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와 여행▶/세계풍정

그레이트 짐바브웨

눌재 2009. 9. 22. 01:02

아프리카를 여행할 당시에도 나는 여전히 그랬다. 맨발의 헐벗은 아이들, 수수깡으로 지은 것 같은 초가집들, 여전히 전쟁과 기아로 고통받는 힘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문명’이란 말은 참 멀어보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토록 미개하다고(?) 소문난 아프리카 땅에서 나는 살면서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온갖 예술가들을 다 만나보았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동물의 왕국 ‘세렝게티 국립공원’이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산다는 그 ‘킬리만자로산’을 떠올릴 터이다. 코카콜라병을 들고 다니는 부시맨과 빨간 망토를 휘날리며 한 걸음에 수십㎞를 나는 듯이 뛰어다니는 마사이족 전사, 혹은 짐승의 가죽과 뼈로 만든 요상한 악기들을 두들기는 이상한 음악과 춤들, 원시의 이미지로 가득 찬 미지의 세계……, 그 곳에서 내년에는 월드컵이 열린다고 한다.

아프리카에도 현대 서양문명의 축제라고 할 만할 월드컵이 열린다고 하니 한편으로는 참 놀라운 일이다. 학창시절 세계사와 인류사를 배우면서 나는 단 한번도 아프리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문명의 4대 발상지 중의 하나라고 배운 이집트의 나일강조차 아프리카 대륙 어디쯤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나일강이 흐르는 북아프리카는 단지 유럽과 지중해의 조금 아래에 위치할 뿐이다.

아프리카를 여행할 당시에도 나는 여전히 그랬다. 맨발의 헐벗은 아이들, 수수깡으로 지은 것 같은 초가집들, 여전히 전쟁과 기아로 고통 받는 힘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문명’이란 말은 참 멀어보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토록 미개하다고(?) 소문난 아프리카 땅에서 나는 살면서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온갖 예술가들을 다 만나보았다. 도시든 시골마을이든 어느 길목에서나 “난 예술가야”라고 당당하게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들을 만났던 것이다.

“우리의 특별한 예술적 영감은 말이야, 인류의 문명이 바로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다는 증거야.” 짐바브웨의 수도 하라레에서 만난 아프리카인 친구 타푸야의 말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는 예술가다.(안타깝게도 그림엽서 말고는 그의 작품을 직접 보진 못했다.) “쇼나조각이라고 들어봤겠지? 피카소와 마티스가 우리 쇼나조각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쯤은 상식이겠지?” 가슴을 잔뜩 펴고 이야기하는 타푸야의 눈에서 부러우리만치 단단한 자부심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프랑스의 초현대식 미술관에 보기 좋게 걸려있는 피카소와 마티스의 그림들이 아프리카의 조각예술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쇼나조각’은 타푸야의 부족인 쇼나부족의 예술이다.

“쇼나부족은 돌 속에 영혼이 있다고 믿거든. 내가 돌을 조각하는 게 아니고 돌 속의 영혼이 조각을 해주는 거지.” 타푸야에게 들은 쇼나조각에 대해서는 여행에서 돌아온 몇년 후에야 좀 더 알게 되었다. 쇼나부족은 돌을 다루는 남다른 재능이 있다. 그들은 특별한 영혼이 스며있는 돌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여행하며 돌을 고른다. 돌을 찾아낸다는 것은 이미 작품의 절반은 완성한 것이나 다름없다. 조각가는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단지 돌을 마주하고 숨어있는 형태와 주제를 찾아 명상한다. 그리고 형태와 주제를 찾아내면 망치와 정으로 필요없는 부분을 깨어내며 조각을 완성한다. 쇼나조각은 기도나 수행에 가까운 작업이다.

고대 이집트 문명의 발상지 나일강 너머 수천㎞ 밖에는 13~15세기에 놀랍도록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쇼나 왕국의 유적이 있다. 사막과 같은 벌판에 100m 높이로 가파르게 솟아나 있는 화강암 언덕, 그 꼭대기부터 언덕의 남쪽까지 오로지 화강암으로 세워진 거대한 돌의 도시. 이 유적은 모르타르를 바르지 않고 정확한 계산에 의하여 정교하게 돌을 잘라 쌓아올렸는데 벽의 두께가 무려 5m, 높이가 11m나 되며, 놀랍게도 둘레가 255m나 되는 완벽한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돌만으로 축조된 이 거대한 고대건축물이 600년이 넘도록 무너지지 않고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이 유적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16세기 포르투갈인들이다. 그들에게 고도의 건축술로 지어진 이 아름다운 석조유적은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미스터리였다. 왜냐하면 그것을 발견한 장소가 다름 아닌 원시의 땅 아프리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피라미드를 축조했던 이집트인이나 한때 지중해 연안을 지배했던 페니키아인이 세운 것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발굴 조사 결과 이 놀라운 문명의 주인공이 바로 아프리카인임이 밝혀졌다. 이 유적이 바로 남아프리카 최빈국 짐바브웨를 낳은 ‘그레이트 짐바브웨’(Great Zimbabwe)이다. ‘짐바브웨’는 그 지역 말로 ‘돌로 지은 집’ 혹은 ‘성스러운 집’이란 뜻이다.

그레이트 짐바브웨는 하라레에서 남동쪽으로 300㎞ 떨어진 ‘마스빙고’라는 도시 근처에 있었다. 미니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수 ㎞를 걸어서 그 곳에 도착했다. 외국인 관광객이 거의 없이 텅 빈 유적지엔 고즈넉한 기운이 감돌았다. 갑자기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교복을 차려입은 한 무리의 아프리카 소녀들이 그레이트 짐바브웨의 거대한 타원형 돌집에서 줄지어 걸어나오고 있었다. 소녀들은 지구 역사의 변방으로 밀려난 아프리카의 위대한 문명에 대해 오늘도 열심히 공부했겠지. 혹시 잊고 있을까봐 한마디 덧붙이자면 당신과 나, 인류의 조상 호모사피엔스는 아프리카에서 걸어나왔다.
미노<방송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