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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용의 와인으로 읽는 문화사] <3> 피렌체와 키안티 클라시코‘두오모’

눌재상주사랑 2010. 4. 15. 23:09
[조정용의 와인으로 읽는 문화사] <3> 피렌체와 키안티 클라시코
‘두오모’ 정상서의 벅찬 감동
오랜 여운 남기는 타닌처럼 피렌체의 추억을 간직게 하고
  • 지성인이 아니어도 지남철처럼 끌리는 곳 피렌체로 갔다. ‘피렌체 찬가’에 서술된 레오나르도 브루니의 글을 굳이 읽지 않더라도, 피렌체 땅에 발바닥을 붙여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각자 모양의 피렌체 찬가를 저도 모르게 부를 것이다. 대도시를 피해서 피렌체로 여행자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거기에는 촌락이 있고, 이상이 있고, 그리고 중세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피렌체에 많은 여행자들이 붐비는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기실 피렌체로 피하는 행위는 이미 오래전부터 지속돼온, 퍽 유래가 있는 일이다. 사람들은 로마제국 멸망으로 근본이 흔들렸던 암울한 시기를 극복하고 인본주의 기치 아래 문예부흥을 일으킨 곳에서 쉼을 얻기 위해 피렌체를 찾는다.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내려다본 피렌체 전경. 사진 아래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은 아르노강이고, 둥그런 지붕을 얹은 건축물이 세계문화유산 두오모다.
    피렌체는 마술에 걸린 것처럼 중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예를 들어 문헌상으로는 10세기에 처음 등장하지만 홍수로 유실돼 1345년에 현재의 모습을 갖춘 폰테 베키오 다리를 보자. 고려말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했을 때보다 사십삼년 일찍 축조된 이 돌다리는 지금도 수십명 아니 수백명이 한꺼번에 다리 위를 걷다가 회보해도 끄덕 없을 정도로 건재하다. 피렌체를 남북으로 가르는 아르노 강 위의 다리를 모조리 파괴하라 했던 히틀러조차도 이 다리만큼은 남겨놓으라고 특별히 명했다고 전하는 다리의 뜻은 의외로 단순한 ‘오래된 다리’.

    해질 무렵의 폰테 베키오는 피렌체의 영광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다리를 걷다 보면 금세 다리 위란 사실을 잊을 정도로 좌우에 상가들이 포진해 있다. 저녁에 다리를 쳐다보면 보석가게로 가득 찬 다리에서 뿜어 나오는 금빛과 붉은 노을이 한데 어우러져 그렇게 화려할 수가 없다. 폰테 베키오에서는 화려한 ‘영화’뿐 아니라 아이로니컬하게도 쓰라린 ‘도산’이란 말도 함께 나왔다. 단어 ‘bankrupt’는 돈을 제때 갚지 못한 상인의 물건(banco) 진열대가 군인에 의해 부서졌다(rotto)는 데서 파생되었다는 주장이다. 지금은 허가 받은 상점만이 다리 위에서 운영되며, 좌판이나 잡상인은 일절 금지되고 있다.

    박물관과 같은 도시 피렌체의 추억 보존 능력은 소설가 E. M. 포스터가 1908년에 실증했다. 소설 ‘전망 좋은 방’에 피렌체는 영국인들의 로망으로 묘사된다. 책에 등장하는 20세기 초의 좋은 전망 거리는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그대로이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 ‘방’은 호텔 델리 오라피의 방을 조명한다. 그 호텔 홈페이지에는 영화 등장의 자부심이 활자로 남아 있다. 호텔 바로 옆은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회화 이미지, 보티첼리 작품의 ‘비너스의 탄생’이 걸려 있는 우피치 미술관이다. 메디치 가문의 소장품으로 만든 미술관으로 찾기 무척 쉽다. 휴일 이른 아침인데도 사람들이 붐비는가. 거기가 바로 거기다.

