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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윤의 아시아 문화기행] 印 다울라타바드적막하고 황량한 유적지 ‘완

눌재 2009. 9. 17. 16:16
[전명윤의 아시아 문화기행] 印 다울라타바드
적막하고 황량한 유적지 ‘완벽한 폐허’
  • 단기여행은 시간이 짧다 보니 일정이 촉박하고, 항공권 비용 등 이왕 나온 거 본전을 빼야겠다는 심리가 더해져서 꼭 무리하게 된다.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호텔에서는 잠자기 바쁘다. 오늘은 뭘 했더라 반추하고, 내일은 뭐 할까를 고민하는 행복감이 단기여행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도는 장기여행의 천국이다. 남한의 33배, 유럽만 한 땅덩이에 볼거리도 많고, 무엇보다 아직까지는 여행경비가 저렴하다. 상대적으로 비싼 항공권 값만 뺀다면, 인도는 오래 머물수록 남는 장사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에게 인도 여행의 최저 기간이 한 달이다. 한국에서는 해외여행을, 그것도 한 나라만 한 달했다면 “우와 너 인도 박사구나!”라고 말하겠지만, 한 달이라고 해도 인도 북부의 가장 유명하다는 곳은 바쁘게 찍을 뿐이다. 한국에서의 평가와 달리 인도에서 ‘한 달’ 여행자는 젖먹이에 불과하다.

    ◇아치와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모습이 아름답다.
    대체 인도에 뭐가 있었니? 1996년 10개월간의 가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나에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물었던 질문이다. 바꿔 말해 ‘인도 최고의 볼거리는 무엇이었니’로 치환할 수 있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 버전이 있는데, 공통 대답 필수 2번에 속하는 것을 꼽으라면 ‘그곳은 폐허가 정말 아름다운 곳이야’라고 할 수 있겠다.

    언젠가 한국 여행을 하며, 미륵사지의 그 처참한 시멘트 칠을 보고 절망한 적이 있었다. 이걸 꼭 굳이 이렇게라도 해서 세워놔야 했나. 우리는 설사 뒤로 돌아가서 실망하는 한이 있어도 전면은 그럴듯해야 한다.

    인도의 미덕은 이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 인도의 해답은 내버려 둔다에 가깝다. 인간의 역사가 신의 역사에 비하면 모래알만큼 짧기 때문에 역사기록을 아예 안 해버린 사람들이다. 유적지 같은 것? 그냥 내버려 둔다. 그냥 내버려 두면 무엇이 될까? 무너진 돌 틈 사이로 풀이 자라고 꽃이 핀다. 어차피 사람은 오갈 테니, 폐허 사이로 길이 난다.

    완벽한 폐허. 그 황량함이란, 그 황량함 속에 보이는 자그마한 녹색들의 아름다움이란. 황량함 너머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끝없는 저 지평선이란….

    인도의 수많은 폐허 중 최고를 뽑으라면 나는 단연 다울라타바드(Daulatabad)를 손꼽는다. 1327년 오늘날 델리에 수도를 두고 있던 투글라크 왕조는 불현듯 수도 이전을 계획한다. 당대의 폭군으로 악명 높은 술탄 모하메드 투글라크(Sultan Mohammed Tughlaq)를 비난하는 방이 델리 시내에 붙었다는 이유 단 하나였다. 술탄은 이 사소한 격문에 화가나 델리에 정이 떨어져 버린 것이다.

    ◇폐허가 된 유적지에서 바라보는 녹색은 그 자체로 생명의 빛을 내뿜는다.
    델리에서 다울라타바드는 1100㎞가 떨어져 있다. 당시 델리 인구가 60만명가량. 술탄은 모질게도 델리의 모든 주민은 다울라타바드로 이동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세간을 짊어지고 1100㎞를 행군한 시민들은 17년 후, 같은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이 철없는 폭군은 수량이 풍부하지 않은 다울라타바드의 건조함에 질려버린 채 다시 ‘델리로!’를 명령했다. 델리로 돌아왔을 때 인구는 10만으로 줄어 있었다고 한다. 사실 이 정도 사고를 치고 나라가 안 망하면 비정상이다. 투글라크 왕조는 곧 멸망해버렸다.

    이 희극 같은 일이 실제 있었던 일이다. 행운의 도시라는 뜻을 지닌 다울라타바드는 그냥 그렇게 간혹 군사기지나 감옥으로 쓰이면서 그대로 남아버렸다.

    데칸고원, 야트막한 산이 저 멀리 보일 뿐 지겨울 정도로 이어진 평원의 한구석에 다울라타바드는 수풀이 우거진 피라미드 같은 모양으로 서 있다. 60만 시민을 강제로 끌고 온 술탄은 뒤가 켕겼던지, 굳이 바위산을 깎아 산 정상에 궁전을 세웠다.

