어쩐지 은은하고 짜임새가 탱탱하다. 헤벌어지지도 옹졸하지도 않다. 몸체의 저 매무새는 아무 곳에서나 젖 물리는 아낙의 그 담대하고 당당한 모습이 곡선과 더불어 둘러져 있다. 저것이 어느 날 깨져 산산조각이 난다해도 그 조각들이 그대로 살아 있을 듯하다. 정호승의 시 '산산조각' 마지막 구절에서 그런 표현이 있지. "…산산 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 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 갈 수 있지". 정녕 그대는 산산조각으로 살아 갈 수 있을까. 만약 그대 주위가 깨진다면.

선의 비조라는 달마조사가 정진을 위해 스스로 눈썹을 밀었다. 민 그 자리에 차나무가 자랐다. 그래서 차는 명상을 지속하게 하며 모든 정념을 극복하고 깨달음의 본질을 암시하는 초월의 경지를 나타낸다고 설명된다. 그대의 차도 그런가? 임어당이 '생활의 발견'에서 "혼자서 차를 마시면 이속(離俗)이라는 말을 듣게 되고, 둘이 마시면 한적(閑適)이라 일컬어지고, 셋이나 넷은 유쾌하다고 말해지고, 대여섯 명이면 저속이라 불리고, 일곱 여덟 명이면 경멸하는 뜻에서 박애라 불리게 마련"이라고 했다. 그대는 지금 어떤 말을 듣고 있는가. 혹 찻물로 헛되이 날 보낸다는 핀잔 들으면 사명대사의 '전다시(煎茶詩)' 읊어 주시게.


"방인막도허소일(傍人莫道虛消日·옆 사람들아 헛된 날 보낸다고 말하지 마오)

자다여한간백운(煮茶餘閑看白雲·차 달이는 여가에 흰 구름을 본다네)"


솔직히 요즘 흰 구름 여간해서 보기 쉬운 일인가. 여가 있으면 흰 구름 없고, 흰 구름 있으면 여가 없는 요즘 사람들. 그렇지만 마음 한 번 다잡고 차 맛이 어떤가를 음미하는 멋도 있어야 한다. 윤오영이 '엽차와 인생과 수필'이라는 글에서 "첫 번째는 방향(芳香), 두 번째는 감향(甘鄕), 세 번째는 고향(苦香), 네 번째 담향(淡鄕), 다섯 번째 여향(餘香)이 있어야 차의 일품"이라고 했다. 이어 그런 차를 심고 가꾸고 거두고 말리고 끓이는 데는 각각 남모르는 고심과 비상한 정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러니 어디 쉬운 일인가. 차 달여 마시는 일이.


얼마 전 배용준이 문경요에 다녀갔다고 했다. 며칠 숙박했다는 것이다. 왜 왔을까. 인기로 인기를 살리는 비결이 찻사발에 담겨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찻사발의 그 유려하고 우아한 곡선에 반해서 일까. 그렇지는 않을 테지만 문경요는 요즘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음에 틀림없다. 오는 10일까지 열리고 있는 문경찻사발축제도 그래서 더욱 성황을 이룬다. 곡선의 그 사람들 물결이 일렁이면서.

협찬 : 대구예술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