    피렌체의 상징 중에 두오모를 빼놓을 수 없다. 1296년에 착공을 시작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두오모는 높아 봐야 고작 3∼4층인 납작한 고도시에 어쩌면 이렇게 황당할 정도로 우람한 건축물이 있는지 모르겠다. 두오모는 솟아오른 왕관 같은 지붕을 받치고 있는데, 그 모양이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둥근 지붕과 흡사하다. 정확한 명칭은 ‘바질리카타 디 산타마리아 델피오레’로,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다. 그러니 여기는 꽃의 도시 피렌체에서도 꽃 중의 꽃인 셈이다. 관광객이 없는 순간이 없을 정도로 필수 코스 중의 필수 코스.

    대성당은 그 위세만큼이나 당당하게 피렌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106m. 서른이 되는 생일날에 꼭대기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던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의 주인공이 되고프면 무엇보다도 심장이 강해야 한다. 거대한 소라 껍데기 같은 속을 어지럽게 빙글빙글 돌면서 무려 464개의 계단을 올라야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상에 다다르면 벅찬 감동이 붉은 기와 지붕 물결과 함께 끝없이 밀려온다.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전시회 모습. 이곳 와인은 고품질의 맛과 향을 자랑한다.
    이탈리아의 혼이 깃들인 곳 피렌체 그 와인은 어떨까? 와인저널리스트로 하여금 와인 이야기 하나 없이 이렇게 글을 계속 쓰게 할 만큼 피렌체에서는 본분을 망각하는 일이 잦다. 내가 그냥 여행자가 아니라 와인 여행자란 사실을 쉽사리 잊고야 마는 것이다. 피렌체에는 ‘키안티(Chianti)’라는 와인이 있음을 기억할 것이다. 지역을 일컫는 고유명사 키안티는 오늘날 이탈리아 와인을 대변한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도 키안티는 소재로 등장한다. 둥근 피아스코 병에 담겨 짚으로 받쳐진 키안티 모양은 투박하지만 향토적인 토스카나의 정서를 보여준다.

    방대한 토스카나 일대의 키안티는 곳에 따라 여러 하부지역으로 나뉘는데, 키안티의 한복판을 차지하면서 피렌체와 시에나 두 주요 도시 사이에 자리 잡은 구릉 지역을 ‘키안티 클라시코(Chianti Classico)’라 한다. 굳이 뜻을 풀이하면 고전적인 키안티쯤 되겠지만, 뜻풀이보다는 그냥 키안티 클라시코를 하나의 지역으로 보면 된다.

    이탈리아 와인의 르네상스는 키안티 클라시코의 번성을 통해 실현됐다. 왜냐하면 시큼털털하단 인상으로 와인 세계에서는 그저 그런 와인으로 인식되던 키안티의 이미지는 키안티 클라시코에 의해 격상됐기 때문이다. 향토성과 다양성 외에 고품질까지 거머쥐어야 고급 와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한다면, 키안티는 항상 고품질이 문제였다. 하지만 일단의 키안티 클라시코 양조장들이 괄목할 만한 품질의 향상을 이룩해 키안티 클라시코 특유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아마, 폰토디(Pontodi), 산주스토 아 렌텐나노(San Giusto a Rentennano), 펠시나(Felsina) 등의 양조장들은 단일 포도밭에서 만든 산조베제(Sangiovese) 100%의 순도 높은 토속 와인을 통해 종래의 와인 수준을 뛰어넘고 있다. 국내에는 이 외에도 안티노리, 루피노, 브롤리오, 산펠리체, 몬산토, 베라차노, 퀘르체토, 카스텔라레 디 카스텔리나 등 많은 브랜드가 유통된다.

    키안티 클라시코는 키안티와 뭐가 다른가. 둘 다 이탈리아 최고등급 DOCG이고 레드이며 산조베제로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중심으로 갈수록 해발고도가 높아진다. 원뿔의 둘레가 키안티이고, 중심부를 키안티 클라시코로 보면 맞다. 키안티 클라시코는 높은 산이 주는 서늘함으로 포도를 천천히 익힐 수 있어 균형 잡힌 열매를 얻을 수 있다. 수확량 조절과 가지치기 그리고 기계 수확이 아닌 손수확 등을 통해 품질을 향상하므로 키안티와는 다른 맛의 와인이 되는 것이다. 또한 석회암의 일종인 갈레스트로(galestro)와 하얀 빛깔의 알베레제(albarese) 토양은 산도와 타닌의 완숙에 크게 도움을 준다.

