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윤의 아시아 문화 기행] 취푸(曲阜)
中 애국주의 열풍 타고 공자 ‘화려한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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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4003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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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취푸(曲阜)를 방문하고는 솔직히 당황했다. 그새 성벽까지 쌓아올려 새 단장한 취푸성도 성이지만, 순례 행렬에 가까운 중국인들의 방문 러시는 불과 10년 사이 중국이 만들어낸 변화 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것에 속했다. 첫 번째 취푸 방문은 1999년이니 딱 10년 전이었다. 당시 취푸, 아니 공자는 중국인에게 미묘한 존재였던 것 같다. 노인들이야 논어의 몇 구절 필담으로 적어주면 좋아했지만 중년 아래로 내려가면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정도나 알고 있을 뿐 그저 무덤덤했다. 공자의 사당인 공묘 또한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썰렁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운, 사당의 본전 격인 대성전에서 이루어지는 보수 공사의 망치 소리만 메마른 공기를 울렸다.
◇공묘의 핵심 건물인 대성전,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중 하나다.
공묘의 대성전은 베이징 고궁의 태화전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지붕 기와 끝에 11마리의 성물이 세워진 곳이자, 유리기와로 건물을 올릴 수 있었던 곳이었다. 공자의 후손은 연성공이라는 직책을 받아 취푸 일대를 다스릴 수 있었다. 설사 왕조가 수십 번 바뀐다 해도, 위치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공자는 문신(文神)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문화혁명을 계기로 변했다. 아니, 그 전에도 간헐적으로 공자와 유학을 비판했던 루쉰 같은 지식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문화혁명을 거치며 나름 정당함이 엿보였던 이성적 비판은 대중의 광기로 대체됐다. 공공연히 인민의 적, 봉건적 지배 질서 확립에 기여했던 쓰레기 사상가로 몰린 공자의 사당은 전국적으로 파괴되는 피해를 겪었다. 동상은 망치에 의해, 비석은 톱에 쓸려 나갔다.
◇무덤이라기보다는 휴양림에 가까운 공림의 풍경.
우리 세대 또한 공자, 유학, 유림 하면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정도로 그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리는 편은 아니지만, 나는 그날 공묘를 보면서 공자란 인물을 알아야겠다는 지극히 반골적 결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두 번째 공묘 방문은 2004년이었다. 5년의 시간 동안 공묘는 놀이공원이 되어 나를 반겼다. 그 사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공묘는 드디어 중국정부의 살뜰하지만 나름 불온한 관심을 받고 있었다. 지금도 중국의 유적지 입장료는 중국인들의 평균수입에 비해 말도 안 될 정도로 비싸기로 악명이 높지만, 이때는 더 했다. 도시 노동자 한 달 임금으로 특급 유적지 10곳을 가기가 벅찰 정도였다. 우리네 체감 물가로 유적지 한 곳에 입장료가 10만원 가까이 하는 형국이랄까. 지방정부는 유적지들을 그저 입장권을 받을 수 있는 놀거리의 하나로밖에 보지 않았다.
◇부러진 비석을 대충 시멘트로 발라놨다.
2004년의 공묘는 딱 그런 분위기였다. 공자가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행단 자리는 전통 의상 스튜디오를 꾸며놓고 관광객에게 중국 황제와 황후의 복장을 입힌 뒤 사진 찍어주는 곳으로 변해 있었고, 대성전 앞뜰에는 요즘 말로 ‘듣보잡’에 가까운 공자표 쿠키를 구워 팔고 있었다. 혹시나 어떠한 고증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사 먹어 봤는데 그냥 서양식 쿠키였다. 2004년만 해도 중국은 서양식에 대한 일종의 갈구 같은 것이 있었다.
특히 대성전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대성전을 깨끗이 한다는 명목으로 1000년 된 목조건물을 물청소하는 사상 초유의 참극이 벌어진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 공묘의 놀이공원화는 문화재 보호, 유지는 해본 적도 없는 데다 투자 대비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싶은 지방정부가 마카오 소재의 놀이공원 관리업체에 관리를 위탁했기 때문이었다. 어쨌건, 두 번째 공묘는 버려진 곳에서 돈을 벌기 위해 이용하는 곳이 되어 있었다. 오히려 대만, 한국, 일본 등 유교권 국가의 관광객이 더 진지한…·.
◇공림으로 통하는 입구. 성인은 이곳에 묻혀 있다. ◇공묘에 있는 공자의 초상.
우리도 그렇지만 이네들도 자신의 입장이 불과 40년 만에 어떻게 정반대로 변했는지에 대해 설명해주진 않았다. 공묘는 근엄했다. 중국에 불고 있는 애국주의의 열풍 탓인지 비석 위에 올라가 뛰어놀던 무개념 중국인들은 눈에 띄게 줄었다. 버려져서 서글펐던 그 공간은 이제 강요된 엄숙함이 지배하고 있었다.
다시 숭배자의 위치로 올라선 공자의 동상 앞에서 그를 생각했다. 살아생전에 어떠한 빛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유랑하던 늙은 스승은 사실 봉건제의 봉사자들에 의해 발견되고 그렇게 황제 권력을 정당화하는 장치로 늙어갔다. 20세기 초 그에 대한 부정은 타당했지만 결국 또 다른 황제에 의해 짓밟혔다. 그리고 다시 필요에 의해 숭배되고 있다.
사실 지난 2600년간 사람들의 입 속에서, 머릿속에서 뇌까려지던 그는 사실 없었는지도 모른다. 메시지는 언제나 공허하다. 그저 몇 구절 작위의 유리함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 인간 아니던가? 공묘는 언제나 나에게 쓸쓸했다.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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