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용의 와인으로 읽는 문화사] <4> 佛 부르고뉴 지방―수도사들이 발견한 테루아 와인
와인의 모태 ‘황금 언덕’서 하늘의 소리를 갈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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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뉴는 불친절한 와인이다. 쾌청하거나 화창한 날보다는 흐리고 비가 많아 질퍽한 부르고뉴, 완만한 언덕이 남으로 끝없이 느리게 이어지는 단조로운 부르고뉴, 불어가 아니면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부르고뉴, 기념 촬영을 한다 했는데 흙투성이 작업복으로 나타나는 부르고뉴, 사람이 아닌 대지에 코드를 맞춰 테루아를 숭상하는 부르고뉴, 이 포도 저 포도 혼합해 만들면 복합적인 맛이련만 단일 포도만 고수하는 부르고뉴, 최고급 와인을 만들려면 노력할 것이 아니라 땅을 사야 한다고 믿는 부르고뉴,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자꾸 속는 가볍고 모자라며 빈 듯한 맛의 부르고뉴, 하지만 빈티지가 좋기만 하면 지난 날의 실망을 단번에 잊게 하는 부르고뉴, 그 부르고뉴를 만나는 여정은 와인 여행자에게 최고의 호사다. 맑고 투명하며 향긋한 부르고뉴 와인을 무진장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까다롭고 불친절하지만 한번 맛을 보면 헤어나지 못하는 관능미가 바로 부르고뉴 와인이다.
◇부조 마을 포도밭 한가운데 자리 잡은 수도원 ‘클로 드 부조’. ‘클로 드 부조성’은 독지가에 의해 마을에 기부됐고, 해마다 성대한 와인잔치와 음악회 등이 열린다.
910년 베네딕트파가 세운 부르고뉴의 클뤼니 수도원은 ‘클뤼니의 개혁’으로 유명한 수도원 개혁운동의 발상지이면서 동시에 포도원을 소유해 적극적으로 와인을 양조한 곳이다. 또한 베네딕트파에 속한 일단의 수사들이 1098년 부르고뉴의 시토에서 시작한 시토파는 부르고뉴 와인의 초석을 다졌다. 시토파가 1109년부터 1115년 사이에 기증받은 포도원들은 주로 부조 마을의 땅이었다. 그 땅들을 조각 맞추기처럼 하나씩 붙이면 큰 덩어리의 형태를 이루는데, 그 밭들은 담으로 둘려져 있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클로 드 부조’. 수도원 이름이자 포도밭 이름이고 와인 이름이기도 하다.
시토 수도원에서 약 삼 십리 떨어진 클로 드 부조 수도원의 수사들은 고행을 통해 하늘의 목소리를 소망했다. ‘버건디(부르고뉴) 이해하기’의 저자 맷 크래머는 한 강의에서 “암울했던 중세를 살던 수도사들은 하늘의 목소리를 갈구했는데, 포도밭에서 땀방울을 쏟으며 노동을 하면 하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한 평생 수도에 정진한 수도사들은 자신이 속한 지역교회 주변을 샅샅이 알 수 있는데, 그들은 특히 포도밭의 위치에 따라 와인 맛이 달라짐을 발견했다. 돌 하나 던지면 닿을 만큼 가까이 붙은 밭이지만 저마다의 특성이 있음을 깨달았다. 특성이 있으니 이름이 생겼다. 구분해 호칭할 필요가 있었으니 구획 별로 각각의 이름이 붙었다. 샹베르탱, 뮈지니, 로마네 등이 그것이다. 부르고뉴에서는 포도가 얼마나 여물었나를 확인하기 위해서 엄지와 검지로 껍질을 눌러 손톱에 물드는 색깔을 본다. 수도사들이 수백 년 동안 사용하던 이 방식은 지금도 유용하다.
◇뫼르소 마을의 유명한 양조장 도멘 콤트 라퐁(Domaine Comtes Lafon)의 오래된 와인 저장고 모습.