    피렌체의 위세는 와인 산업에도 영향을 미친다. 피렌체와 시에나 두 공화국의 오랜 싸움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둘은 세력다툼을 했다. 전투가 끊이질 않아 휴전이 필요했고, 평화 유지를 위해 국경 획정이 필수 과제였다. 그래서 닭이 울면 기병이 떠나고 서로 만나는 지점에서 경계를 짓자고 합의했다. 피렌체는 남으로, 시에나는 북으로 말을 타고 가는 것이다. 농촌 생활은 닭이 울어야 시작되니 닭이 끼는 게 무리는 아니다. 시에나는 흰 수탉을, 피렌체는 검은 수탉을 택했다. 그러니 결과는 사병이나 말보다는 닭에 달려 있었다. 두 닭은 주변의 불이 모두 꺼진 상태로 우리에 있었고 물론 굶고 있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 왔다. 새벽이 되기 전에 행사 시작을 위해 닭들을 우리에서 꺼냈다. 그런데 검은 수탉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우렁차게 홰를 쳤다. 이 소리를 듣고 피렌체는 출발했다. 한편 시에나에서는 동틀 무렵에야 겨우 닭이 울었다. 시에나의 출발은 당연히 많이 늦었다. 결과는 불문가지. 사람 몸으로 비유하자면 시에나는 무릎 아래 정도만을 차지했을 뿐, 나머지는 모두 피렌체의 영토가 돼 오늘날에 이른다. 키안티 클라시코는 이 전설에 근거해 로고를 검은 수탉으로 삼았다. 검은 수탉은 이탈리아 말로 ‘갈로 네로(gallo nero)’. 이탈리아 최정예군은 수탉 깃털 모자를 쓴다.

    와인 여행자들은 피렌체에서 오래 머물진 않는다. 좀 더 남쪽으로 가면 더 깊고 풍부한, 진한 맛의 와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괴테가 ‘이탈리아 기행’에서 로마가 보고 싶어 피렌체를 건성으로 훑은 것과 비슷하지만 순회가 끝날 무렵이면 그들은 피렌체로 돌아가기를 바라며 그렇게 되기를 힘쓴다. 피렌체의 매력은 온화한 타닌처럼 오랫동안 여운을 남기기 때문이다. 차이콥스키 현악6중주 ‘피렌체의 추억’이 그렇게 해서 탄생한 곡일지 모른다. 해서 다시금 하릴없이 두오모 주변을 맴돌고, 폰테 베키오를 서성거린다.

    ■추천

    사랑하는 이에게 어떤 선물을 고를까 고민이라면 언제라도 약국 산타 마리아 노벨라(www.smnovella.it)를 추천한다. 동명의 기차역 맞은편 동명의 교회(두오모와 다름)에 위치한 관계로 산타마리아 노벨라라는 이름을 쓴다. 여기는 그 교회의 수도자들이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약초를 재배하고 약품을 만든 게 인연이 돼 설립됐다. 1612년에 문을 열었으니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의 시대적 배경인 18세기보다 훨씬 앞선다. 내부에 들어서면 꼭 노동에 찌든 살인자가 복도 한끝에서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고, 또 소설에서 사용한 향수를 어쩌면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인테리어는 수백년 된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므로 무척이나 고풍스럽다. 16세기에 프랑스로 시집가 왕비가 된 카트리나 데 메디치가 애용했다는 향수 ‘오드콜로뉴(쾰른의 물)’가 유명하다. 작년부터 국내에서도 유통되고 있다.

    글·사진 조정용 와인저널리스트 (‘올댓와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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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0.03.15 (월) 21:56, 최종수정 2010.03.15 (월) 2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