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도, 바람도, 구름도 느리게 흘러가는 곳이 있다. 세월의 흐름이 겹겹이 쌓인 돌로 지어진 오래된 교회, 그곁을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사이프러스 나무가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 나무 그늘 아래 돌계단에 풀썩 주저 앉아 몇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있노라면, 어느덧 근처 정겨운 돌담길도, 이름 모르게 피어난 풀꽃들도 친구가 되어 대화를 건넨다. 바람 소리, 햇살 소리, 평화로운 자연이 빚어내는 온갖 빛깔들로 가득찬 이 곳에선, 이상하게도 오히려 시간의 흐름조차도 가늠하기 힘들다. 아니, 시간이 멈춘 듯 하다는 표현이 더 맞는 듯 하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란 책이 한때 서점가의 베스트셀러로 떠올랐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스테디셀러로서 꽤 탄탄한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는 이 책이 당시 주목을 받았던 것은, 초고속 인터넷, 신속배달 자장면집, 퀵 배달 오토바이 서비스, 패스트 푸드 등 세상에 온갖 빠른 것들이 미덕으로 여겨지던 기술과 개발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사뭇 다른 삶의 방식이 있음을 보여줬기 때문이리라.
느리게 산다는 것의 미학을 자연스레 체득하게 해 주는 곳이 바로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생 폴 드 방스(St. Paul de Vence)'가 아닌가 한다. '코드 다 쥐르(Cote d’Azur)'라 불리우는 프랑스 남부 해안의 럭셔리한 휴양 도시들은 지중해 연안 특유의 평화로운 분위기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모나코(Monaco), 니스(Nice), 칸느(Canne), 생 트로페즈(St. Tropez)로 이어지는 프렌치 리비에라(French Riviera)의 해안 도시들에서 자유로운 정취를 만끽하다 살짝 싫증을 느낄 때쯤, 사막 속의 보물처럼 다가오는 곳이 바로 이 프로방스(Provence)의 작은 마을이다.
니스에서 한 시간 남짓, 쏟아지는 햇살을 벗삼아 차로 달리다 다다른 이 곳. 남부 프랑스적인 삶, 프로방스적인 삶에 대한 궁금증이 살포시 떠오를 무렵 도착한 마을 입구에선, 돌과 흙 기둥으로 세운 토대위에 빠알간 지붕이 얹혀진, 프랑스 남부 전형적인 시골 마을의 아담하고 정감있는 집들이 푸른 잎사귀들에 둘러 싸여, 언덕 위에 옹기 종기 모여 있는 것이 눈에 띈다. 햇살이 다시 필자의 눈 속에 가득 담긴다. 벌써 정오인가?. 꼭대기에 조그맣게 매달린 종과 그 첨탑이 인상적인, 오래된 교회를 개조해 만든 테라스식 레스토랑에서 처음으로 프로방스에서의 삶을 몸소 체험하기 시작한다.
구름 한점 없이 맑은 하늘에, 소음 하나 일지 않는 조용하고 평화롭기 그지 없는 풍경. 로제 와인으로 이름난 프로방스답게, 점심식사 메뉴에서도 빠지지 않고 테이블 위에 등장하는 와인이 식탁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푸아 그라(Foie Gras-거위 간 요리)'는 프랑스에서 먹어야 제 격이다. 입안에서 살살 녹아드는 그 맛이 오더브(hors d'oeuvre-전채요리)로 입안에 군침을 돌게 하고 위를 자극해, 다음 등장할 메인 디시(main dish-주요리) 파스타 요리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킨다. 천천히, 그러나 지루하지 않게 두 세 시간에 걸쳐 진행되는 이 점심 식사가 필자가 앉아 있는 지금 이 곳이, 지중해 가까이 위치한 프로방스라는 걸 실감하게 한다. 일상에 쫓겨 몇 십분만에 뚝딱 끝내 버리고 말던 점심 식사의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프로방스적인 삶의 방식은 아주 간단하게는 이렇게 느린 템포의 점심식사에서도 전해지는 듯 하다.
