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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잡을 수도, 만날 수도 없는… 사라진 환영을 찾아 떠돌아함정임씨 소설집

눌재상주사랑 2009. 10. 10. 03:57
붙잡을 수도, 만날 수도 없는… 사라진 환영을 찾아 떠돌아
함정임씨 소설집 '곡두'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은 또다른 그리움을 낳고 마지막에는 '곡두'를 낳아
  • ‘곡두’란 환영(幻影)의 의미를 지닌 우리말이다. 일종의 ‘헛것’ 같은 것을 이르는 말인데 소설가 함정임(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45)씨가 일곱 번째 소설집의 표제로 이 ‘곡두’(열림원)를 내세웠다. 표제작을 포함해 10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 작품집을 관통하는 것은 그리움과 상실의 정서다. 

    ◇소설집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부산 ‘달맞이언덕’에서 만난 작가 함정임씨. 그는 “살아온 날만큼의 회한의 무게와 소설을 써온 날만큼의 부끄러움에 몸서리를 친다”고 작가의 말에 썼다.
    첫머리에 연이어 수록된 ‘곡두’ ‘자두’ ‘상쾌한 밤’은 세 편의 독립된 단편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기실 동일 인물들이 등장하는 연작 성격이다.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을 키우고 있는 ‘그녀’가 전처와 이혼하고 혼자 살아가고 있는 ‘그’를 만나 결혼을 앞두고 벌어지는 일들을 공통으로 다루고 있다. 여기에 평생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녀’의 배 다른 오빠가 등장한다. 그녀는 그 오빠와 함께 식장에 들어서기 위해 찾아다니지만 오빠는 ‘곡두’처럼 숨어서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이 오빠는 존재 자체가 희미한 사람이다. 그는 살아 있어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집에 들어오면 늘 책상에 엎드려 사는 오래된 습관을 지니고 있다. 여섯 살 때부터 시작된 습관이라는데, 그때 세 번째이자 마지막 계모가 집에 들어왔다. 그것은 “누구는 누군가의 귓불을 만지고, 누구는 자기 젖꼭지라도 만져야 잠드는 사람이 있듯이 결핍된 모성을 향한 자기보호장치”(25쪽)였다. 결혼한 뒤로 한동안 그런 습관이 없어졌다가 다시 엎드린 채 생각하고, 말하고, 자고, 한마디로 엎드린 채 생활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 오빠는 애써 그를 찾는 그녀를 외면하고, 삶의 일선에서 벗어나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는 지두화(指頭畵) 작가로 숨어 산다. 피붙이라는 상징적인 존재를 내세워 아득한 그리움과 슬픔을 배면에 깔아놓은 작품이다.

    이어지는 ‘자두’는 그녀와 결혼할 ‘그’의 시각으로 전개되는 단편이다. 그녀가 오빠를 만나는 대신 그 오빠로부터 받아온 그림을 모티브로 자두 이야기가 펼쳐진다.

    식탁에는 언제나 검붉게 농익다 못해 터질 듯 향기로운 탐스러운 자두를 놓아두었는데, 그것들이 바닥을 구르다 벽에 부딪쳤다. “몇 알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심장처럼 자두 두 알이 서로 옹송그리며 한 덩어리로 붙어 있었다.”(67쪽) 이 문장이야말로 작가가 굳이 이 단편 제목을 ‘자두’로 붙인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낼 수 있을 것 같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이별은 필연적으로 그리움을 낳고, 그리움은 다시 아득한 ‘곡두’를 낳는다. 현실에서 붙잡을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것들의 운명은 곡두일 수밖에 없다.

    세 번째 작품 ‘상쾌한 밤’은 오빠의 시각으로 이어진다. “그가 엎드리기 시작한 것은 열 살 무렵, 계모가 아버지의 아들을 낳고, 생모의 기억이 점점 뇌리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자각하고부터였다.”(86쪽) 어느날 외삼촌이라는 남자가 나타나 생모의 모습이 담긴 1978년 5월의 사진 한 장을 보여준 뒤 금방 암으로 세상을 뜬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배다른 여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상행선을 타는 대신 생모의 흔적을 찾아 하행선을 탄 오빠는 이렇게 탄식한다. “생면부지의 오빠를 만나려는 여동생이나 1978년 5월 송정의 그녀를 찾아온 자신이나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93쪽) ‘33번 기억의 하루’라는 작품은 2035년을 배경으로 그린 미래소설 형식인데, 언제든지 기억을 꺼내어 다시 체험할 수 있는 ‘메모리즈 뱅크’라는 게 등장한다.

    부산발 베이징행 초고속열차를 타고 가던 P가 서울역에서 중도에 내려 33번 기억을 뱅크에서 꺼낸다. 그 33번 메모리 속에 현생에서는 죽음으로 인해 만날 수 없는 Y라는 친구와, 그 역시 사랑했던 Y의 아내 J 이야기가 펼쳐진다. 기억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은 실체가 사라진 환영이라는 점에서 기억이나 추억 역시 모두 곡두라 할 만하다. 따지고 보면 인생이란 평생 이 곡두와 벌이는 숨바꼭질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집에는 이 작품들 외에도 ‘달콤한 눈물’ ‘행인’ ‘킬리만자로의 눈[目]’ ‘백야’ 등이 수록됐다.

    조용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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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09.10.09 (금) 21:44, 최종수정 2009.10.09 (금) 2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