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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書道)의 관계론’-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아버님께 제가 서도를 운위하다니 당구(堂狗)의 폐풍월(吠風月) 짝입니다만 엽서 위의 편언(片言)이고 보면 조리(條理)가 빈다고 허물이겠습니까. 일껏 붓을 가누어 조신해 그은 획이 그만 비뚤어 버린 때 저는 우선 그 부근의 다른 획의 위치나 모양을 바꾸어서 그 실패를 구하려 합니다. 이것은 물론 지우거나 개칠(改漆)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상 획의 성패란 획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획과 획의 ‘관계’ 속에 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획이 다른 획을 만나지 않고 어찌 제 혼자서 ‘자(字)’가 될 수 있겠습니까. 획도 흡사 사람과 같아서 독존(獨存)하지 못하는 ‘반쪽’인 듯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자’가 잘못된 때는 그 다음 자 또는 그 다음다음 자로써 그 결함을 보상하려고 합니다. 또한 ‘행(行)’의 잘못은 다른 행의 배려로써, ‘한 연(聯)’의 실수는 다른 연의 구성으로써 감싸려 합니다. 그리하여 어쩌면 잘못과 실수의 누적으로 이루어진, 실패와 보상과 결함과 사과와 노력들이 점철된 그러기에 더 애착이 가는 한 폭의 글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얻은 한 폭의 글은 획, 자, 행, 연들이 대소, 강약, 태세(太細), 지속(遲速), 농담(濃淡) 등의 여러 가지 형태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양보하며 실수와 결함을 감싸주며 간신히 이룩한 성취입니다. 그중 한 자, 한 획이라도 그 생김생김이 그렇지 않았더라면 와르르 열 개가 전부 무너질 뻔한, 심지어 낙관(落款)까지도 전체 속에 융화되어 균형에 한몫 참여하고 있을 정도의 그 피가 통할 듯 농밀한 ‘상호연계’와 ‘통일’ 속에는 이윽고 묵과 여백! 흑과 백이 이루는 대립과 조화. 그 ‘대립과 조화’ 그것의 통일이 창출해 내는 드높은 ‘질(質)’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규격화된 자, 자, 자의 단순한 양적 집합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는 남남끼리의 그저 냉랭한 군서(群棲)일 뿐 거기 어디 악수하고 싶은 얼굴 하나 있겠습니까. 유리창을 깨뜨린 잘못이 유리 한 장으로 보상될 수 있다는 생각은, 사람의 수고가 인정이 배제된 일정액의 화폐로 대상(代償)될 수 있다는 생각만큼이나 슬쓸한 것 아니겠습니까. 획과 획 간에, 자와 자 간에 붓을 세우듯이. 저는 묵을 갈 적마다 인(人)과 인 간(間)의 그 뜨거운 ‘연계’ 위에 서고자 합니다. 춥다가 아직 덥기 전의 4월도 한창 때, 좋은 시절입니다. 신영복(1941~)성공회대 교수.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20년만인 1988년 가석방. 고립된 공간에서 밤이고 낮이고 같은 얼굴을 봐야 하는 괴로움, 인간이 36.5도의 불덩이처럼 보이는 여름보다는 살 부비며 함께 떠는 겨울이 차라리 나은 이율배반, 그 속에서 인간 본연의 보편적 정서를 이타적인 시선으로 본다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가. 그런 가운데서도 쓰기에 대한 스스로의 엄격함을 밝히고 있는 이 짧은 편지글은 인터넷에 아무렇게나 댓글을 붙이는 오늘의 세태에 한층 준엄하게 다가온다. 그의 말이 비단 붓글씨에만 해당될까. 억지 논술 공부에 진지함을 잃어버리고 있는 학생들로서는 더욱 소중히 보듬어야 할 글이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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