    ◇그나마 멀쩡한 파수대만이 옛 위용을 위로하고 있다.
    성은 지금도 건재하다. 아직도 반파된 성벽이 남아 다울라타바드의 규모를 말해주고 있었고, 궁전은 우뚝했다. 단지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낡았다는 것. 어차피 모든 유적은 낡은 곳이다. 다른 나라들이 열심히 때 빼고 광낼 때, 이 나라는 그냥 내버려 뒀다. 그나마 볼거리가 남아 있는 궁전 내부는 온통 반파된 폐허의 흔적투성이다.

    한때 모스크로 쓰였던 사원터에는, 동네 브라만 한 명이 자그마한 신상에 붉은 쿰쿰(kumkum) 가루를 묻혀놓고 자기 사원인 양 앉아 있다. 여기 이슬람사원 아니냐고 했더니, 이 마을은 모두 힌두교인뿐이어서 자기가 사원을 만든 거라고 했다. 인도 내의 질기디질긴 종교 갈등이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하긴 종교 갈등을 하려 해도 사람이 많아야 싸울 맛이 날 텐데, 현재 이 마을은 고작 300가구 남짓이다. 진짜 동네 사제가 분명한 듯, 기원을 드리라는 요구도, 동전 몇 푼 제단에 놓으라는 요구도 없었다. 제단 위로, 신상 위로 다람쥐가 뛰어다녀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 어쩌면 그저 더위를 피해 사원 안의 서늘함을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바위산이다 보니 여정은 쭉 오르막의 연속이다. 등산을 방불케 할 정도로 가팔랐다. 이 도시가 계속 남아 전쟁을 벌였다면 진정 철옹성이었으리라.

    ◇바위산 정상에서 바라본 다울라타바드의 풍경. 다울라타바드는 수풀이 우거진 곳에 피라미드 같은 모양으로 서 있다.
    계속 오르다 보니 동굴이 나온다. 겁 많은 술탄께서 동굴을 통과해야 궁전에 닿게끔 설계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역시 인도인지라 안에는 어떤 불빛도 없다. 휴대전화의 플래시 기능으로는 어림도 없을 정도로 동굴은 의외로 넓고, 바닥은 미끄러웠다. 이때 다가오는 횃불을 든 사람. 아! 막대기에 기름을 먹인 솜뭉치 하나가 그의 밥벌이였다. 저항할 수 없는 느낌. 흥정을 시도했지만 확고부동. 하긴 이미 칼자루는 그쪽에 넘어가 있었다.

    결국, 그가 원하는 돈을 다 쥐여 주고 말았다. 인간의 알량함이여. 지금까지 폐허를 예찬하던 나는 온데간데없고, 전등불 하나 달지 않는 인도문화재 당국이 그저 야속할 뿐이다. 동굴은 꽤 길었고, 부실한 솜뭉치는 곧 꺼졌다. 횃불 영감은 결국 내 손을 잡고 동굴을 건네줬다.

    인도여행의 반은 투덜이고 반은 환희다. 투덜대며 동굴을 빠져나오자. 이내 데칸고원의 전망이 펼쳐지며 환희가 밀려왔다. 참 단순한 땅, 머물다 보면 사람 또한 단순해진다. 아니 별것 아닌 단순함으로 충분함에도 우리는 늘 복잡하게 생각하고 사는지도.

    사실 첫 여행을 마치고 사람들의 수많은 질문에 대한 내 공통 대답 필수 1번은 이거였다. ‘인도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마음이 변해. 내가 그렇게 변덕스럽고 다혈질이라는 걸 인정하기 싫었는데, 거기서 사흘 있으니 난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고 말하게 되더라. 생얼이 아닌 생마음을 볼 수 있어서 난 인도가 좋아.’

    방치된 폐허를 사랑한다 했으나, 아주 사적인 이유로 폐허에 잠시나마 분노했으며, 이 앞뒤 안 맞는 행각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정상에 올라 주변 풍경을 보자 모두 잊어버렸노라.

    거창한 미사여구에도 결국 내 다울라타바드행은 이렇게 두 줄 정리. 결국, 여행은 그저 개인의 느낌에만 충실한 단순한 개인사일 뿐인가?

    여행작가

    >> 여행정보

    다울라타바드와 가장 가까운 국제선 공항은 인도 제1의 경제수도 뭄바이다. 뭄바이에서 기차로 8∼12시간 아우랑가바드까지 간 다음,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40분 정도 가야 한다. 근처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엘로라 석굴이 있어, 한국인 여행자들은 의외로 지나치는 곳이다. 이 일대에서 먹을 거라고는 인도식 백반인 탈리뿐이다.
  • 기사입력 2009.09.10 (목) 1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