수도사들은 교황청에 의해 타지로 발령받는 날을 대비해 포도 육종과 와인 양조에 대해 일기를 작성했고 그 기록물을 유산으로 남겼다. 또한 그들은 클로 드 부조에서 경험한 비법을 부임지 수도원에 전수했다. 그래서 클로 드 부조를 중세 유럽 와인 양조의 ‘싱크탱크’라고 한다. 수도원 ‘클로 드 부조’로 가는 길은 오늘날 부르고뉴 와인 애호가에는 마치 성지 순례의 길과 같다. 집권 후 교회 재산의 세속화 조치를 단행한 나폴레옹에 의해 클로 드 부조는 여러 개인에게 공매됐고, 개인들의 포도밭은 나폴레옹 상속법에 따라 자녀 숫자만큼 분할됐기에 오늘날 클로 드 부조는 80여명이 분할 소유하고 있다. 1395년 부르고뉴 공작 필립 드 아르디는 부르고뉴 와인의 품질에 관한 조례를 발표하면서 품질이 좋지 않은 가메 품종을 금지했는데, 그 포도가 바로 보졸레 누보를 만드는 포도다.
영화 ‘몬도비노’에서 부르고뉴 볼네 마을의 양조장 주인 위베르 드 몽티유는 “포도나무 있는 곳에는 문명이 있고, 야만이 없다”고 말하며 와인과 부르고뉴가 일체임을 강조했다. 또한 그는 “어떤 사람이 만들었다는 것보다 테루아르가 열 배는 더 중요하다”고도 했다.
부르고뉴의 포도밭 언덕을 ‘코트 도르’라고 한다. 황금의 언덕 혹은 동향의 언덕으로 풀이된다. 디종으로부터 남하하면 끝간 데가 리용이고, 그 사이의 수많은 마을들을 실로 꿰어서 부르고뉴라고 이름하지만, 무게중심이 있는 곳을 코트 도르라고 명한다. 황금의 언덕은 가을 추수할 무렵에 금빛으로 물드는 밀밭과 단풍 든 포도밭을 보면 절로 실감할 것이고 비싼 와인 값을 보면 저절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한편 동향의 언덕은 언덕이 너나 할 것 없이 대부분 동쪽으로 경사를 내리고 있기에 그 이름이 붙은 것이다. 나폴레옹이 남유럽을 공격하기 위해서 코트 도르를 지나쳤는데, 아마도 그는 이 언덕을 지날 때 끝없이 ‘우로 봐’를 명령했을지 모른다. 프랑스 대자연의 아름다움, 부르고뉴의 풍요로움, 위대한 와인의 모태를 보게 하는 것이 사기 진작과 군기 확립에 효과적임을 깨달았을지 모른다. 힘찬 구령에 삼총사 같은 검객들이 일제히 칼을 빼 하늘로 들어 올리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근엄하고 멋지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구령이 없다면 어느 병사도 부르고뉴의 비범함을 알아차릴 수 없다. 그런 모양의 구릉은 그들 고향에도 널려 있을 것 같으니 말이다. 이 길은 중세부터 존재했다. 북유럽에서 지중해로 가려면 꼭 이 길을 거쳤으니 오늘날 굳이 와인기행을 하지 않아도 남하하려는 관광객들은 이 길을 지나기 마련이다. 이번 여름에 그리로 갈 것 같으면 코트 도르를 향해 고개를 한 번 돌려보길….
◆추천 관광- ‘오스피스 드 본’(www.hospices-de-beaune.com)
백년전쟁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프랑스 지방인들 간의 보복전이 곳곳에서 자행됐다. 그 결과 많은 부상자와 버려진 가족들이 생겼다. 병과 부상에 시달리는 환자들을 위해 무언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부르고뉴 공국의 총리 니콜라 롤랭은 지역 주민들을 위해 병원을 짓기로 결정했다. 1443년 건축된 이후 오랫동안 오스피스 드 본은 지역주민들을 무상으로 치료했다. 하지만 늘어나는 환자와 걸맞은 시설 확충에 필요한 재원은 바닥이 났다. 그러자 재정 궁핍을 알게 된 지역 출신 독지가들이 성금을 내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소유한 포도밭을 통째로 기부했다. 불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여기서 왔다. 주변이 포도밭인지라 포도밭 기부는 성금만큼이나 일반적인 기부 형태였다. 이렇게 모은 포도밭은 현재 60헥타아르(약 18만평)에 이른다. 대략 사방 800m에 이르는 면적이다. 1971년 인근에 최신식 병원이 건립되고, 오스피스 드 본 건물은 이제 박물관으로 쓰인다. 해마다 50만명의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박물관에는 반 데르 바이덴의 명화 ‘최후의 심판’이 걸려 있다. 매년 실시되는 오스피스 드 본 와인경매는 선한 사업을 위한 모금활동의 상위 버전이다.
글·사진=조정용 와인저널니스트 (‘올댓와인’ 저자)
기사입력 2010.03.29 (월) 21:47, 최종수정 2010.03.29 (월)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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