이 아름다운 프로방스의 자연과 삶을 사랑한 아티스트들은 참으로 많이 존재했다. 피카소, 고흐, 마티스, 샤갈 등 몇 세기에 걸쳐 명성을 떨친 화가들은 일찍이 이곳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고, 예술적 영감의 원천을 제공하는 이 곳을 끊임 없이 반복적으로 찾아 드나들었다. 이 화가들이 즐겨 사용한 강렬한 색감의 근원은 이 곳 프로방스의 햇살과 아름다운 풍광이 빚어낸 산물인지도 모를 일이다. 마을의 좁은 골목을 따라 등장하는 많은 갤러리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화사하고 밝은 색감의 화풍들은 밝고 긍정적이며, 충만한 에너지를 가슴에 담고, 뭐 하나 거스를 것 없이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이 곳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닮아 있다.
◇…천천히 생각하고 천천히 걷고, 느끼고, 공감하고…
16세기 중세에 지어진 작은 마을, 생 폴 드방스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껴보려면, 그동안 익숙해져 있던 발걸음의 속도부터 조절해야 한다. 이곳에선 천천히 걷고, 생각하고, 느끼고, 공감하고, 감탄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이 작은 마을의 초입에서부터 등장하는 올망졸망 작은 돌들이 박혀 있는 좁은 돌길을 따라 걷다보면 '루 그랑(Rue Grand)'이라 불리우는, 이 마을의 중심 거리를 마주하게 되는데, 지금부터의 여정은 예측을 불허한다. 시원하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물고, 모험하듯, 호기심 가득한 어린이의 눈으로 이 동화 같은 마을을 즐길 필요가 있다.
좁은 길을 따라 미로처럼 여기 저기로 뻗은 길들은, 여기가 막다른 골목이 아닐까 싶다가도 샛길로, 또 다른 샛길로 구불 구불 이어진다. 여기가 끝이려니, 단정은 금물이다. 중세에 만들어진 건물과 아기자기한 집들을 사이에 두고 비좁은 마을길을 걷고, 또 걷다 보면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을 우물도, 분수 광장도 나타나고, 수많은 갤러리들과 카페, 레스토랑, 아기자기한 소품, 의상 가게가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 끈다. 이층집 열린 창문 턱에 얌전히 자리잡고 앉은 화분들도, 말리려고 널어둔 창문 곁 빨래감들이 바람을 타고 펄럭이는 것도, 양지바른 골목 어귀에 내어둔 편안한 나무 의자도, 모두 놓치지 말아야 이 마을 풍경의 한 조각이다. 이 오래된 골목길을 중세에 프랑스 사람들도 걸었고, 샤갈을 비롯한 유명한 화가들도 걸었으며, 지금 내가 걷고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 속은 왠지 모를 감동으로 벅차 오르고, 머릿속은 차분히 몇 백년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워낙 자그마한 규모의 이 마을은,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 여를 남짓하면, 마을의 또 다른 끝에 다다르게 된다. 전형적인 프랑스의 중세 요새 도시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이 곳은, 마을 전체가 성벽에 둘러싸여 있다. 성벽에 올라서면,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자그마한 골목 골목, 앙증맞은 표지판들이 돋보이고 소박한 삶의 흔적, 세월의 때가 묻어나는 풍경을 접할 때마다 어김 없이 관광객들의 카메라 플래쉬는 터뜨려지지만, 이 곳은 정말 모든 이들에게 놓칠 수 없는 감흥을 선사한다.
◇…짧은 순간 이내 스치고 지나가지만…
빠알간 지붕, 돌담길, 시원한 바람,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화사한 햇살을 한 데 버무려 낸 한 편의 예술 작품 같은 프로방스의 풍경, 이 모든 것들을 눈 속에 그대로 담는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생 폴 드방스는 눈으로 즐기기보다, 가슴으로 느끼게 되는 마을이다. 짧은 순간 머무르고, 이내 스치고 지나가지만, 긴 여운을 남기며 오랜 시간 머물게 되는… 그래서, 생 폴 드방스는 평화롭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예술가의 영혼이 세월의 흐름을 타고 생생히 살아 숨쉬는 이 곳은, 이 곳을 찾는 이들 누구나의 가슴속에 자리한 시인의 영감을 깨우는 곳이다. 자연과 교감하며, 에너지가 충만한 이 곳에서의 삶을 샤갈이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도 그토록 오랫동안, 또 깊이 품고 살았었던 이유는, 우리가 원하는 '진정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와도 맞닿아 있는 듯 싶다. 발 아래, 마을 어귀의 공동 묘지에 묻혀 있는 샤갈의 묘비에 햇살이 따갑도록 내비친다. 누군가에게 또 하나의 영감이 되어 다가갈 한 줄기 바람이 생 폴 드방스를 스쳐 지나간다.
(외국항공사 승무원) ohyer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